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초가 없는 돈키호테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by 에리카


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죽음을 목전에 두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의 삶 대부분은 성공적이지 않을 것이고, 눈부시거나 화려했던 순간도 거의 없을 것이다. 스토너의 삶처럼. 스토너는 싸우지 않았고, 밀어붙이지 않았으며, 끝내 손에 쥔 것도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삶을 실패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스토너는 매 순간 자신 안에서 열정을 끌어당기는 것들에 솔직하게 응답했다. 그 열정의 대상들은 결국 그를 배반하거나 외면했지만, 적어도 스토너는 단 한 순간도 자기 자신에게 도망치지는 않았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문학은 스토너의 첫 번째 열정이다. 농과대학에 입학한 뒤 교양 과목으로 수강한 문학 수업에서 그는 뜻밖의 전율을 느낀다. 그 이후 그는 농과대학의 커리큘럼을 벗어나 영문학도의 길을 걷는다. 이 선택은 너무도 단호해서, 나는 처음에 ‘스토너는 사실 굉장히 진취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가슴이 향하는 방향 앞에서 그는 거의 망설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부모를 배반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온전히 자각하는 것은 훨씬 나중,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다. 부모는 그가 농과대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농법으로 농사를 짓기를 바랐다. 그 기대를 알고 있었기에, 스토너는 뒤늦게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



스토너는 대학에서 두 명의 친구를 사귄다. 데이비드 매스터스와 핀치 고든이다. 핀치 고든은 공부에는 두각을 보이지 않았지만 처세술이 좋았고, 사회에 무리 없이 적응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반면 데이비드 매스터스는 머리가 뛰어나고 냉소적이었으며, 솔직함으로 타인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럼에도 스토너는 매스터스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존경했다. 그의 냉소는 허세가 아니라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 통찰은 스토너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매스터스는 짧게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그가 스토너와 고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에서 나는 처음으로 독서를 멈췄다.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기 위해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매스터스는 스토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몽상가이고 광인이야. 세상은 더 미쳤지만. 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



처음에는 이 말이 조롱처럼 들렸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이것이야말로 스토너를 가장 정확하게 꿰뚫은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매스터스가 말한 광기는 현실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계의 규칙을 끝까지 신뢰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산초가 없는 돈키호테’라는 말은, 스토너가 자신의 이상을 말려 줄 현실 감각이나 함께 조율해 줄 동료 없이 혼자 그 길을 걸어갈 것임을 예고하는 표현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우리만의’라는 말이다. 매스터스는 스토너를 혼자 지목하지 않는다. 그 역시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임을, 결국 이 사회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존재임을 스스로 포함시킨다. 그래서 이 문장은 비웃음이 아니라, 냉소적인 연대에 가깝다. 스토너의 삶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의 말처럼, 이 문장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스포일러처럼 느껴진다.



두번째 열정, 이디스


스토너는 이디스에게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그 방식은 매우 서툴고 숫기 없는 남자의 전형이라 읽는 내내 웃음이 조금 났다. 평소의 스토너를 생각하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직진이었다. 나는 그가 대차게 거절당할 것이라 짐작했지만, 의외로 두 사람의 관계는 결혼까지 순탄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결혼이 순조로웠던 것과 달리, 결혼 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이디스는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규정받으며 성장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부유한 집안의 딸로서 요구받던 태도와 역할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한 인물이었다.



나중에야 든 생각이지만, 이디스가 스토너를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결혼을 승낙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겹쳐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여성의 삶에서 다음 관문은 결혼뿐이라는 인식, 또 하나는 부모의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여기에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스토너의 태도가 더해지며, 그는 이디스에게 일종의 자기만족과 탈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순진하게도 그녀는 가난한 남자와의 결혼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남자와의 결혼 생활은 쉽지 않았다. 엄격하고 종교적인 가르침 아래 자란 이디스에게 육체적 친밀함은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불편함과 거부감에 가까웠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스토너의 태도였다. 그는 화를 내지도, 명령을 하지도 않았다. 이디스를 통제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관조했다. 어쩌면 이디스에게는 차라리 ‘아내의 덕목’을 말하며 윽박지르고 명령하는 남편이 더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이디스는 말로는 남편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몸으로는 끝내 그를 거부했다. 스토너는 계속해서 양보했고, 그녀의 히스테릭한 반응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깊이 대화하지 못한 채 서로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이디스의 적대는 분노라기보다 불안에 가까웠고, 스토너의 침묵은 존중이었지만 동시에 회피이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도, 끝내 같은 관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몸부림


스토너는 대학 교수로서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영문학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자각한다.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문학에 대한 열정은, 강의실 안에서는 좀처럼 생동감 있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배움이나 경험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아직 자신의 삶과 문학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했기 때문처럼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변화는 이디스가 모종의 이유로 집을 비운 시기에 시작된다. 스토너는 집에서 딸 그레이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평온을 경험한다. 그레이스는 그의 성격을 닮아 있었고, 스토너는 그 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애정을 누린다. 마음이 안정되자 그는 어느 순간 강의에 온전히 몰입하게 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학생들 앞에 선다. 강의는 열정적으로 변했고, 학생들의 태도 또한 달라졌다. 과제물에는 애정과 상상력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스토너는 새로운 강의 방식을 시도한다. 그때부터 그는 대학에서 단순한 교수나 연구자가 아니라, ‘교육자’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하나의 도약처럼 보인다. 퀀텀 점프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스토너는 교육자로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성공한다. 그의 내면은 이전보다 단단해지고, 삶의 중심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아내 이디스였다.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이디스는 남편을 보자마자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직감한다. 무엇이 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른 상태라는 사실만은 또렷했다. 그것은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 없이도 완결된 세계를 가진 사람의 태도였다. 이디스가 느낀 것은 분노라기보다 위기감에 가까웠다.



이디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의 삶에 남아 있던 아버지의 흔적을 모두 불태운다. 그 장면을 보며 그녀 역시 어린 시절을 다른 방식으로 힘겹게 통과해왔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디스가 알고 있던 변화의 방식은 외형에 머물러 있었다. 머리 모양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는 것.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편은 이미 내면적으로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그의 안에는 더 이상 이디스를 향한 열정이 자리하지 않았다. 대신 문학과 교육을 향한 열정이 공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제서야 이디스는 자신 역시 변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피아노를 치고, 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고,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파티를 연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는 그녀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시선은 딸 그레이스에게로 향한다. 그레이스가 스토너에게 깊은 안정을 주는 존재이며, 그가 사랑을 쏟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이디스는 알고 있었다. 이디스가 ‘어머니’라는 역할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남편의 세계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통로를 붙잡으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결핍을 정의로 포장한 사람, 로맥스



로맥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의 거침없고 신랄한 어조를 들으며 스토너는 옛 친구 매스터스를 떠올린다. 로맥스는 신체적 장애를 지녔지만, 스토너의 눈에는 지적이고 매력적인 인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스토너가 그의 제자 워커에게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평가했을 때, 로맥스는 그것을 제자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공격처럼 받아들인다. 이 과잉 반응은 오히려 이디스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워커 사건에서 로맥스는 장애를 이유로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워커의 장애는 지적 능력이나 학문적 판단과는 무관하다. 스토너가 문제 삼은 것은 신체 조건이 아니라, 교육을 맡길 수 있는 최소한의 역량이었다. 로맥스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장애’라는 언어를 전면에 내세워 논의를 윤리의 문제로 바꾼다. 그 순간 기준은 잔인한 원칙이 되고, 기준을 지키려 한 스토너는 냉혹한 사람이 된다.



이 지점에서 로맥스의 모순이 드러난다. 그는 장애를 가졌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했고, 자신의 성취가 동정의 결과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워커를 통해 다시 한 번 ‘장애’라는 언어를 호출한다. 그것은 워커를 위한 연대라기보다, 자신의 삶이 언제든 같은 이유로 부정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막기 위한 방어에 가깝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토너는 로맥스를 장애로 바라보지 않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는 로맥스를 학문적 동료로 대했고, 그의 성취를 진심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바로 그 태도가 로맥스를 불안하게 만든다. 스토너의 시선은 연민도, 배려도 아닌 ‘기준 위의 인정’이었기 때문이다. 로맥스에게 그것은 가장 위험한 평가였다. 만약 기준이 끝까지 유지된다면, 자신의 삶 역시 언제든 그 기준 위에 다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맥스는 스토너를 경계한다. 그는 기준을 지키는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기준 그 자체를 무너뜨린다. 자신의 결핍을 직면하는 대신, 그것을 정의의 언어로 감싸며 권력으로 전환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의는 따뜻해 보이지만,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결과의 부담은 모두 교육 현장과 스토너의 삶에 남는다.



로맥스는 악인이라기보다, 실패한 자기 이해의 사례에 가깝다. 그는 끝내 자신의 결핍을 자신의 문제로 감당하지 못하고, 그것을 보편적 윤리의 문제로 확장해버린다. 그 순간 정의는 보호가 아니라 무기가 되고, 이해는 연대가 아니라 배제가 된다.



사랑보다 더 큰 의미, ‘나 자신의 모습’

스토너는 자신의 제자이자 대학 강사로 일하던 캐서린과 진실로 사랑에 빠진다. 젊은 시절 이디스에게 느꼈던 감정이 외형에 대한 호감이었다면, 캐서린과의 관계는 영혼을 나누는 사랑에 가까웠다. 두 사람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한다. 떳떳하지 못한 관계였기에 조심하려 애썼지만, 아마 소용은 없었을 것이다. 스토너처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던 사람이 사랑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겪게 되면, 그 흔적은 어딘가에 남기 마련이니까.



이디스는 이 사실을 알고도 오히려 안도했던 것처럼 보인다. 남편이 결국은 평범한 중년 남자라는 사실을 확인받은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초기부터 이 관계를 알고 있었음에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스토너가 자신을 버리고, 교단을 버리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디스는 스토너보다 스토너를 더 정확히 읽는다. 남편을 끝내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떤 선택을 할 사람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부부라는 관계의 한 단면처럼 느껴진다.



로맥스는 이 관계를 알게 되자, 교활하게도 스토너가 아닌 캐서린을 위협한다. 스토너는 종신 교수였고, 그의 자리는 흔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맥스가 캐서린을 겨냥한 것은 단순한 도덕적 분노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스토너를 향한 오래된 경계와 집착의 연장선에 가깝다. 스토너는 로맥스의 장애를 바라보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이었고, 바로 그 점이 로맥스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결핍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정의나 명분 없이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 로맥스에게 스토너는 끝내 넘어서지 못한 거울 같은 존재였다.



스토너는 캐서린과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자신과 캐서린이 나눈 모든 시간과 사랑이 의미를 잃어버릴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교단에 설 수 없다면, 서로가 알고 사랑했던 모습 역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스토너는 자신의 파괴를 확신했기에, 일생의 사랑을 스스로 떠나보낸다.



봐! 나는 살아있어


일생일대의 사랑을 잃었다. 가정에서는 아내가 딸에게 집착하며 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대학에서는 로맥스의 방해로 승진의 길이 완전히 막혔다. 그럼에도 스토너는 자신의 길을 간다. 그는 계속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로맥스에게 한 방을 먹이며 원하던 강의를 얻어내기도 한다. 대학 안에서 그는 ‘헌신적인 교육자’로 불린다. 부러움과 경멸이 반씩 섞인 호칭이다. 이는 그가 교육자로서는 훌륭하지만, 대학 건물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눈이 멀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토너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빈농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교수가 되기 전, 농부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아왔던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삶의 감각이 늘 그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농부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계를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며 활량한 얼굴로 삶을 견뎌왔다. 스토너 역시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예순을 넘긴 어느 날, 스토너는 캐서린이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책은 캐서린의 지성만큼이나 훌륭한 책이었다. 그는 글 속에서 캐서린의 모습을 본다. 너무도 생생하게. 그 순간,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상실감이 다시 한 번 그를 덮친다. 이 대목은 나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남았다.



발췌문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 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있어.



스토너는 진취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열정이 향하는 대상 앞에서는 언제나 충실했다. 그는 자신이 열정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때, 가장 온전히 살아 있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니?

정년 퇴임을 앞둔 시점에서 그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미 병은 너무 깊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집에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는 우정을 원했지만, 한 사람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갔고 다른 한 사람은 산 자들의 세계로 떠났다. 그는 결혼을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었지만, 방법을 알지 못해 그 열정은 식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고 실제로 사랑했지만, 결국 그 사랑을 포기했다. 그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지만, 거의 평생을 무심한 교사로 살아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실함과 순수함을 꿈꾸었지만, 타협하는 법을 배웠고 밀려오는 인생의 파도 앞에서 종종 정신을 잃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니?’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묻는다. 그리고 자신이 쓴 첫 책이자 유일한 책의 표지를 쓰다듬다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


삶에는 거스를 수 없는 파도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그 파도에 휩쓸린다. 스토너는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눈에 띄게 저항하거나 몸부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스토너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의 피에 흐르는 선조들의 방식이기도 했다. 자신의 땅을 지키며, 무표정하고 단단하게 살아내는 방식. 농부의 방식이다.



스토너는 농부처럼 대학에 뿌리내린 채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승진하지 못해도, 인정받지 못해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열정이 향하는 대상을 알아보는 감각만은 끝까지 잃지 않는다. 문학이 그랬고, 교육이 그랬고, 사랑이 그랬다. 그는 열정의 대상을 찾아내는 행운을 가졌고, 그 대상 앞에서는 언제나 전력을 다해 다가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스토너는 결국, 산초 없는 돈키호테다. 말려줄 사람도, 현실로 끌어당겨 줄 조력자도 없이, 혼자서 자기만의 방향으로 걷는 사람.



그래서 그의 삶은 초라해 보인다. 성과도 적고, 성공이라 부를 만한 장면도 드물다. 싸우지 않았고, 밀어붙이지 않았고, 끝내 손에 쥔 것도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지는 않았다. 열정이 향하는 방향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 대가가 상실일지라도 끝까지 받아들였다.



과연 우리는 스토너를 실패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살면서 얼마만큼의 열정을 타인에게, 일에게, 혹은 어떤 가치에 건네본 적이 있을까. 안전한 선택 뒤에 숨어 “현실적”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애초에 열정이 향하던 방향을 외면해온 것은 아닐까.



스토너의 삶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서가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속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어떤 삶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