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운 어른? 고집 있는 어른?
친구와 떠났던 터키 여행에서 그녀와 난 우리의 삶을 뒤바꿀만한 어떤 사실 하나를 알아냈다. 첫날 점심과 저녁을 현지 레스토랑에서 먹었는데 그다음 끼니부터 도저히 현지식이 들어가지 않았다. 현지식이라고 해서 터키 음식이 엄청 특이하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양고기 냄새가 가끔 나기는 했지만 예민한 친구도 첫날까지는 잘 먹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빵과 고기가 주가 된 식사가 빠르게 물렸다. 속이 느글느글하고 더부룩했다. 한마디로 편하지가 않았다. 특히 예민한 편인 친구의 상태가 더 심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10년 이상 관계를 맺어 온 절친이었지만 2주 동안의 장기여행은 처음이었다. 둘째 날부터 컨디션이 안 좋아지면 앞으로 열흘 넘게 남은 여행 일정은 어떡하나. 난 인터넷을 통해 한식당을 바로 찾아냈다. 그곳에서 우리는 김치찌개와 오징어볶음을 먹었다. 둘 다 완벽한 한식이 아닌 어딘가 어설프고 사이비스러운 한식이었지만, 밀가루 대신 쌀이 들어가니 속이 편해졌다. 그 후로 우리는 도시를 옮길 때마다 한식당을 찾아다녔다. 우리의 여행이 아무런 문제 없이 둘 다 만족스럽게 끝난 건 팔 할이 한식의 힘이었다.
그 이후로 여행을 갈 때마다 어디서든 한식이 생각난다. 일본에 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똑같이 쌀이 주식이지만, 대부분 달고 짜거나 느끼하게 조리를 한다. 일본을 여행하는 와중에도 칼칼한 찌개, 매콤한 볶음요리, 간이 세지 않고 깊은 국물 맛이 그리워졌다. 어렸을 때에는 외국까지 나가서 굳이 한식을 찾는 사람들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좋은 컨디션으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나는 공항에서 반드시 한식을 먹고 비행기를 탄다. 일본을 가던, 사이판을 가던, 영국을 가던 지하 1층 식당가에서 칼칼한 김치찌개를 먹어야 비행기에서 편하게 숙면을 할 수가 있다.
이번 보라카이 여행은 덕질을 하다가 친해진 덕메와 처음으로 함께 하는 여행이다. 근 2년 간 한 달에 서너 번 이상씩 만나고 같이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일주일 동안 필리핀의 섬에서 둘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같이 여행을 할 때 사이가 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뭐든지 솔직하게 자기의 의견을 밝히고 그것에 대해 조율을 해야 한다. 배려한답시고 말 안 하고 끙끙 앓다 보면 끝에 가서는 혼자 꿍해진다. 난 비행기에 타기 전 인천공항에서 한식을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같이 먹을 생각이 없다면 혼자 먹을 테니 옆에서 다른 걸 먹거나 아니면 다른 볼일을 보고 있으라고 선택지를 주었다. 친구는 빵 터지며 말했다. ”언니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해!” 우린 인천공항의 지하 푸드코트에서 김치찌개와 낙지 돌솥을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취향이 맞거나 아니면 까다롭지 않아서 얼마든지 서로 맞출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한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고맙게도 나와 함께 한식을 먹어 준 친구는 비행기에 타자 유료 기내식 메뉴에 눈을 반짝거렸다. 기내식 메뉴가 담긴 책자를 넘겨보며 이게 맛있겠네, 저게 맛있겠네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흥분하며 바카디 미니어처를 가리켰다. “나 이거 한번 먹어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난 바카디를 먹어 본 경험이 있었다. 맥주보다 가끔 위스키나 와인 한 잔씩을 홀짝거리곤 하는 나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경험을 살려 바카디 미니어처병 두 개와 콜라 하나, 과자 한 봉지를 주문했다. 여자애 둘이서 위스키를 주문하자 승무원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당연하게도 온더락 바카디는 너무 썼다. 하지만 거기에 콜라를 섞자 먹을만한 칵테일이 되었다. 우린 아이패드로 함께 덕질을 하면서 사이좋게 위스키를 나눠마셨다.
예전에는 비행기 기내식은 반드시 먹어야 했고 저가 항공의 유료 기내식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어서 절대 사 먹지 않았다. 오히려 기내에서 먹을 과자나 음료를 면세에서 미리 준비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내식이 나와도 입에 안 맞을 게 뻔해서 미리 한식을 먹고, 저가 항공에서 다른 때보다 배 이상 비싼 술과 스낵을 당당히 시킨다. 이럴 때마다 돈을 버는 여유로운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취향이 너무 확고해서 고집이 센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기내식으로 나온 머핀을 보며 의외로 맛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기내식 빵이 날 감동시키면 얼마나 감동시키겠어? 경험이 많은 어른은 고집이 세고 취향이 확고하다. 그래서 어쩌면 새로운 걸 시도해보지 못하는 어른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는 내가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시도해보기로 했다. 바다 수영보다는 수영장 수영을 좋아하지만 바다 수영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나트륨 농도가 짙은 파도에 몸을 맡겨보는 건 어떨까. 가격 흥정을 하면 싸게 산 것 같아도 마음속 한구석에서 ‘내가 호구된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웬만하면 정가 구매를 선호하는 나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친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흥정을 해보면 어떨까. 사실은 손해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깎았으니 돈을 아낀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여행을 가면 새로운 나를 만난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정말 그렇다. 내가 한식을 이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여행을 가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친구와 함께 마시는 위스키의 달콤쌉싸르한 맛을 이제는 누구에게 알려 줄 수 있다. 이번 여행이 또 다른 나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