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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Feb 14. 2023

그래, 그런거지. 그렇게 또 사는 거지.

사람마다 힘듬을 이겨내는 나름의 방법들이 있다. 어떤 이는 힘듬이 잊힐 때 까지 술을 진탕 마실 수도 있겠고, 어떤 이는 힘듬이 꾸역꾸역 소화돼도록 음식을 밀어넣을 수도 있겠고, 또 어떤 이는 힘듬이 천리 만리 가도록 누군가에게 하소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물에 들어가는 형이다. 평소에 잘 닫아둔 마음 속 우물이 힘듬을 만나면 소리없이 열린다. 그러면 나는 나의 모든 밝음을 벗어 우물 앞에 잘 개어 놓고 캄캄한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한 발 한 발 더 깊이, 한 발 한 발 내려가다보면 우물 속이 그렇게 추울 수가 없다.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다. 그렇게 서럽고, 그렇게 지겹고, 그렇게 화나고, 그렇게 진절머리가 날 수가 없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어디가 끝인지 가늠도 안되는 우물 속을 계속해서 내려간다. 네가 미웠다, 내가 미웠다, 세상이 미웠다, 온갖 잡다한 만물이 다 미워서 못견딜때 쯤 마침내 우물의 맨 밑바닥이 발 끝에 닿는다. 나는 가만히 그 캄캄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엉엉 운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한달도 간다. 그렇게 눈물샘이 똑 마를 때 까지 울고나면 비로소 고갤 들어 위를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내가 걸어 들어온 저 꼭데기로 말간 하늘이 빼꼼 보인다. 따스한 햇살도 아룽아룽거린다. 나는 웅크려 감싸안았던 무릎을 펴고 다시 우물벽을 기어오른다. 하늘이 가까워질수록, 햇살이 눈부셔질수록, 다리엔 힘이 붙는다. 내 안의 물기를 눈물로 다 짜고 난 후라 몸은 더없이 가볍다. 그렇게 우물밖에 나와 벗어두었던 햇살에 데워져 땃땃해 진 밝음을 도로 입는다. 서럽고, 지겹고, 화나고, 진절머리 나던 것들이 별 것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꽉 막힌 것 같은 앞길에 샛길을 틀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기어이 감정의 바닥을 치고 나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사람이다. 


입분씨와 그 사달을 겪은 며칠간 나의 우물이 열렸었다. 나는 기어이 바닥까지 내려가 눈물을 다 짜내고서는 기어코 우물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감사히도 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할머니와의 대판은 오히려 우리 가족에게 지금 할머니의 상태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우리 시할머니 같은 경우엔 가족을 못알아보시는 것도 아니고(이름은 자주 헷갈리시긴 한다), 배변실수가 잦은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엔 굉장히 또렷하시기도 하기에 사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혀 치매인 줄 모르거나 깜빡깜빡 하는 정도의 초기치매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우리 가족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지 모른다. 말씀을 하도 똑부러지게 하시니 저렇게 멀쩡한 양반이 왜 자꾸 답답한 소릴 하나 싶어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난 주 그 일로 할머니가 겉보기와 다르게 치매가 상당부분 진행이 되었다는 걸 온 가족이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작은 집은 작은집 대로, 우리 부부는 우리 부부대로, 따로 또 같이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생각해보니 나는 치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가끔 TV 드라마나 인간극장 같은 다큐에서 보았지만, 그건 그냥 프로그램일 뿐. 그저 아, 저 사람들은 참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게 다였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우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집에서 검색해두었던 치매 관련 책을 두어권 골랐다. 너무 이론적인 책은 저자인 전문가들이 글자로 나를 야단치는 느낌이 들 것만 같아 제외하고, 가급적이면 실제 치매가족과 함께 살고있는 보통 사람들의 책을 골랐다. 도서관의 책들 중 대출이 안되는 치매 관련 만화책이 있기에 도서관에 앉아 그 책을 다 읽었다.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그려진 만화였는데, 어느 부분은 우리 집 이야기 같고, 어느 부분은 딴 세상 이야기 같고...... 위안도 받았다 죄책감도 느꼈다 하며 1, 2권을 후딱 읽었다. 머릿 속에 뒤엉켰던 많은 생각들이 차곡차곡 정리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께 조금 더 사분사분하게 말을 해봐야지.'

'대화는 나누되 할머니나 나의 감정이 상할 것 같은 순간엔 그 자리를 벗어나 있어야지.'

'할머니가 어떤 말도 안되는 말을 해도 일단은 수긍을 해 줘야지.'

'할머니가 욕을 하거나 화를 내면 좋은 이야기로 유도해 화가 났던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려드려야지.'

'친절하게, 친절하게, 친절하게.....'


도서관에서 돌아와 할머니 방문을 열고 인사를 하니 할머니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속이 쓰려 죽겠다고 화를 내셨다. 도대체 죽으라는 거지 이게 살라는거냐시며 "으이유! 으이유!!" 하고 한숨을 쉬셨다. 

"속이 자꾸만 아파서 어째~ 혈당이 내려가서 그런가 어쩐가 한 번 재볼까요?"

나는 침대 옆 작은 협탁 서랍에서 혈당체크기를 꺼내 할머니 손가락에 피를 내고 당수치를 쟀다. 당은 정상수치보다 약간 높았다. 

"다행히 당은 괜찮네, 할머니."

"괜찮은데 왜 이렇게 아퍼? 이렇게 아픈데 거짓부렁 하는지 알고, 작은애는 나보고 왜 센타 안나가냐고 그러지?!"

할머니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작은 어머니 말투가 원래 좀 그렇잖아요. 그래도 할머니 드시고 싶은 거 다 해다 주시고, 사다 주시고..... 할머니 걱정 엄청 하세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이해해주세요."

"내가 우정 꾀병부리는 줄 알어? 나도 센타 나가면 좋아! 재밌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근데 못가겠는 걸 어떡해?"

"그러게요. 그러니까 밥을 일단 잘 드셔야 해. 그래야 기운도 생기고, 약발도 받고 하죠. 그럼 어떻게, 지금 저녁 차릴까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다. 

수긍해드리고, 주의를 돌리고...... 새로운 작전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아니, 땀은 왜이렇게 나? 추워다 더웠다 이지랄을 해, 아주그냥! 늬미 진짜 콱 죽어버렸음 좋겠구만...."

"할머니도 더워요? 나도 더운데...... 그럼, 조금 시원해지게 딸기 조금 드릴까?"


"으이구~ 오줌은 왜이렇게 자주 마려? 먹은 게 오줌으로 다 나가니 원, 그러니 이렇게 기운이 없고 떨리지!"

"그래도 엊그제는 오줌이 안나와서 고생이었는데 오늘은 잘 나오니 다행이네~ 그 때 안나왔던 거 오늘 몰아서 나오나보다. 오줌 색이 막 시커멓고 그렇진 않죠?"

"응, 그렇진 않아."

"그럼 됐네. 오줌 안나오면 방광 터지고 더 힘들었을텐데..... 잘됐어요, 할머니."


"할머니, 왜이렇게 깜깜하게 계셔요? 텔레비전 틀어드릴까?"

"그러든가 말든가! 테레비라고 볼 것도 없고 늬미~"

"왜 화를 내셔~ 할머니, 예쁘게 말하세요~ 저도 예쁘게 말하고 있잖아요~^^"


이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대화지만, 말투를 조금만 더 친절하게 바꾸니 할머니도 곧 성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셨다. 심지어, "할머니, 예쁘게 말하세요~" 이 말은 할머니에게 직효였으니, 그 이후로도 3번인가 사용했었는데, 그 때 마다 할머니는 심술난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셨다. 

그래, 답은 말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치매를 앓고 있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도 말투 하나에 기분이 좌지우지 되는데,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감정을 느끼고 표출하는 치매분들이야 오죽하랴. 문제는 얼마나 인내심을 발휘하느냐의 문제인데...... 치매의 주된 특징 중 하나인 무한반복의 지옥에서 친절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은 치매이다" 를 주문처럼 외우며 말투에 친절함을 장착하고, 자기만의 마지노선을 책정하여 어느 정도의 선에서 내가 더이상 못참겠다 싶으면 잠깐 그 자리를 피해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큰 난리 이후 열흘, 할머니는 그 날의 난리 중 신랑과 있었던  한 장면을 꿈이라 생각하고 계신다. 어느 시커먼 옷을 입은 커다란 남자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는데, 그 뒤에 있던 남자(앗! 내가 남자로 바뀌다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자기는 죽었을 것이라고 하신다. 어떤 때는 저승사자 두사람이 그랬다고 하고, 어떤 때는 머리를 빡빡 깎은 중 두 사람이 그랬다 하고...... 매번 남자들의 정체는 달라지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아직 신랑에게는 조금은 뾰로통해 계시지만, 내게만큼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투덜투덜 하신다. 역시 할머니는 내가 제일 편하시지~ 하는 생각에 한편으론 맘이 짠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치매의 세계를. 치매인 분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케어해드려야 맞는건지 잘 모르겠다. 세상 모든 사람의 성격과 취향이 다르듯, 우리 할머니의 치매증상과 성향 역시 남들과 똑같진 않을 것이다. 해 보지 않았으니 두렵고 힘든 것은 당연한 거겠지. 그래도 할머니는 아직 내가 누군지 똑바로 기억하고 계시고, 배변 실수를 대놓고 하시는 것도 아니니 다행이다 생각하자. 시종일관 화를 내고, 온종일 욕을 하고,  

매일매일 부정적인 생각을 하시는 것에 너무 빠져들어 힘들어하지 말자. 힘들 땐 잠시 자리를 비워보자. 그리고 다시 시작해보자. 죄책감과 자책에서 벗어나자. 지금 할머니를 위해 가장 애쓰는 사람이 나라는 걸 기억하자. 할머니가 나를 가장 의지하고, 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내가 잘 한 것이라고, 그렇게 나를 치켜세워 보자. 잘했다, 잘하고 있다. 너무 애쓰진 말고, 편하게 편하게.....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열 손가락을 쫙 펴고, 엑스자로 끌어당겨 양 어깨에 두르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딱 열 번만 토닥토닥 토닥여보자. 

천천히. 

따뜻하게.


다시는 할머니로 인해 우물이 열리지 않도록, 

토닥토닥

단단히 봉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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