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나를 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꺼내준 책들

스토너 · 프로젝트 헤일메리 · 시간과 물에 대하여

by 에리카




조용한 인생, 소시민 영웅, 그리고 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각에 대해




올해 나는 세상과 아주 조금 떨어져 있다는 느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시간이 생겼지만, 그 시간은 나를 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안쪽으로만 밀어 넣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감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중에 이 시간을 돌아봤을 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도 함께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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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것들 대신, 내 안에 남는 감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난 세 권의 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를 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꺼내주었다.



먼저, 가장 조용하게 나를 붙잡은 책은 『스토너』였다.





조용히 살아낸 평범한 인생, 『스토너』




『스토너』는 읽는 내내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소설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들었다. 윌리엄 스토너의 삶에는 극적인 성공도, 눈에 띄는 영광도 없다. 그는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버티듯 살아가고, 사랑하고, 좌절하고, 다시 하루를 이어간다. 그런데 그 조용한 반복 속에서 이상하게도 시선을 떼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한 사람의 인생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선택과 감정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이 소설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보여준다.






스토너의 삶을 사회가 흔히 말하는 기준으로 놓고 보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부르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는 출세하지도 못했고, 존경받는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으며, 관계에서도 번번이 미끄러진다. 하지만 그를 따라 읽다 보면, 이 인생을 단순히 실패라고 말해도 되는지 자꾸 망설이게 된다. 스토너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것을 쉽게 버리지 않았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삶이 그에게 친절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끝까지 자기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그 선택들이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아무 선택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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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스토너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평범하고, 조심스럽고, 때로는 무력하다. 커다란 결단 대신 작은 선택들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어느 순간 이미 되돌리기 어려운 삶 한가운데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그 모습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재능이나 눈부신 성취 없이, 그저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는 삶. 『스토너』를 읽으며 나는 그런 삶이 반드시 실패로만 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스토너의 인생은 화려하게 빛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도 않는다. 그는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 혹은 세상에 남긴 미세한 흔적으로 존재한다. 『스토너』는 나에게 조용히 살아낸 인생도 충분히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기준을 남겼다. 그리고 그 기준은, 이후에 읽게 된 책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소시민 영웅과 상상력의 책임, 『프로젝트 헤일메리』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읽는 경험부터 달랐다. 잠자기 전에 조금만 읽어야지 하고 책을 펼쳤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오히려 잠이 달아났다. 이야기는 점점 속도를 붙였고, 나는 몇 번이나 책을 덮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해야 했다. 이러다 밤을 새우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소설은 이야기 자체의 힘이 강했다. 오랜만에 ‘재미있어서 멈출 수 없는 독서’를 하고 있다는 감각이 분명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전율을 느꼈던 순간은 그레이스가 외계 생명체 로키와 처음 만나는 장면이었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해왔다. 이 우주는 너무나 광활해서, 분명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광활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내가 막연하게 품고 있던 이 상상을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로 끌어내린다. 상상이 현실처럼 느껴지는 순간, 나는 이 소설이 단순한 공상과학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상상력은 막연한 낭만이 아니라, 철저한 지식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도 함께 느꼈다. 앤디 위어가 과학과 우주에 대해 쌓아온 지식이 있었기에, 이런 상상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스 포 주 의)


(스 포 주 의)


(스 포 주 의)


(스 포 주 의)


(스 포 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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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더 인상 깊었던 이유는,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인물이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레이스는 평범한 너드이자 소시민에 가깝다. 그는 자발적으로 영웅이 되기를 선택한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에바 스트랫의 결정으로, 강제로 우주로 떠밀려 보내진 사람이다. 스트랫은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서 독재자처럼 비정한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 덕분에 지구는 살아남을 가능성을 얻게 된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영화 <돈 룩 업>을 떠올렸다. 한쪽이 인간 사회의 어리석음과 무능을 날카롭게 드러낸다면,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위기 앞에서 단합하는 세계와 정의로운 선택을 보여준다. 이게 비현실적인 이야기일까, 아니면 우리가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현실일까, 잠시 생각하게 됐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그레이스가 로키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떠났지만, 결국 로키와 로키의 별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영웅적이지만, 동시에 아주 인간적이다. 그는 위대한 사명을 타고난 인물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선택을 해야 했던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더 믿을 수 있었다. 특별해서 영웅이 된 사람이 아니라, 평범했기 때문에 끝까지 선택해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였으니까. 요즘 나는 악의 속성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인간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이야기들보다, 이런 소시민 영웅의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간다. 세상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선택한다는 이야기가 더 오래 남는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나에게, 영웅이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을 미루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남겼다. 그리고 그 생각은, 개인의 선택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길게 이어져 있다, 『시간과 물에 대하여』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끝까지 읽은 환경책이었다. 그런데 읽는 동안 ‘환경 문제를 공부한다’는 느낌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오래된 이야기를 듣는 기분에 더 가까웠다. 아이슬란드의 빙하와 바다, 바람과 땅에 대한 묘사는 탁월했고, 나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는데도 이미 본 적이 있는 풍경처럼 느껴졌다.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라 문장으로 자연을 만난다는 감각이 오랜만이었다. 자연에 대한 경고보다, 경탄이 먼저 오는 책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 책이 나를 가장 오래 붙잡았던 지점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흔히 현재만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가치관과 습관, 취향과 태도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할머니의 시절에서 시작되어 부모를 거쳐 나에게까지 이어진 것들이다. 내가 엄마에게서 배운 요리법이나,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처럼 사소해 보이는 것들조차 모두 시간을 건너왔다. 그리고 이 흐름은 내가 사라진 뒤에도 멈추지 않는다. 내가 남긴 어떤 선택과 태도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다시 이어질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생애 안에서만 시작하고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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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슬란드의 빙하가 녹아 흘러간 물은 그 땅에서만 머물지 않고, 대륙을 건너 다른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한 지역의 변화가 결국은 모두의 문제가 되는 구조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말한다. 내가 죽은 이후의 일이니까, 내가 사는 곳에는 바다가 없으니까, 당장 내 삶과는 상관없다고. 『시간과 물에 대하여』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짧은 시야에서 나온 것인지 조용히 보여준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나는, 개인의 삶과 선택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믿고 싶지 않아 외면해왔던 연결의 감각을, 이 책은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되돌려준다.







돌이켜보면 2025년의 나는, 이 책들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배운 것 같았다.



『스토너』는 조용히 자기 자리를 버티며 살아가는 삶에도 분명한 의미가 있다는 기준을 남겼고,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평범한 사람의 선택이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시간과 물에 대하여』는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길게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요즘처럼 조용히 자기 자리를 버티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토너』가 오래 남을지도 모른다. 냉소적인 이야기들에 조금 지쳐 있다면,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소시민 영웅이 의외의 위로가 될 수 있다. 환경 이야기가 늘 남의 일처럼 느껴졌던 사람일수록, 『시간과 물에 대하여』는 개인의 삶과 세계가 얼마나 깊게 연결돼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 세 권의 책은 내 인생을 바꿔놓지는 않았다. 대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조금 넓혀주었다.




2025년의 나는 그렇게, 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아주 조금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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