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색채

이토록 황홀한, 이토록 깊이 있는

by 데이지
"사실, 내 안에는 모든 아이가 다 있네. 난 3살이기도 하고, 5살이기도 하고, 37살이기도 하고, 50살이기도 해. 그 세월들을 다 거쳐 왔으니까, 그때가 어떤지 알지. 어린애가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어린애인 게 즐거워. 또 현명한 노인이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현명한 어른인 것이 기쁘네. 어떤 나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구!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이가 다 내 안에 있어. 이해가 되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미치 앨봄(Mitch Albom)



'색채의 황홀' 이라는 부제가 붙었던 마리 로랑생의 작품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렸던 이 전시회를 다녀온 것은 전시 마지막 날, 내 생일날이었다. 미적대다가 마지막 날에야 발걸음을 옮긴 스스로를 나무라기도 하고, 생일날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본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도 하였다.


마리 로랑생의 그림은 그녀가 노년이 될수록 파스텔톤의 고운 색채가 더욱 깊어진다. 화가도 필경 그토록 곱고 온화한 사람이었을 것만 같다. 그녀를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역시, 라는 생각이 든다. 평온하게 원숙미를 갖춘 색들은 우아한 결로 화폭에 내려앉는다. 수줍지만 숨기지 않는다. 여리지만 약하지 않다. 그녀의 색채를 닮고 싶다. 그토록 고아하게 나이먹고 싶다. 당시 그녀에게 초상화를 부탁하는 것이 왜 그토록 유행이었는지, 왜 모두가 그녀의 모델이 되기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색채를 입으면 나 또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기에.


말과 소녀, 1925. 마리 로랑생은 말이 자신과 닮은 존재라 생각하여 큰 애착을 보였다.
샤를 델마스 부인의 초상, 1938. 마리 로랑생의 초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초상화를 완성시키는 것은 검정색의 눈동자이다. 먹물같은 동자는 맑고 청아한 검정이다. 파스텔톤과 원색의 고운 색감들은 그 검은 눈동자 안으로 수렴해 갈 것만 같다. 어둡고 그늘깊은 검정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검정. 인종도, 홍채의 색도 다를 터인데 그녀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다. 말년으로 갈수록 눈동자는 더 뚜렷하고 더 검어진다. 어쩌면 화가 자신의 인식을 투영한 것은 아닐까. 삶의 굴곡을 모두 넘긴 인생의 후반기, 점점 더 많은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배포가 생겨간다. 그리하여 눈동자는 점점 검어진다. 담아야 할 것이 많기에 더욱 짙어진다. 시간을 축적시켜 점차 깊이와 완성도를 더해가는 이러한 종류의 미적 아우라를 뿜어낼 수 있다면 구태여 나이 드는 것을 마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세 명의 젊은 여인들, 1953



링컨은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였고, 공자는 마흔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멀게만 느껴졌던 이 숫자가 내 나이로 다가오고 있다. 어깨가 무겁다. 삶이란 분절이 아닌 총합으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누적된 시간들은 감출 수가 없다.


인생을 계획한 대로 살 수 있으리라 믿었던 어린 날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과녁을 용케 비껴가는 화살처럼 흘렀다. 급류에 휩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작스레 냉동된 것 같기도 했다. 사고가 정지되고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모든 시간이 켜켜이 퇴적되고 응축되어 사람의 색은 빛과 향취를 더해간다. 바라건대 나의 것은 아주 옅고 엷은 생기면 좋겠다. 그러나 맑고 밝고 따뜻한 색이면 좋겠다. 어느 색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기분 좋은 색이면 좋겠다. 내 색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을 돋보이게 해 주는 색이면 좋겠다. 어쩐지 나라는 사람은 튀는 원색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이왕 그렇다면 아예 모든 색을 품을 수 있는 바탕같은 색이면 좋겠다.

장미와 여인, 1930. 사랑스러운 색채.


주위를 둘러보면 함께 세월을 이고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얼굴에서 시간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간이 어떻게 쌓여 왔는지 또한 얼굴이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시간을 잘 다스려 온 사람들에게서는 단순히 노화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풍기는 고유의 공기가 있다. 나이듦이 유쾌한 일이 되기는 어렵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퇴적되어 지층처럼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 삶의 궤적은 개개인의 지층에 반영되어 같은 탄소 화합물이라 해도 흑연이 되기도 하고 다이아몬드로 재탄생되기도 할 것이다. 세월의 누적을 피할 수 없다면 품어내는 것이 세월을 이기는 방법이리라.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없기에.

이제 나이가 들수록 나의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감이 든다. 품을 수 있는 감정도, 사람도, 이야기도 더 많아질 것이기에. 세상을 보는 시선은 더 깊어지고 이해되지 않던 것도 헤아릴 줄 알게 될 것이다. 타오르는 정오의 햇빛보다는 따사로운 오후의 볕을, 날카로운 지식보다는 온유한 지혜를, 직화구이같은 생생함보다는 뚝배기같은 뭉근함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어쩐지 이제는 나이 먹는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화환을 입은 소녀(Jeune fille à la guirlande de fleurs), 1935. 개인적으로 마리 로랑생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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