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선물이란다

by 데이지

요즘도 봄철이면 초등학교 앞에는 병아리를 상자 가득 담아놓고 팔까. 엄마가 "절대 사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을 까맣게 잊고 병아리를 기어이 사왔지만 병아리는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심장이 뛰고 온기가 흐르고 삐약삐약 소리를 내던 보송보송한 생명체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는 것을 목도하는 일은 두 번 다시 하고싶지 않았다. 한 생명의 삶과 죽음이 이토록 허망히 갈려버린 것이 내 탓인것만 같았다. 엄마의 꾸중과 병아리의 죽음 중 어떤 것 때문이었는지 구분되지 않는 이유로 눈물로 펑펑 쏟고, 퉁퉁 부은 눈으로 병아리를 묻어주고 돌아오며 생각했다. 생명을 키우는 것은 신중해야겠다고.

매번 각종 비영리단체의 1인 아동 결연 홍보를 보면서도 주저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금액이 아이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겨 내가 책임질 수 없게 되면 어쩌나. 예상치 못한 상황의 변화나 고용의 불안이 발생해서 아이에게 부칠 돈이 없어지면 어쩌나. 한 번 결연을 맺었다가 후원이 끊긴 아이는 다시 후원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아이의 생을 밀착하여 보살피는 일은 아닐지라도 나의 후원금이 아이의 생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면, 적어도 아이에게 약속한 기간까지는 책임을 다 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의 나는 주기적으로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직이 아니라 대학원에 가고 싶었기에 소득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나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질 수 있는 마당에 후원금까지 꼬박꼬박 보내는 것은 어려워질 수도 있으므로 신중해야 했다.

신중함이 무너진 계기는 너무나 하잘 것 없었다. 서른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퇴근길은 번잡했고 집에 오니 허탈했다. 더 많은 연봉을, 더 높은 학력을, 더 좋은 직장을 위해 나름대로 분투해 왔지만 서른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그 중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남자친구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체력은 바닥나 모임에 나가는 것조차 귀찮았다. 떠들썩한 도심을 뚫고 집에서 물빠진 츄리닝을 입고 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우며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크리스마스 특집 TV 프로그램으로 가득한 채널을 돌리며 인생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와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제법 부지런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제법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이런 소모품같은 인생이라니. 내 인생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래서였다. 충동구매 대신 충동후원을 '지른' 것은. 삶이 이토록 허무하게 흘러가도록 방치하느니 뭔가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습관처럼 도지는 '때려치워병'을 잠식시키고 회사의 부품같은 존재가 아닌 세상에 가치를 창출하는 존재이고 싶었다. 핸드폰을 통해 너무나도 쉽게 1:1 결연 신청을 완료하고 나니 조금 멍해졌다. 엄마, 나 지금 세이브더칠드런 (Save the Children) 1:1 아동 결연 신청했어. 소파 옆자리에 앉아있던 엄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이제 했어? 진작 했어야지. 이토록 쉽게 이야기할 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나의 깊은 고민과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한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엄마의 반응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막상 해 보면 쉬운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듬해 1월 3일, 세이브더칠드런에서 결연아동 확정 메일이 왔다. 인도네시아 숨바에 사는 여덟 살 여자아이 에렌시아. 에렌시아는 산수와 미술을 좋아한다고 했다. 커다란 눈으로 물끄러미 카메라를 응시한 에렌시아의 사진을 보고 왠지 나는 옳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아파 낳은 자식은 아닐지라도, 내가 이 아이의 엄마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에게 더 좋은 삶을 줄게. 네가 꿈꿀 수 있도록,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나도 힘을 낼게. 먼 나라 어딘가에서 너를 위해 항상 기도할게. 한 여자아이가 평범한 성인이 되어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면, 아이의 삶에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다면 나의 평범한 하루도 더 값진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 책상 앞에 자녀들의 사진이나 가족 사진을 붙여 놓은 많은 우리 사회의 엄마아빠들이 아마도 이런 마음으로 일터에 나오고 있을 것이었다.


몇 년째 꾸준히 빠져나가는 후원금은 월급을 받아 가장 가치있게 쓰는 비용 중 하나이다. 회사일은 때로 고단하고 사람들은 때로 일보다 더 큰 어려움을 안긴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대학원 공부에 대한 꿈은 생계에 대한 걱정 앞에 늘 한구석으로 밀쳐지지만, 그 꿈으로 인해 다시 힘을 내어 일터로 나갈 수 있는 희망이기도 하다. 급여일 다음 날부터 무섭게 빠져 나가는 카드값과 자동이체의 홍수 속에서 에렌시아에게 보내지는 금액은 음의 값이 아닌 양의 값을 갖는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내가 책임져야 할, 온전히 나의 지지와 후원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하나쯤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알림이자, 나의 노동이 헛된 것이 아님을, 노동의 대가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쓰이고 있다는 믿음을 공고히 해 주는 알림인 것이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에렌시아의 사진이 메일로 온다. 얼마나 컸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해가 갈수록 쑥쑥 자라는 에렌시아의 모습을 보며 해가 갈수록 지쳐가는 마음을 다잡는다. 어쩌면 엄마도 이런 마음으로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엄마가 된 적은 없지만,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에렌시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후원 신청을 했으니 필히 이 아이는 나에게 온 크리스마스 선물일 것이리라. 에렌시아에게 보내는 편지에 '너는 나의 선물이란다' 라고 썼지만 구구절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믿는다. 내가 에렌시아에게 베푼 것보다 내가 받은 것이 훨씬 크기에. 모든 엄마에게 자녀들은 이와 같은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에 지치고 시달린 퇴근길이 온기어린 자신감으로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