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다니다 보면, 회사를 가려고 탄 지하철 혹은 버스 안에서 망상할 때가 있다. 지난번 휴가를 복기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아이돌 생각을 하기도 하고 지금 다니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나는 종종 글을 쓰는 상상을 한다. 무슨 글을 쓰는지는 모르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를 내리고 토스트 위에 크림치즈와 아보카도를 올려 먹는,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브이로그 같은 삶이 만원 지하철 안에서 떠오른다. 명확한 직업은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어쨌든 망상 속에서 중요한 건 출퇴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집이나 카페에서 노트북을 가지고 일을 하는 모습이다. 재택근무, 혹은 프리랜서? 괄호 열고 능력 있어서 돈 걱정 없는 괄호 닫고.
사실은 그저 여유롭게 지내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것일 뿐이었고, 이게 현실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지난 월요일, 이제 막 이직 3주차. 생소한 곳에서 생소한 일을 하며 발버둥 치는 나에게 메일이 왔다.
직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한다. 대부분 좋아하는 눈치이다. 옆자리의 시크한 대리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한다. 평소와 답지 않은 모습이 귀엽고 주변에서 좋아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웃고 말았다. 아니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웃어도 티 안 날 줄 알았는데 하필이면 실장님께 딱 걸렸다.
"신과장님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눈웃음은 마스크가 안 가려주는구나. 젠장.
당장 다음날부터 재택근무라서 회사 노트북을 집으로 가져가겠다고 말하고 VPN이라는 걸 처음 깔아보았다. 지원팀에서 설치방법을 PDF로 줬는데 혼자서 하니까 잘 안 돼서 뒷자리 직원분께 문의하고, 친절한 직원분은 이제 막 이직한 과장에게 도움을 주려다 제대로 안 돼서 파트장 두 명을 내 자리로 불러왔다. 와. 민폐. 나 지금 파일 설치 하나 제대로 못 해서 3명이 내 자리로 왔어.
낯뜨거웠지만 꿋꿋하게 도움을 받아 VPN을 설치했다.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정말 가벼웠다.
물론 재택근무에도 규칙이 있다.
1. 근무시간에는 자택에 있을 것.
자택의 기준은 현 거주지이다.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는 거라 카페나, 부모님 댁 등 이동해서 일을 하면 안 된다. 근무시간에는 반드시 현 거주지에 머무를 것.
2. 근무시간에는 메신저에 접속하고 바로 대답할 것.
3. 점심시간은 1시부터 2시로 통일한다
다 이해가 가는 규칙이다.
재택근무 첫 번째 날 아침.
원래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1시간 동안 씻고 드라이하고 화장하고 밥을 먹은 뒤, 집에서 나와 회사까지 약 1시간 반 정도 열심히 간다. 지하철과 도보로. 즉 출근을 위해 2시간 반이 소요된다. 매일매일. 하지만 이날은 7시에 일어났다. 항상 아침을 수제 요거트로 간단히 먹는데 이날은 조금 욕심을 부려서 차렸다.
브이로그에 나오는 것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평소처럼5분 만에요거트를 거의 마셔버리고 쫓기듯이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식탁에 앉아 여유롭게 아침을 먹었다. 그 후에는 책상 정리를 했다. 내 방 책상은 그저 퇴근한 후 컴퓨터 게임을 하는 곳이라 매우 너저분했는데 그런 환경에서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너저분하게 널려있던 물건들을 버리고 치우고 나름 깔끔하게 만들자 내가 아직 잠옷 바람인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집이라 그래도 일하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욕실에 들어가 세수하고 양치질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청바지나 원피스가 아닌 트레이닝복으로.
9시가 되기 10분 전. 메신저가 울린다. 출근하면 단체 메신저 방에 출근인사를 하라는 파트장님 말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팀원들이 메신저에 주르륵 나타난다. 다들 대기 중이었구나. 나도 얼른 껴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바로 업무가 시작되었다.
회의가 많지 않고 개인플레이를 하는 이 회사의 특성상 재택근무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물론 집에서는 투 모니터를 쓸 수가 없어서 불편했지만 그건 장비의 문제일 뿐이다. 재택근무를 하면 좀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어떻게든 할 건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온다.
회사도 바보는 아니라서 재택근무를 하기 전 팀원들이 매일 어떤 일을 얼마만큼 해야 하는지 정해주었다. 그 양은 출근해서 하는 양과 비슷한 수준인데 이게 서로 눈에 보이지 않으니 내가 얼마나 바쁘게 일하는지 아무도 볼 수가 없다. 업무 중 돌발 상황이 나타나 그걸 수습하느라 시간을 보냈는데 그런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하니 일이 늦어지는 이유를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일 안 하고 놀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는 없어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정신없이 일했다. 그러다 보니 오전 시간이 훅 가고 점심시간은 약간 멍한 상태로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회사에서는 점심시간이 되면 업무에서 벗어나 리셋을 하는 시간이었는데 집에 있으니 대화를 할 동료도 없고 밥을 또 어떻게 차리기도 귀찮고 애매했다. 첫날점심때 무엇을 먹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 먹었더라.
점심시간 후 다시 업무가 시작되었다. 이직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았다. 하지만 제 몫은 해야겠다 싶어서 머리 터지도록 시스템을 돌리고 전화도 돌렸다. 6시가 될 때쯤 그래도 회사에서 정해준 일의 양은 어떻게든 맞출 수 있었다. 6시가 조금 넘어서 노트북을 덮고 거실로 나가니 엄마가 안쓰러운 눈으로 본다.
"계속 책상 앞에 앉아있었어? 한번 움직이지도 않고"
엄마는 딸이 일하는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처음 보게 되었다. 일할 때는 방문을 닫고 있는데 혹시라도 방해될 까봐 절대 들어오지 않는다. 거실에서 TV 보는 걸 좋아하는 아빠도 방해가 될까 봐 안방에서 온종일 나오지 않으셨다.
저녁에는 오랜만에 세 식구가마주앉아 식사했다. 나는 회사에서 정시퇴근을 해도 집에 오면 8시가 넘기 때문에 평일에는 같이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는데 이날은 자연스럽게 내 일이 끝나면서 가족이 함께 식사했다.
매일매일 이런 일상이 반복되었다. 4일째쯤 되자 점심시간에 정신을 좀 차릴 수가 있었다. 엄마랑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집 바로 앞에 있는 카페로 뛰어가 아인슈패너를 사서 홀짝이기도 했다. 저녁에는 생전 보지 않던 드라마를 보았다. 일이 끝나고 시간이 있으니 거실에 앉아있다가 마침 하고 있던 드라마 재방송을 보았는데 너무 재밌어서 1~2화를 다 끝내버렸다. 세상에.
재택근무를 해도 여전히 바쁘다. 일할 때는 일을 열심히 하게 된다. 어쨌든 성과를 내야 하는 업무라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8시간 동안 내내 발버둥을 친다. 후에는 방전되어서 저녁을 먹고 거실에 좀 앉아있다가 매일 하던 홈트를 하고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든다.
재택근무를 하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매일 왕복 3시간을 걸려 출퇴근을 했던 시간이 세이브된다는 점. 그 시간에 좀 더 자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가족과 아침저녁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화장을 안 해도 된다는 것. 어차피 집에 있으니 아침에 세수하고 로션만 바른 뒤에 바로 일을 한다. 그래도 잠옷을 입고 일을 하는 건 영 아닌 것 같아서 몸을 옥죄지 않는 트레이닝복이나 편한 밴딩 바지에 니트를 입는다.
재택근무를 하니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업무 성과에 더 집착하게 되었다. 일의 성과라는 건 내가 단순히 열심히 한다고 해서 100% 나오는 건 아니고 또 내 업무 특성상 내가 `아` 하면 저쪽에서 `어`를 해줘야 하는데 갑자기 `APPLE` 이러면 도무지 성과가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일 안 하고 놀았다고 생각할까 봐 어떻게든 악착같이 숫자를 맞추려고 일을 한다. 재택근무를 했던 일주일 동안 근무시간에 커피 타임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그래도 이직한 신입생이라 업무가 많은 편이 아닌데도 이런데, 베테랑들은 맡은 일도 많으니 더 할 것이다. 실제로 내게 일을 가르쳐주는 시크한 대리님은 전화통화로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며 한탄했다.
또 방에서 업무를 하다 보니 일이 끝나고 한동안 방에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 머무르게 된다. 일이 끝나도 환경이 변하지 않으니 일이 끝났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방에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 앉아서 TV를 본다. (원래 집에 오면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방순이였다) 그 때문에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데 재미있더라.
서울이 아닌 경기도에 사는 사람이다 보니까 외출을 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외출을 자제하기도 하지만 회사 업무가 끝나면 강남이나 홍대에서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경기도에서 6시가 넘어서 서울로 나가자니 적잖이 부담된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는데 저녁에 한 시간을 걸려 서울에 간다고? 돌아오는 게 아니라? 반강제적으로 집순이가 되었다. 실제로 지난 5일간 커피 사러 10분 정도 카페에 간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재택근무는 한주 더 연장되었다.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서 추이를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단다. 회사가 멀다 보니 재택근무가 좋긴 하다. 지하철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거실에서 멍 때리는 것이 더 유익하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염병은 종식될 거고 모든 게 다 안정을 찾을 것이다. 나도 그럼 예전처럼 만원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출퇴근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