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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Aug 07. 2019

쿨 앤 시크, 차가운 도시의 초딩

소래포구의 낭만

 소래 포구에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초딩이 있다.

 


 대학생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휴학하고 돈을 벌어야 했던 나는 벼룩시장을 보다가 보습학원 풀타임 강사 자리를 낚아챘다. 조금 시간을 두고 잘 찾아보면 집 근처도 있었을 텐데, 성격 급하고 뭐든지 빨리빨리 하는 나는 처음 본 벼룩시장에서 한 보습학원 구인광고를 보았고 바로 소래 포구로 가서 면접을 보았다. 나에게 소래 포구란 사람이 바글바글한 수산 시장일 뿐이었는데 시장을 조금만 벗어나면 초등학교와 아파트촌이 있었다. 당시는 개발붐이 일어 새로운 아파트들이 공사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근무하게 된 학원은 소래 포구 토박이들이 사는 아파트촌에 있었다.


 이곳에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초딩이 있었다. 이름은 X지웅, 나이는 12세, 머리에 살짝 웨이브를 내서 멋을 부리고 가끔은 가죽 재킷을 입고 와서 어머니의 패션 센스를 뽐내던 그 아이. 내가 담임을 맡았던 5A반에서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무리에 어울리지 못했던 아이. 반면에 쿨하고 시크해서 친한 아이가 없어도 학원 잘만 다니던 마이웨이 스타일. 내가 유일하게 담임을 맡았던 5A반 아이들에게 특별히 애정이 컸지만, 지웅이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반 분위기를 주도하던 무리에 동떨어져 있어서 더 신경을 썼던 것은 아니다. 그 아이는 또래답지 않은 반골 기질이 있었다. 난 자연스레 지웅이의 시크함과 차도남 스타일에 빠져들었다.


 한번은 학습장에서 약수와 배수를 구하는 문제를 채점할 때였다. 10문제 정도인데 숫자가 크면 클수록 답이 많아진다. 예를 들어 60의 약수를 구하라는 문제는 답이 12개이다. 그런 문제들이 연이어 있는데 숫자 하나하나를 봐야 하기 때문에 눈이 바쁘게 돌아간다. 몇 번 신중히 채점을 하던 나는 결국 후다닥 대충 훑고 무작정 동그라미를 그렸다. (다행히 5A는 공부를 잘 하는 반이었다) 마침 지웅이 순서가 되고 난 숫자를 대충 보며 빠르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자 지웅이가 말했다.


 “선생님, 보시긴 하는 거예요?”


 아, 상황파악을 하는 이 냉철함과 시크한 말투. 이미 지웅에게 여러 번 찝쩍거려서 학원에 소문이 자자했던 난 역시 시크하게 받아치려고 했다.


 “당연하지. 쌤은 동체 시력이야”

 “어린이한테 뻥치지 마세요”


 입술을 비틀며 뒤돌아 자리로 가는 지웅이의 차가운 뒷모습을 보며 난 부르르 몸서리를 쳤던 것 같다. 너무 귀여워서. 가끔은 학원에 일찍 온 지웅이를 붙잡고 진지하게 제안을 했다.


 “지웅아, 커서 선생님이랑 결혼하자”

 “선생님 나이 너무 많아요”

 “야 너랑 나랑 10살 차이도 안 나”

 “그게 안 많은 거에요?”


 아앗 팩폭. 매번 이렇게 차였지만 나의 주접은 날마다 계속됐다.


 “지웅아 오늘 왜 이렇게 멋있게 입고 왔어”

 “(대답안함)”

 “너무 멋있어서 선생님이랑 결혼해야겠다”

 “싫어요”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까. 지웅이 어머니가 학원에 전화를 주셨다. 나는 수업 중이라 못 받고 다른 선생님이 받았는데 지웅이가 요즘은 학원도 안 빠지고 (예전에는 가기 싫다며 말 안 하고 빼먹은 적도 있다고) 학원 가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며 감사하다는 전화였다. 그 선생님은 웃으면서 수학 선생님이 지웅이를 너무너무너무 예뻐한다고, 그래서 요즘에 학원도 안 빠지고 잘 오는 것 같다고 하셨다.


 난 지웅이가 예전에는 학원을 많이 빠지기도 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지웅이는 학원 수업 30분 전부터 와서 내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나는 그런 지웅이를 끌어안고 쓰다듬고 아이가 오늘은 학교에서 뭘 했는지 물어보며 수업 준비를 했다. 가끔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교실에 내가 없어서 문가에 서성거리던 그 뒷모습. “지웅이 왔어?” 하고 아는 척을 하면 수줍게 “네” 하고 대답하던 아이. 옆구리에 꽉 끼고 같이 창밖을 보며 조용히 구름 흘러가는 걸 보았던 그 날. 지금 생각하면 소래 포구는 정말 낭만적인 곳이었다.




 연말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학원 교무실에서 문제지를 채점하고 있는데 지웅이가 들어왔다. 나를 부르며 들어온 아이의 손에는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들려있었다.


 “어머, 고양이 어디서 났어?”

 “길에서 혼자 울고 있길래 주웠는데요...엄마가 못 키운다고 다시 갖다 놓으래요”

 “혼났어?”

 “네”


 시무룩한 아이를 쓰다듬다가 난 충동적으로 새끼고양이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새끼 고양이는 버스를 두 번 타는 내내 내 무릎 위에서 침을 흘리면서 잤다. 그리고 난 집에 와서 우리 엄마한테 등짝스매시를 맞았다. 그리고 고양이는 14년 동안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고 지금은 노묘가 되어 글을 쓰고 있는 내 발밑에 웅크리고 자고 있다. 지웅이는 내가 데려간 고양이에 대해서 이후에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까맣게 잊었던 걸까? 나는 가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내 첫 직장을 떠올리곤 했다.


 난 딱 1년을 채우고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만두던 주간에 지웅이는 가족 휴가를 가서 마지막에 인사를 하지 못했다. 마지막 날에는 지웅이를 끌어안고 앞으로도 계속 학원 잘 다니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나중에 선생님이 데리러 올 테니 결혼하자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지웅이는 내가 그만둔다는 것도 모른 채 휴가를 갔다. 지웅이는 내가 그만둔 걸 알고 어떤 기분이었을까? 쿨한 성격대로 덤덤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우연히 지웅이를 만나게 된다면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지웅아, 선생님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아주 가끔은 널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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