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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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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스트로치 <세례자 요한의 설교>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난 화가 '베르나르도 스트로치(Bernardo Strozzi, 1581 ~ 1644)'는,  중세의 가톨릭 수도회인,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수사였습니다(1597∼1631), 수사 출신의 화가인 거죠.

 '카푸친'이란 이름은 왠지 친숙하잖아요.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카푸치노'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16세기,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설립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며 반기를 든 몇몇 수도사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거품이 올라간 커피에 '카푸치노'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카푸친 수도사들이 입은 수도복의 색깔과 닮아서란 이유도 있고, 후드를 입은 모습이 닮아서란 이유도 있고,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답니다.

 아무튼,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엄격한 쇄신을 요구하다 보니, 개인 소유를 일절 허용하지 않으며, 최대한 검소하고 금욕적인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베르나르도 스트로치'의 그림은 수도회에서 보기에, 세속적인 느낌이 강했나 봐요.


 '스트로치'는 1620년경부터 제노바에 머물고 있던,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대표 화가이자 당시로선 정말 드문 여성화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통해 '카라바조'의 작품을 익히게 됩니다. '젠틸레스키'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았거든요 (카라바조 역시 성화를 많이 그렸기에, 곧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카라바조'의 그림을 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굉장히 파격적인 느낌을 안겨주죠. 마치 그로테스크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스트로치'는 '루벤스'의 관능적이면서도 생생함을 전해주는 색감, 또 '반 다이크'의 시선강탈 화려한 색감에도 영향을 받았는데요,


 이러다 보니, '작은형제회'에선 '스트로치'의 화풍을 인정하기 힘들었나 봅니다. 좀 더 교회 규범에 맞게 그리라고 요구했지만, '스트로치'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심지어 감옥에 갇히게 된답니다.

 결국, '스트로치'는 제노바를 떠나 베네치아로 향했고, 그곳에서 풍부한 색채,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전하는 화가로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죠. 그래서, 북이탈리아에서 바로크 화가의 일인자가 되어요.

 

 오늘 눈길을 끈 그림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스트로치'가 1643년에서 44년에 그렸고,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 있습니다. 그의 생의 끝자락에 탄생된 작품이에요

 바로, 요한복음 1장 19절에서 28절이, 이 그림의 배경이 됩니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요한 1,19-28)



 뭔가 의심쩍어하며, 궁금한 채 찾아온 사제들, 레위인들에게, 그림 오른쪽의 세례자 요한은 열렬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왼쪽의 어떤 종교지도자는 팔을 허리에 올려놓고, 굉장히 못마땅한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빨간 모자를 쓴 나이 지긋한 분도 세레자 요한의 열렬한 설명에 맞서, 자신의 의견을 전하려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강하게 얘기하는 중입니다. 치열하게 이야기가 오고 가는 현장임이 느껴져요. 그 와중에 한 소년은 그림 가운데 아래에서 세례자 요한 쪽을 올려다보며,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듯합니다. 또 세례자 요한 곁에 있는 한 청년은 세례자 요한을 바라보며 열심히 얘기를 듣고 있죠.


 마태오복음에, 세례자 요한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광야에서 거칠게 살아온 그가 세례 운동을 펼치자, 많은 율법학자들, 메시아를 기다려온 사람들은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그리스도'인지, 주님이 보내주신 '그 예언자'인지 궁금해서 물어보기 위해 찾아옵니다. 하지만, 본인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일뿐이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보여줄 파격적인 변화에 앞서, 그분을 소개하고 미리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림 속에서 손에 든 끈에 적힌 'Ecce Agnus Dei'라는 라틴어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뜻이에요. 즉. 세례자 요한은, 제발 제발 메시아가 올 것이니,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시니, 내 말 좀 듣고 그분에게 가라고 인도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했을 때, 누구는 반박하고, 누구는 귀 기울이고 다 다른 반응을 보인 거겠죠


 아마 '스트로치'가 수도회 안에서 파격적인 화풍을 보였을 때, 그걸 인정해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반대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는 묵묵히 자신의 소리를 냈고, 또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었습니다.

 우리 사는 모습도 마찬가지죠.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내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내 말에 경청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 보면,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사람이 올바른 선택을 하며 걸어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건 귀가 얇은 것과 다릅니다. 귀가 얇아서 금방 내 의견을 뒤집는게 아니라, 여러 의견을 듣고 내 의견의 오류는 없는지 돌아보며,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며 나아가는 거죠. 내 고집을 우선으로 내세우고, 내 의견을 내세우느라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린 아이가 낸 의견 안에도 소중한 보석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걸 놓치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진정 능력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의견대로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의견을 다 잘 듣고 그걸 종합해서 이끌어 가는 사람이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꽤 고위층이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죠. 높은 사람일수록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여러가지 상황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귀 기울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회생활을 좀 해 본 분들은 다 뼈저리게 느낄 거예요.


 그런데, 예전에, 저희 요가 선생님이 해주신 말인데,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은, 나이 들어서 청력이 약해져 갈 때 남들보다 일찍 귀가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신체는 마음 따라가니까요. 일찍부터 귀를 막아버렸으니 몸이 알아서, '아, 잘 안 듣는 사람이구나' 이러며, 그렇게 만든다나 어쩐다나요.....


 점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세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듯이, 우리 조금 더 세상에 귀를 열고 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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