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 초행길. 기분 좋게 비행기에서 내린 지 어느덧 2시간째. 난 흔들리는 배 안에서 야릇한 멀미 기운을 참으며 앉아있었다. 한국인들로 가득 찬 배 안은 꽤 조용했다. 깊은 밤, 사방은 깜깜하지만 이 곳이 바다 위라는 걸 파도가 끊임없이 알려준다. 왜 아직도 보라카이가 아닌 거야?
휴양지로 여행을 다닌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코나키나발루, 사이판 이후 세 번째 휴양지 여행이다. 많은 경험은 아니지만 코나키나발루와 사이판 여행이 서로 비슷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보라카이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휴양지 여행의 묘미는 바로 편안함 아니던가. 공항에서 내려서 리조트의 픽업차량을 타고 안락하게 리조트까지 도착하는 것.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나? 출발하기 며칠 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칼리보 공항에서 보라카이 섬까지는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차량을 타고 1시간 반, 배를 타고 5분을 더 가야 보라카이섬에 도착한다. 그리고 호텔까지는 다시 트라이시클을 타고 들어가야 한다. 듣기만 해도 피곤한 기분이었는데 실제로 경험하니 더 피곤하다. 더군다나 칼리보 공항은 정말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비행기에서 내려서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 활주로에서부터 대기했다. 활주로에 서서 비행기가 뜨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순간은... 낭만적이긴 했지만 너무 후덥지근했고 다리가 아팠다.
너무 가까운 비행기
비행기에서 내린 지 세 시간 만에 호텔 침대를 보았을 때,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몰려오는 피로감에 우리는 바로 쓰러졌다. 그래도 여행 첫날이라 힘들지만 기운이 있다. 뜨거운 물에 몸을 삶고 나자 졸음이 밀려온다. 불을 끄고 각자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이제 막 잠이 들락 말락 한 그때! '우우우우우웅!!' '부아아아아앙!' 차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꽤나 크게.
리조트가 아닌 3성급 호텔을 예약한 터라 그냥 깔끔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스테이션 1 초입에 있는데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화이트비치까지 걸어서 1~2분이면 간다. 완벽한 위치라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호텔은 메인 도로 바로 옆에 있었다. 이 밤에도 누군가는 트라이시클을 몰고 있다.
'부지런한 거야... 아님 놀고 있는 거야..'
그래도 하루 종일 이동수단에 묶여 있던 몸이라 그런가. 잠을 설치는 듯하더니 어느새 까무룩 잠들었다.
아침에 조식을 먹기 위해 알람을 맞춰서 일어났다. 친구와 나 모두 아침을 먹지 않는 타입이라 호텔 조식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데 호텔 예약을 조식 포함으로 해버렸다. 우리가 비행기표를 사고 호텔을 예약할 때, 사실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3차로 매운 닭발을 파는 포차에 와 있었다. 1,2차에 맥주와 와인을 조지고 이제 소맥을 조질 차례였다. 여행을 가고 싶었던 난 친구들에게 제발 나랑 같이 어딘가로 떠나자고 졸랐다.
"크로아티아"
"돈 없어"
"뉴욕?"
"비싸"
"발리 가자 발리!"
(혹해서 스카이스캐너를 뒤진 친구 J) "거기 넘 비싸다.."
"아. 하와이??"
"비싸다고!"
"베트남?"
"안 끌려..."
"보라카이??"
유럽을 거쳐 미국을 지나 그 많은 동남아 휴양지 중 J는 보라카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난 사실 떨떠름했다. 필리핀은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문과생들이 해야 하는 필수코스 중 하나가 바로 필리핀-호주로 이어지는 어학연수 아니던가. 나는 10년도 더 전에 이미 세부에서 2개월 정도 머물렀다. 그리고 필리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안전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나쁜 공기였다. 은행과 학원 앞, 쇼핑몰 앞에 항상 보이던 총을 든 가드들. 실제로 내가 다니던 학원으로 들어오는 골목에서 학원생 2명이 강도를 만나 곤욕을 겪었다. 그때 학원 원장은 절대 툭툭를 타지 말고 꼭 택시를 타고 골목으로 들어와 학원 앞에서 내리라고 했다. 하지만 택시라고 해서 안전한 건 아니었다. 또한 세부는 차도 많고 툭툭이라고 불리는 개조 오토바이가 많았다. 그 많은 차량에서 내뿜는 매연들은 상상 초월이었다. 내가 살던 인천 역시 공기가 결코 깨끗한 곳은 아니었지만 세부에서는 항상 목이 아팠다.
그런데 J는 이미 보라카이를 4번도 넘게 다녀온 소위 말하는 보라카이 베테랑이었다. 어떻게 한 여행지를 4번이나 가지? 그리고 또 갈 계획을 하지? 난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무조건 콜을 외쳤다. 난 너무나 떠나고 싶었다. 그냥 다른 곳에 가고 싶었다. 또 여행병이 도진 것이다.
그렇게 3차 술자리에서 우리는 비행기표를 샀다. 그리고 비몽사몽 한 기운으로 헤어졌고 집에 와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카톡이 왔다.
- 언니! 이 호텔 어때?
-(잘은 모르겠지만 쟤가 이 시간까지 열심히 골랐으니 다 좋다고 하자) 웅! 조아!
-그럼 이걸로 할게!
-(... 좀 말릴까...) 음, 그거 무료 취소되는 거야?
-아니! 취소 불가야!
-(말리는 게 맞긴 하는데... 귀찮기도 하고) 그래!
나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호텔은 상당히 저렴했고 수영장이 없는 곳이었다. 난 바다보다는 수영장을 좋아하는 편이라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이미 떠난 배였다. 중간에 한번 숙소를 옮겨도 좋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였다. 그리고 조식 포함이라는 글자를 보고 '과연 우리가 저걸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호텔 조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난 저녁에 술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로컬 식당에 가서 아점을 먹는 걸 좋아한다. 호텔 조식이 다 뻔하기도 하고.
우리는 5시간도 채 자지 못했지만 일어났다. 돈을 냈는데 안 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식은 뷔페가 아니라 주문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우리는 아메리칸식과 과일 플래터를 시켰다.
단순해 보이지만 꽤 맛있었던 조식
아 망고!! 그렇지. 세부에 있으면서 필리핀이 싫어졌지만 그래도 좋았던 것 중 하나. 바로 맛있는 망고다. 세부에서 망고맛을 처음 본 나는 한국에 돌아온 후, 필리핀에서 1일 1 망고를 하지 않았던 것을 매우 후회했다. 한국 망고는 가격도 비싸지만 맛이 없다. 차라리 냉동 애플망고를 사는 것이 나을 정도이다. 난 매일 조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바로 이 순간 찾았다. 실제로 일주일간 매일 조식을 먹었고 꼭 과일 플래터를 시켰다.
필리핀 망고는 딱 잘 익었을 때 수확해서 유통하기 때문에 열에 아홉은 매우 달고 즙이 풍부하다. 과육도 말랑말랑해서 한입에 쏙 넣으면 씹는 재미가 있다. 거기다 가격도 싸다. 길에서 망고 1킬로에 180페소(약 3600원) 정도로 판매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망고를 사서 냉장고에 쟁여놓고 낮에 간식으로, 저녁에는 안주로 먹었다. 결국 1일 3 망고를 했다. 배속에 들어간 모든 망고가 맛있었다. 배가 달달해졌다.
보라카이에서 우리는 계속 누워있을 예정이었다. 화이트비치의 선베드를 빌려서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 책을 보고 낮잠을 잘 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책도 3권이나 가져왔다. 휴양지의 묘미는 휴식 아니던가. 비록 호텔에 수영장은 없지만 모래사장에 늘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화이트비치에는 선베드가 없었다. 단 한 개도. 알고 보니 보라카이가 환경 문제로 6개월 동안 문을 닫은 후 재개장하면서 화이트 해변에서 음주가 금지되었고 선베드 역시 모두 철수했다고. 뒤늦게 안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쿨한 백인들은 비치타월 한 장 깔고 누워 휴가를 즐겼지만, 도시 여자인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비치타월 한 장이라니, 자세 바꾸기도 애매하고 온 몸이 모래투성이가 될 것이 뻔했다.
결국 우리는 낮잠은 호텔로 돌아가서 자고 다시 나왔다. 뭔가 맥이 빠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다에서 파도를 실컷 탄 후 늘어지게 낮잠을 자니 이제 술을 마시고 싶어 졌다. 화이트비치에 즐비해 있는 많은 술집들 중 한 곳을 들어갔다. 어니언링과 닭다리를 뜯으며 바깥을 구경했다. 시간이 흐르고 해가 지던 그때..
바다에는 선셋 투어를 하는 돛단배들이 즐비했다. 파란색, 흰색의 배들이 파도를 타며 넘실대는 모습은 정말 그림 같았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진한 태양의 색이 바다의 색을 바꿔놓았다. 코나키나발루의 석양이 온 세상을 핑크색으로 물들이는 신비로운 노을이라면, 보라카이의 석양은 파도를 따라 떠다니는 돛단배 사이를 넘나드는 생동감 있는 노을이었다.
튀김과 맥주, 무슨 노래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리듬감 넘치는 EDM 음악과 노을. 비록 오기 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행복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참 별 것 아닌데 행복했다. 이 별거 아닌 행복을 느끼러 보라카이까지 그 긴 시간을 지나왔다. 한국에서도 튀김과 맥주, 음악과 노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왜 이렇게 꼭 떠나야만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걸까. 여행을 참 많이 다녔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순간, J와 함께 보라카이 노을을 보며 마신 맥주, 같이 나누는 이야기,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 감정은 확실하게 마음속에 콕 박혔다. 아마 누군가 내게 보라카이라는 단어를 꺼내면, 지금 이 순간이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