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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형 Aug 12. 2020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연재 순서

제1화 나의 네트워킹

제2화 심규상 네트워킹

제3화 최병성 네트워킹

제4화 김주완 네트워킹

제5화 하이강릉 네트워킹 

제6화 대구도 항구다

제7화 국회의원 볼모 네트워킹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대한민국 네트워크 종결자들> 제8화 김순재 네트워킹  



김순재는 사람들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곤 했다.


" 지금 자기 집에서 나락 농사짓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논에 나락을 심고 논농사 형상을 유지하면 정부가 직불금을 줍니까? 안 줍니까? 그런데 20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논에다 농사를 지으려고 물을 대면 뭘 냈나요? 수세를 냈지요. 농지위원회에서 물세를 받아갔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잘 살지 못하지요? 왜 그렇지요? 자기 삶이 만족하고 있나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농민은 왜 잘 살지 못할까? 1970년대 농활을 왔던 대학생들은 이 문제로 토론했다. 게을러서 못 산다는 의견도 있었다. 일을 하다가 간식을 먹는 농민을 보고 밥을 많이 먹어서 못 산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구조적 모순에서 원인을 찾는 이도 있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세웠다. '최소 투자와 최대 수익'이라는 핵심전략은 당연히 노동자 희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저임금 정책은 농촌정책까지 연계됐다. 

당시 정부가 내건 농촌정책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증산'이다. 농민들은 정부가 정해주는 쌀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벼 품종을 선택했다. 농약과 비료 사용량이 덩달아 많아졌지만 철저하게 자부담이었다.


두 번째는 저곡가 정책이다. 노동자 임금을 높이기보다 쌀 가격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묶어 사회적 불만을 누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증산정책과 저곡가 정책은 농사를 지을수록 생활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1961년 박정희 정부는 농업협동조합법을 만든다. 지역별로 농민 조합원이 공동 대응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자치조직이 생긴다. 바로 농협이다. 각 지역에서 가장 큰 조직으로, 농협은 지역 네트워크로 따지면 최대 규모 민족은행이다.

하지만, 조직적인 네트워크로 농촌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선 것은 바로 농민회다. 1988년에 전국농민회가 조직됐다. 그즈음 대학을 마치고 고향인 경남 창원 동읍으로 돌아온 이가 있었다. 바로 김순재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보며 '대학 졸업해서 왜 여기 와 있지?'라고 생각했다. 



김순재는 초창기 농민회에 가입하여 수세 징수 폐지 운동을 벌였다. 2000년 초, 쌀값 보장을 촉구하며 나락 적재 투쟁을 벌였다. 김순재는 창원농민회 사무국장에 이어 경남도연맹 사무처장을 맡았다. 사무처장은 살림을 책임지고 각 조직 사이 연대를 만들어내는 자리다.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국회의원 선산을 파분다고 협박해도 결국 한-칠레 FTA는 2004년 2월 16일, 국회 비준을 받는다. 농민들은 농민 출신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없는 현실에서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절감했다.  


이는 농민들의 '정치세력화'로 나타났다. 농민회 출신들이 도전장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2004년 17대 총선에서 강기갑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강기갑과 함께 활동했던 김순재는 2010년 2월 농협 창원 동읍 조합장에 당선됐다. 지역 조합장 선거에 도전하여 실질적 모범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명도가 높지 않았다. 게다가 보수적인 동네에서 민주노동당 간판을 달고 현직 조합장을 이기는 게 과연 될지 의문이었다. 





지역 헤게모니가 공고한 지역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킹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필요로 했다. 주변에서 김순재 선거운동을 돕겠다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선거운동 중반이 되자 힘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렇게 김순재가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서 상대방은 금품살포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김순재는 이런 불상사를 막으려고 한 가지 묘안을 낸다. 평소에 친하게 지낸 형들에게 농협으로 가서 수천만 원 대출 신청을 하도록 했다. 농협 직원이 물었다.


" 왜 이리 많이 대출하십니까?"
"순재가 어디 쓸 건지 모르지만 빌려달라네."


동네에서는 '김순재가 총알을 수억 준비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김순재는 상대가 돈을 쓰면 자신은 더 많이 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게다가 자원봉사자들이 금품살포를 막으려고 '길목 감시조'가 됐다. 선거 나흘 전부터 현직 조합장 선거운동원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차를 대놓고 지켜보고 따라다녔다. 선거에서 표심을 잡는 방법 중 하나인 금품 살포 행위는 포착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인물 선거'로 이어졌다.



결국 김순재는 민주노동당 간판을 걸고 8표 차이로 2010년 창원 동읍 농협 조합장으로 당선됐다.






동읍 농민들 생활에는 당장 변화가 찾아왔다. 벼와 감을 생산하는 농가들이 한층 편해졌다는 게 공통된 여론이었다.  


벼농사에 기본이 되는 모판 재배와 농약 치기는 농협에 신청만 하면 해결됐다. 벌레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감나무를 코팅하는 재료인 유황합제 제조 또한 농협이 책임졌다. 그간 유황합제 제조는 개인이 석회와 유황을 넣고 끓이다가 조금이라도 몸에 튀면 흉터가 생기는 등 갖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 같은 정책은 농민에게 호응을 얻었다. 창원 동읍 변화는 지역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같은 생활권인 대산면과 북면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동읍과 자기 지역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지역에서 김순재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하지만, 김순재는 조합장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2016년, '농민대통령'이라 불리는 농협중앙회 회장 선거에 도전한다. 현 상황에서 농협중앙회 개혁 없이는 지역 농협 변화에는 한계가 있고, 더 나아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농업협동조합 구조를 살펴보자.

조합원들이 출자하여 각 지역 농협을 세웠다. 그런데 각 지역 농협들이 서울에 있는 정부를 상대하기가 어렵기에, 각 지역농협이 출자하여 자회사인 농협중앙회를 세웠다. 즉, 농협중앙회는 지역농협을 돕고자 만들어진 자회사이며, 2선 조직이다.

그런데 지금 지역 풍경은 2선 조직이 장사하겠다고 1선 조직 구역을 침해한다. 한 길목에 농협은행(중앙)과 각 지역농협이 마주 보고 영업하는 것이다. 

 


하지만, 힘이 한 곳으로 집중되면 그것은 선순환 구조 형태를 띠지 못한다. 힘을 가진 쪽이 싹쓸이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점포수에서는 지역 농협 수가 앞선다.

물론, 지역농협과 농협중앙회 관계도 예전과는 많이 변했다고 다들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역방송국보다는 서울방송국을 선호하는 것처럼, 농협도 '이왕이면 농협중앙회가 더 좋겠지'라며 쏠려버리면 지역은 없어진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2016년 1월 12일 농협중앙회장 선거가 다시 간선제 방식으로 치러졌다. 이날 참석한 농협중앙회 대의원과 농협중앙회장 등 선거인 289명의 표 중 김순재는 '5표'를 받았다. 김순재가 도전할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김순재가 과연 바꿀 수 있느냐는 의문을 표했다. 

강기갑은 첫 발을 내딛지 않으면 두 번째, 세 번째를 내디딜 수 없다고 말했다. 비가 많이 올 때 가만 놔두면 빗물이 사방으로 흩어지지만 고랑만 살살 긁어주면 그 방향으로 빗물이 흘러가는 원리를 설명했다. 그렇게 빗장만 열어주면 거대한 물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김순재 도전 역시 거대한 물길의 빗장을 여는 첫 발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우리 역사에도 거대한 물결이 있었다. 학자들은 우리 역사에는 가장 위대한 저항운동이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일제강점기 좌익운동이다.  


(다음 제9화. 홍순한 네트워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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