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 기억도 결국은 견뎌내야 하는 무엇
아팠다. 그리고 아직도 아프다.
몸이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쉽사리 알지 못한다. 마음이 아파보지 않은 사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플 때의 시간은 배신감이 들 만큼 느리게 간다. 쏜살같이 지날 때도 있었던 것 같은 시간은 여기저기 걸쳐져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제발 지나가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살바도르 달리가 이 그림을 그린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나에게 이 그림은 흘러가지 않는, 그래서 아픔을 상기시키는 그 무엇이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늘 몸이 아팠던 것 같다. 심리적 긴장과 스트레스는 체력의 고갈과 면역력의 저하로 이어져 내 몸은 그야말로 취약한(vulnerable) 상태가 된다. 염증이라던가 바이러스, 알러지 같은 것들이 침투하여 공격력을 뽐내기에 아주 좋은 숙주가 되는 듯하다. 면역력에 좋다거나 피로회복에 효과가 있다는 각종 영양제와 건강식품을 모두 섭렵해 보았으나 이 건강기능 식품의 효용을 몸소 체험해 본 바는 없다. 비타민과 비타민 c 는 기본이요 아사이베리, 브로콜리추출물, 프로폴리스, 홍삼, 울금 등... 이렇다 할 효과를 누리지 못한 것은 식약품의 탓이 아니다. 보조 식품의 도움으로도 방어할 수 없었던 섭취 주체(나)의 약함 때문이리라. 잘 먹고 잘 쉬고 푹 자는 것이 최고의 약이라고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가장 실현되기 어렵다. 현대인은 늘 근심과 걱정에 시달리며 숙면을 취해 본 기억은 아득할 뿐이다.
몸의 고통과 마음의 피로는 늘 함께 온다. 사실 몸이 아플 때는 사람과의 접촉을 자제해야 하는 것이 옳다. 심약한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배배꼬인 말들을 뱉어내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몸 만큼이나 마음도 통제하기 어려워지기도 하고, 아픈 것에 대한 화풀이가 엉뚱한 방향으로 방출되기도 한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가시돋친 말을 쏟아 놓는다. 더구나 그 대상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아플 때 곁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그만큼 친밀한 사람인 것이며, 그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 또한 높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예 말할 힘이 없거나 말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지기도 한다. 필경 침묵은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 것이다. 아픈 사람을 위로하겠다는 선의가 무시당하는 기분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러한 까닭에 아픈 사람은 타인과의 접촉을 자제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간사하게도 아프면 누군가에게 아픔을 토로하고 싶고 위로받고 싶다. 병문안이라는 것의 목적과 기능이 이것이리라. 병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 두렵기에, 누군가와 대화든 침묵이든 나누고 싶기에 품앗이처럼 아픈 사람을 찾아가 위로하고 나의 위로를 보장받는 것이리라.
아플 때의 기억이나 아픈 기억은 모두 왜곡된 형태로 지속되고 쉽사리 흘러가지 않는다. 마음에 남아 깊은 생채기를 남기고 죄책감과 자책감을 동시에 갖게 한다. 감정이란 어째서 뉴턴의 물리 법칙이 적용되는 대상이 아닌데도 언제나 작용과 반작용이 함께 작동하는 것일까. 감정의 면역 또한 취약하기에 가장 아픈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달리가 이 작은 그림을 그리며 이토록 복잡다단한 생각을 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때로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을, 그 뒤틀린 형태와 절망적인 속도를 너무도 잘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몸이든 마음이든, 아픔이 찾아오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일이 닥쳤을까 생각한다. 인생을 죄와 벌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의 위험성을 안다. 그래서도 안 되며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외적 요인은 바꿀 수 없기에 파악했다 한들 어쩔 도리가 없다. 내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대상은 탓해 본들 무의미해진다. 개선이 가능한 것은 나 자신 뿐이기에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되고, 내 안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마음 졸이기도 하고 감사해 하기도 하며 급박한 나날들을 질주해 왔다. 인생이란 늘 그렇듯 예기치 못한 좋은 일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어려움을 한 쌍으로 들고 왔다. 행복이 절정에 달해 흥이 오르려는 찰나, 갑자기 와장창 산통깨는 소리가 나며 암흑이 되는 것 같은 식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원하던 일들이 성취된다는 기쁨에 취해 어쩌면 너무 교만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를 지키지 못하고 고속질주하려고 마음만 앞섰던 것은 아닐까.
모든 고통은 평소보다 더 깊고 긴 생각의 시간을 허락한다. 반성과 성찰, 고해와 뉘우침으로 가득 찬 시간들을. 시간과 생각의 탑을 하나씩 쌓아 올리다 보면 탑은 높아지고 나는 낮아져, 다시 작고 작은 나로 돌아온다. 감정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정화된 '나'로. 희노애락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은 서서히 비워져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체념과 평화의 사이 어디쯤에서 겸허함에 도달한다. 그 즈음에 이르러서야 지리한 통증이 가시고 몸도 마음도 치유되기 시작한다. 마음이 몸을 이겨낼 힘을 비축해 내는 덕분일 것이다.
한껏 기쁠 때의 시간은 그토록 빠르게 지나가 버렸는데 시련의 시기는 이처럼 여기저기 걸쳐져 나를 괴롭히기냐고 외치고 싶기도 하다. 끈덕지게 눌어붙어 망각마저 허락하지 않는 저 시간들을 모두 건져내 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제각각 정해진 속도로 이동한다. 어떤 것은 박제된 것 마냥 굼뜨게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것은 조금 더 빠르게 기어가기도 한다. 기억은 지속되고 상흔은 남아 있겠지만 시간은 저마다의 빠르기로 흘러갈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을 견디고 또 견뎌 그 시간마저 딛고 나아가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