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기회, 행운, 책
다들 알고 있는 기회에 대한 유명한 명언이 있다.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말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한 말을 우리식으로 변형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말에는 세네카가 원래 한 말에서 빠진 단어가 있다. 바로 <행운>이다. 준비하면 기회를 당연히 얻게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준비를 하면 기회는 반드시 뒤따르게 된다."
세네카가 한 말의 원문은 이렇다.
Fortuna est quae fit cum praeparatio in occasionem incidit.
Luck is what happens when preparation meets opportunity.
- Seneca
이 말은 이런 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냉정한 시각이 반영되면
"기회는 딱 준비한 만큼만 얻을 수 있다."
말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곁가지에 꽂히면
"기회를 잡으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
나 빼고 남들만 기회를 잡는 것 같아 배알이 꼴리면
"아무리 준비해도 기회를 못 잡으면 행운 따위는 없다."
세네카가 한 말에서 중심이 되는 단어는 <준비>라고 생각한다. 그는 <준비>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서 이런 말을 했으리라. 맞다. 준비는 어렵고, 기회를 잡는 것은 더 어렵다. 죽을 둥 살 둥 처절하게 준비해도 온 우주가 에너지를 모아 주어야 겨우 기회가 찾아온다.
그런데 나는 세네카의 말에서 이 <행운>이라는 단어는 빼도 된다고 본다. 우리의 삶 자체가 <준비>의 연속이고,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 기회가 제공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 삶이 행운이 아닌 것,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10년 전부터 거의 1년에 책을 한 권씩 냈다. 처음에는 다른 출판사에 원고 투고로 시작했다가 그냥 내가 출판사를 차렸다. 첫 2권을 빼고 9권은 모두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간했다.
9권의 펀딩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혼자 생각해 보았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준비했을 때
남들보다 내가 더 잘할 줄 하는 것을 준비했을 때
그 시점에 사람들이 관심을 둔 것을 딱 준비했을 때
쓸모가 없어 보였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때
정말 운이 좋아서
3권의 펀딩이 무산됐던 이유를 따져 보았다.
남들이 한 것을 비슷하게 흉내 냈을 때
예전에 내가 했던 것을 비슷하게 흉내 냈을 때
내가 좋아하니, 남들도 열광해 줄 것으로 과대평가했을 때
이미 철 지난 것을 나만 몰랐을 때
이번 책 《고딕 픽션, 오싹하고 기괴한 고양이》는 맨 처음 모호한 아이디어에서 책의 형태를 다 갖추기까지 한 2년 걸렸다. 그중 석 달은 디자인하고 번역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체질 문제로 집에 선풍기만 두고 살아서 정말로 땀을 줄줄 흘렸다.
준비를 철저히 했고, 이제 우주의 기운만 모으면 된다.
펀딩의 성공 여부는 펀딩 공개 예정을 하는 동안 대충 감이 오고, 펀딩이 시작되고 초반 1주일 사이에 사실 판가름이 난다. 이번 책은 성공할 수 있을까? 종이책으로 만들고 싶은 내 간절한 소망이 사람들을 움직일 만큼 강렬하게 전달될까?
작년 초에 <인상파 미술관, 매혹적인 인상파 그림과 화가를 담은 화집> 펀딩이 무산되고 여러 생각을 했었다.
때를 기다린다. <준비>했던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제 쓸모를 찾더라.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여겼지만 내가 보지 못한 어떤 허점이 있었다.
그냥 <준비>한 것을 미련 없이 버리자.
나는 때를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허점>을 찾아도 보고, 다른 식으로 가공도 해보면서.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준비>를 하기로 했다. 뭐 하나라도 될 때까지 <준비>를 하고 또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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