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제5화 강릉의 위키리크스 <하이강릉>
지난 2008년 6월 10일 촛불집회 기간 서울 광화문에 인파가 모여들었다.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김 기자는 촛불집회 이야기를 하다가 탁자 위로 <시사IN> 38호를 쓱 내밀었다. <시사IN> 표지에는 '시위, 너를 비틀어주마. 촛불과 디지털의 만남 지상 생중계'라고 적혀 있었다.
김 기자는 내게 정희상 기자가 쓴 "송병준 후손 행적 추적했더니…"라는 기사를 펼쳐보라고 했다.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 송돈호가 '친일재산환수특별법' 위헌소송을 냈다는 내용이었다.
"요즘처럼 이슈가 넘치는 때, 이렇게 억수로 재미없는 기사를 쓰는 게 바로 정희상 기자야."
정희상 기자를 소개하고 시작하자. 1964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외대를 졸업했다. 월간 <말>에서 일하다가 1992년 <시사저널>로 옮겼고 현재는 <시사IN>에 몸담고 있다. 1989년 한국전쟁 전후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월간 <말>을 통해 폭로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분노'였다. 1992년 8월 29일 <시사저널> 커버스토리 '이완용 후손 땅 찾기 연쇄 소송'처럼 정희상 기자는 취재 소재를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서 찾았다. 가끔 지역 문제를 취재할 때도 있으나 중앙 이슈가 압도적이라 단편에 머무를 때가 대부분이다.
2011년 여름 강릉에서 제보가 들어왔다. 강릉 시내에서 시장 최명희, 국회의원 권성동, 친척인 권은동 등 한나라당 소속 지역 세력이 토호들과 유착돼 지역 내 이권 잔치를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7월 23일 <시사IN> 201호에 "강릉은 '무법천지' 썩은 내 진동해도 검찰은 솜방망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는 "견제 임무를 맡아야 할 검찰조차 뿌리 깊은 유착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뿌리 깊은 강릉 지역 토착비리 구조는 감사원과 대검 등 중앙정부 차원에서 특단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했다.
단편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 기사 한 편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기사에 거론된 지역 국회의원 권성동과 친척 권은동이 언론보도금지보도가처분(2011카합○○) 신청과 손해배상(2011가합○○) 청구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8월 4일 기사에 거론된 강릉 최명희 시장도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떳떳하다"라고 포문을 열며 강릉시는 8월 11일 손해배상(2011가합○○)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추가 보도를 위한 후속 취재가 이어졌다.
이 소송들이 정희상 기자를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강원도 지역신문이 <시사IN> 기사를 받아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신문들은 최명희 시장이 <시사IN>을 고발했다는 뉴스와 기자회견을 열어서 해명하는 내용을 실었을 뿐이다.
정희상 기자는 자신이 취재한 내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지역 기자가 있으면 연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강원도 지역신문에서 근무했던 한 기자는 사회부 밑바닥인 경찰서부터 시작해 4년을 근무했지만 박봉으로 서울 무가지 매체로 옮겼다. 강원도 한 신문은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유출된 사람이 1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강원도나 충북과 같은 작은 시장에서 취재력이 받쳐주는 선임 기자는 어떨까? 취재만 잘하는 기자는 회사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 회사 이익에 보탬이 되는 광고 영업 능력이 우선이다. 지역이 보수적인 곳은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지방의원, 사업가 모두 권력으로 묶인다. 사업가들이 군수를 비판하는 신문에 광고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강원도 언론사 지면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즐겨 쓰는 '성공적 마무리', '희망', '확충' 같은 보도자료 용어가 난무한다.
정희상 기자는 강릉에 아주 희한한 사이트를 발견한다. <하이강릉>이라는 인터넷신문이었다. <하이강릉>을 소개한 기사를 본 정희상 기자는 <하이강릉>을 '강릉의 위키리크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위키리크스'를 소개하고 지나가자.
2006년에 설립한 위키리크스를 우리 언론은 '폭로 전문 사이트'라고 소개하곤 한다. 위키리크스는 2010년 4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비디오를 하나 공개하며 존재를 알렸다. 미국 아파치 헬기가 민간인을 살상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였다.
전 세계 180여 개국에 있는 해외공관 289여 곳과 미 국무부가 주고받은 25만여 건의 외교문서를 2011년 8월 31일과 9월 1일 사이 모조리 사이트에 올리면서 역사상 최고라 할 수 있는 폭로가 시작됐다.
'강릉의 위키리크스'인 <하이강릉>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하이강릉> 운영자는 강릉에서 자영업을 하는 김남권 씨다. 2005년 12월 20일 <하이강릉>을 오픈한 김남권 씨는 강릉시의원에게 메일을 보냈다. 공약 진행상황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응답이 없으면 해당 시의원 사진에 큰 글씨로 '거부'라는 마크를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하이강릉>은 어떻게 태동한 것일까?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샌지가 컴퓨터 프로그래머 일을 했던 것처럼 김남권씨는 선거 기간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선거 이면을 알게 됐다.
국회의원이나 시장 공약은 언론에서 중간 점검을 하지만 시의원은 선거가 끝나면 확인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남권씨는 시의원 공약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2년이 지난 2008년 4월 1일 <하이강릉>은 시의원들 답변을 게시하면서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2011년 8월 <하이강릉>을 통해 지역을 발칵 뒤집은 폭로가 시작됐다.
이 폭로가 시작되자 지역 국회의원 권성동과 친척 권은동은 <하이강릉>을 상대로 '언론보도금지보도가처분(2011카합)○○)을 제기했고 로펌 변호사 4명을 내세워서 손해배상(2011가합○○) 소송을 제기했다.
강릉시 또한 변호사 3명을 내세워서 손해배상(2011가합○○)소송을 제기했고 권은동은 또 다른 손해배상(2011가합○○)을 청구했다. 물론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하는 것도 포함됐다. 이들이 제기한 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피고 김남권은 같은 달 19일 이 사건 기사를 <시사IN>에서 가져와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신문 하이강릉의 '쟁점토론'란에 게재하였습니다."
즉, 김남권 씨가 <시사IN> 기사를 '펌질'했다는 것이다. 김남권 씨는 그동안 스스로 편집국장이라고 불렀다. 편집국장이 하는 일은 강릉과 관련된 사회와 정치 분야 기사들을 펌질하여 사이트 올리는 것이었다. 기사 중요도에 따라 배치하는 것도 편집국장 권한이다. 기사 출처는 <강원도민일보>, <강원일보>, <강릉MBC>, <강릉KBS>, 같은 지역 언론이었다. '
기자들은 강릉시민이 <하이강릉>을 자주 방문해 뉴스가 확대 재생산되는 효과를 봤기 때문에 저작권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방문객이 동일한 뉴스라도 하이강릉을 찾는 두 번째 이유는 기사에 달린 댓글 구경 때문이었다.
<하이강릉>은 중앙에서만 시끄러울 그런 기사를 지역으로 유통했다. 지역 토호들이 김남권 씨 <시사IN> 펌질을 문제 삼으면서 그는 언론중재위원회에 드나들게 됐다. 어딜 가든 판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김남권 씨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하이강릉>이라는 데가 뭔데... 국회의원과 시장 양쪽에서 변호사를 달아서 이렇게 해오는지... 여기 언론사가 큽니까?"
"저 혼자 합니다."
"그럼 이 언론사 유지비가 어디서 나옵니까?"
"도메인비와 웹호스팅 비용 연 5만 원입니다."
법정을 다니고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김남권 씨는 정희상 기자와 수시로 통화했다. 압박이 심한 글은 지워야 할지도 물었다. 곧 후속취재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정희상 기자는 성량이 매우 컸다. 김남권씨는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에 수염이 덮여있을 듯한 풍채를 떠올렸다.
그런데 강릉에 온 정희상 기자는 키가 작고 배가 나온 동네 아저씨 모습이었다. 정 기자는 하루를 훑고 갔다. 취재를 설렁설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술도 엄청 마셨다. 하지만 며칠 뒤 기사 내용은 작은 부분까지 정확했다.
강릉시가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이듬해인, 2012년 2월 9일 기각됐다. <강릉MBC>는 '강릉시, 시사IN·하이강릉 명예훼손 소송 패소'라는 뉴스를 내보냈다. 그리고 국회의원 권성동과 친척 권은동은 2012년 4월 18일 소취하서를 제출했다.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일까.
정희상 기자는 박원순과 경쟁하던 서울시장 후보였던 나경원에 대해 2011년 10월 20일 '나경원, 억대 피부클리닉 출입 논란' 기사를 올렸다. 월세 250만 원을 내는 박원순 후보를 향해 서민시장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던 나경원 후보가 강남 지역에서 초호화급으로 분류되는 피부 클리닉에 상시 출입했다는 사실을 취재한 것이었다.
이 기사는 포털에 톱으로 뜨면서 일파만파가 됐고 나경원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다. 나경원 후보가 무너지는 걸 보면서 권성동 의원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아무 조건 없이 소를 취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김남권 씨가 한 일은 <시사IN> 기사 '펌질'이었다. 그 펌질은 강릉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강릉시민들이 서점에나 전시되어 있는 <시사IN> 잡지를 굳이 사서 보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스마트폰이 보급되지 않은 시기라 네이버 '뉴스캐스트'에 걸린 뉴스라도 퍼지기 힘들었다. 게다가 강릉 인구 22만 명은 서울처럼 밀집한 인구가 아니라 분산된 형태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는 인터넷이 닿지 않기도 한다.
인터넷이 되더라도 문맹인구가 있어서 방송사가 가장 좋은 유통 수단이다. 공간은 정보채널만이 아니라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가 발생했다. 용산 재개발 과정에서 원래 세입자들이 받은 보상금으로는 도저히 다른 곳에서 가게를 열 수 없었다. 세입자들은 거칠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강제진압을 지휘한 김석기 경찰청장은 2012년 총선 때 경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용산 유가족들은 김석기 후보를 따라다니며 사퇴를 요구했다.
이를 바라보는 경주시민들 눈길은 차가웠다. 당선 가능성도 없는데 왜 왔느냐, 용산 문제는 용산에서 해결하라 같은 핀잔이 나오곤 했다. 서울에서 '용산참사'를 보도한 중앙언론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본 대구 <뉴스민> 천용길 기자는 재개발 문제를 보는 관점에서 서울 사람과 경주 사람이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주는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개발 경험이 거의 없는 곳이다.
땅 소유자들은 재산권을 행사하고 싶지만 건물 고도제한 등에 걸려 한계가 있다. 세입자 사정 또한 다르다. 서울보다 전세·월세 자금 부담이 적어 세입자들이 나가더라도 갈 곳이 있다. 강제철거 문제에 대해 서울 사람들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지역에서 강제철거 문제를 인권 문제로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담론으로 뭐가 있을까. 천용길 기자는 이렇게 제안했다.
"대구만 해도 세계육상 선수권대회를 위해서 동대구와 멀지 않은 감나무골에 쪽방촌과 비슷한 곳이 있는데 그곳을 안 보이도록 철거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지역에서 용산 철거 문제를 납득시키는 것보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구체적인 삶을 예로 들면 공감을 끌어내기가 더 쉽지요. 그 사람들 목소리를 담아내면서 우리 지역 문제와 용산참사가 다른 문제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또 다른 예가 있다. 2011년 하반기에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가 한국사회를 요동쳤다. 2011년 10월 YTN <이슈 앤 피플>에서 도가니 열풍으로 작가 공지영을 인터뷰했다. 사회자가 책을 쓴 계기를 묻자 공지영은 이렇게 답한다.
" 오래된 일인데 쇠고기 때문에 촛불시위가 불이 붙던 때 우연히 신문 한 귀퉁이에 재판 스케치 기사를 읽었어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이상한 사건이더군요. 취재가 시작됐지요. 대부분 자료로 사건을 접했어요. 판결문도 있고…. 정말 있을 수 없다고 느꼈고 어떻게 이런 걸 아는 분들은 가만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많았어요. (도가니라는 제목은) 이 사건을 취재했을 때 처음 느꼈던 것이 그거였어요. 어떻게 이렇게 집단적으로 이상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집단적으로 이렇게 눈감을 수 있을까? 이것은 한 명의 이성도 없이 전체가 이상한 것에 휩싸여버린 도가니 같은 상황이 아닐까 해서…."
공지영은 <도가니> 관련 각종 인터뷰에서 대부분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인터넷에는 광주·전남 지역 언론 기자들이 토호들과 결탁된 사이비라고 말하는 누리꾼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정작 광주 언론인들은 억울했다. 공지영이 본 스케치 기사를 쓴 <한겨레> 인턴 기자에게 청각장애인 관련 재판이 있다고 가보라고 권유한 것도 그들이었다. <광주드림>이나 광주 <시민의 소리> 등 언론사는 초기부터 뒤지지 않을 만큼 꾸준히 보도를 했다고 자부했다.
그들은 비리가 이렇게 불거질 동안 지역은 가만히 있었다는 시선이 답답했다. 광주KBS는 2011년 영화를 통해 국민적 관심이 쏠리자 해당 사건 관련 테이프를 찾으려고 보관소를 찾았다. 10년 전 비디오테이프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취재 분량도 상당했다. 그렇다면 당시 사건은 광주·전남 지역민에게 제대로 보도됐을까.
전라도의 낙후성은 매체 환경에서도 드러난다. 청산도, 보길도 같은 완도군 부속 도서는 난청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제주도 뉴스만 나왔다. <광주일보>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완도군 부속 도서에 사는 사람은 제주 지역뉴스 양대 산맥인 감귤 시세와 관광객 수를 확인하는 데 익숙했다.
섬은 광주·전남지역 신문도 배달하기 부담스러운 지역이다. 광주·전남지역 사람은 지역 언론이 아닌 중앙언론을 통해 인화학교 사건을 알게 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이들이 광주·전남 매체에서 이 사건을 보도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물론 우리나라도 서울과 지역을 연계하는 전국 네트워킹 체제를 제법 갖췄다. 언론계에서는 MBC문화방송이 대표적이다. 이런 네트워킹 체제를 가진 MBC는 파업 투쟁에서도 효과적이다. MBC 파업투쟁은 결국 정부를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농민회 투쟁과 비슷하다. 균형발전과 투쟁력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계속해서 살펴보자.
(다음 제6화 대구도 항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