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간다, 그리고 나아간다
철기문명이 인류사에 등장했을 때 아마도 무기나 생활용품, 건축에 있어서의 실용성을 우선했지 미적 가치를 헤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철기 시대에도 장식품이나 장신구는 여전히 청동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금을 이용하지 않았던가. 고대인들의 눈에도 철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을 위한 금속이 아니라 실질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금속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 금속에 예술성을 부여한 것은 현대인의 영혼이다. 그리고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자코메티가 아닐까.
무언가에 대해,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서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언어는 머리속에서 맴돌 뿐 바깥으로 나오기를 주저했다. 무형의 생각을 유형의 언어로 옮겨낸 것은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 이었다. '걸어가는 사람' 동상 앞에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어쩌면 조금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철사같은 느낌의 가느다란 브론즈 인간. 차가운 광물에서 탄생한 형상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연유는 무엇인가. 왜 나는 이 무심한 금속의 조형물 앞에서 르네상스시대의 인체미가 돋보이는 조각 앞에 섰을 때보다 더 큰 전율을 느끼는가. 그토록 걷기를 예찬하는 나는 왜 나는 발걸음을 옮길 수 없는가.
유려한 곡선과 완벽한 비율과 근육과 머리카락이 생생하게 표현된 대리석 조각상을 보았을 때도 이처럼 심장이 뛰지는 않았다. 그것은 신화나 역사의 인물이거나 알지 못하는 어떤 모델이거나 그 시대의 이상적 미에 대한 형상화였다. 완벽히 분리된 시대의 완전한 타인이었다. 그러나 이 조각상은 나였고, 당신이였고, 우리 모두였다. 그 철골 인간에게서 나를 본다. 아니 내가 거기에 있다. 이른 아침의 출근길에서, 저녁 나절의 퇴근길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오후의 햇살을 쬐는 정오의 도심에서, 혹은 주말의 공원에서도, 이 사람들은 그렇게 걸어다니고 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인간은 피가 흐르는 심장이 없는 자신을 한탄했으나, 이 금속제 인간은 어떤 사람보다 사람의 마음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딛고 나는 다시 걷기로 다짐한다.
생은 축복인 것 같기도 하나 잔인한 것 같기도 하였다. 때로 불꽃놀이와 색종이가 흩날리는 축제같기도 하나 진흙구덩이와 가시덤불을 헤쳐야 하는 긴 형벌같기도 하였다. 생명은 고귀하다고 하나, 모든 생명이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였다. 꽃가루가 날리는 날보다 재를 뒤집어쓰고 가야 하는 날이 더 많은 것 같았으나 어찌되었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흥이 올라 깡총대든 몸부림치며 기어가든 주어진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다. 순례의 길을 부러 걷지 않아도 모든 생은 순례를 요구했다. 볕에 그을리기도 하고 어둠에 얼어붙기도 하며 삶은 마모되어 간다. 그리하여 종래에 인간의 발걸음은 저토록 단순한 뼈대만 남으리라. 기쁨도 슬픔도, 꿈도 두려움도 없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을 위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이야기될 수 없었던 것들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걸어가는 사람’ 앞에서 걸어가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내가 투영되었다 느꼈던 조각은 그들 모두의 눈에도 자신의 자화상으로 보이고 있었다. 나에 대한 연민은 이내 그들에게로 전이된다. 눈물도 웃음도 잃은 채 걸어가는 것 같은 몸과 마음 위에 말랑한 살을 덮고 유연한 근육의 움직임을 입혀주고 싶어졌다. 뺨에는 홍조를 띄게 하고 걸음걸이에는 온기를 불어 넣고 싶어졌다. 무거운 발뒤축을 끌고 가는 대신 공기처럼 춤을 추며 가고 싶어졌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손끝이 스친다면 그 또한 함께 경쾌한 스텝을 밟게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는 나아가고 세상은 나아지고 생은 전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