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간병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정들을 보면 대부분 그 주체는 여자이다. 물론 아들이, 남편이, 손자가 그 일을 하고 있는 집도 있지만, 내가 본 대부분의 가정들은 며느리가, 혹은 딸이 돌봄과 간병의 최전선에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다곤 하지만 아직 사회는 “남편은 바깥일을, 아내는 집안일을” 이라는 보이지 않는 슬로건을 집집마다 걸고 있는 듯 하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결혼을 하고 6개월이 채 안되었을 때 시아버지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벌써 3번째 쓰러지신 것이라 아버지는 몸도 못움직이시고, 말도 못하셨다. 오로지 눈만 데굴데굴 굴릴 수 있을 뿐이었다. 당시 신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프리랜서 캐리커쳐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70이 넘은 할머니, 밤에 일하고 낮에는 쉬어야 하는 도련님, 출퇴근 시간에 얽매인 신랑은 자연스레 간병에서 제외되었다. 나는 “며느리”라는 이름이 무슨 직함이라도 되는 듯 간병에 책임을 느꼈다. 게다가 프리랜서라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시간 운용이 비교적 자유로왔기에 가족 중 간병에 이보다 더 적임자는 없었다. 나는 당연히 해야하나보다 생각했다. 당연히 해야만 하나보다 생각했다. 뇌경색이라는 병에 대해 몰랐고, 간병의 노고에 대해 몰랐다. 주된 간병은 내가 하겠지만, 나머지 가족들과도 적절히 간병의 분담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길어야 한두달 간병을 하고 나면 아버지의 마비된 몸이 풀리고 벌떡 일어나 걸으실 줄 알았다. 그랬다. 몰랐기에 한다고 했고, 몰랐기에 할 수 있었다.
덩치가 좋으셨던 시아버지를 케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아버지는 90kg가 넘으셨고, 나는 47kg이었다.
아침에 병원으로 출근해 할머니, 혹은 어머니(아버지와 재혼한, 그러나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와 교대를 한다.수건을 적셔 아버지의 얼굴과 손, 발을 닦아드린 후 상체쪽 침상을 올린다. 아버지의 등 뒤에 베개를 괴어 앉아계시기 편한 각도를 만들어 드린다. 아버지 앞섶에 수건으로 턱받이를 하고 아침으로 나온 된죽을 숟가락으로 살살 퍼 아버지 입에 넣어드린다. 이것저것 잘게 다져진 부드러운 반찬들도 얹어 드린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은 시원한 물김치 국물이다. 마비된 입술 사이로 김칫국물에 묽어진 죽이 비죽비죽 새나온다. 나는 아버지 입에 죽 한 숟갈을 넣어드리고 가재손수건으로 연신 입주변을 닦아드렸다. 아버지는 자주 사레에 걸려 기침을 하셨고, 기침을 하실 때면 입 안의 음식물이 내 얼굴로, 팔로 튀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아버지의 굳은 근육을 풀기 위해 썼다. 마비된 팔, 다리를 주무르고 또 주물렀다. 수시로 침상을 ㄴ자로 일으켜 앉아계시게 했고, 자꾸자꾸 말을 시켰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로 젓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하시면, 나는 끈질기게 말로 대답하시라 종용했다. “어! 어어! 으어!” 다른 가족들이 그랬다면 싫다고 입을 꾹 다무셨을텐데, 갓 맞이한 며느리가 시키니 아버지는 꽉 막힌 목구멍을 열고 뻣뻣한 혀를 움직이려 노력하셨다. 처음 몇 달은 소변파우치에 소변이 차면 소변통에 받아 버렸다. 이후 소변줄을 빼고서는 누워계신 아버지 성기에 소변통을 대고 소변을 받아 버렸다. 누워계시는 처음 몇 주는 누워서 용변을 볼 수 있는 변기에 아버지 대변을 받았다. 꾸준한 노력으로 비척비척 부축을 받아 몇 걸음씩 걸을 수 있게 된 후론 아버지를 모시고 화장실로 가 용변을 보게 하고 뒷처리를 해드렸다.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 쯤이야 유도 아니었다. 조금 서계실 수 있게 되셨을 땐, 소변은 남자 소변기에 서서 보시게 했다. 소변은 앞으로 쏘아지지 못하고 줄줄 흘러 병원 바지를 매번 적셨다. 그래서 아버지 소변 보실 때 그곳을 잡아드렸다. 이런 얘기를 하면 몸서리를 치며 시아버지 고추 잡아 오줌 뉘이는 이상하고 변태스런 며느리라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좁은 양변기칸에서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앉으면 쪼그라든 성기에서 오줌이 변기 밖으로 삐져나왔다. 어차피 양변기에 앉았어도 고추는 잡아드려야 했다. 앉은 자세의 아버지를 앞으로 안아 다시 일으켜야 했고, 변기 밖으로 흐른 오줌은 어김없이 종아리에 걸쳐진 병원 바지도 적셨다. 그 뿐인가? 변기 밖으로 흐른 오줌도 다 닦아내야 했다. 그럴 바에얀 바지 앞만 살짝 내려 서신 채로 소변을 보시게 하는 게 여러모로 간단하고 덜 힘들었다. 휠체어에 아버지를 옮겨 앉히고 병원밖으로 산책도 나가고, 비교적 한적한 병원 복도에서 걷기 연습도 꾸준히 하시게 했다.
병원서 재활운동 외에 별다른 치료가 필요없어지자 퇴원을 권했다. 아버지는 할머니, 도련님과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병원 대신 시댁으로 출근했다. 움직이기 싫어하시는 아버지와 싸워가며 매일 걷기 운동을 하고 말하는 연습을 했다. 쓰러지신지 반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혼자 숟가락질을 하실 수 있게 되었고, 일으켜만 드리면 화장실 앞까지 지팡이를 짚고 비척비척 걸어가실 수 있게 되었다. “무우ㄹ~”, “아파”, “더우어” 아버지는 간단한 단어들을 발음하실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힘들고 어색했던 목욕시키기도 어느덧 아무렇지 않은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가 괜찮아지실수록 나는 점점 피폐해져갔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나는 간병의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내 일을 포기한 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정작 다른 가족들의 삶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한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고, 1년이 다 되어가도록 변하는 건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아졌고, 급기야 새나오는 울음을 삼키려다 호흡곤란이 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를 대비해 신랑은 차 안에 비닐봉지를 항상 구비해 두었다가 내가 숨을 못 쉬면 얼른 봉지를 입게 갖다 대주며 소리쳤다. “자기야, 숨 쉬어! 하나~ 두울~ 하나~ 두울~”
골반과 허리 통증 때문에 찾은 한의원에서 우울증 경계에 있다는 진단을 들었다. 지금 허리가 문제가 아니라고……. 그 말을 들은 신랑은 생각 끝에 내게 다시 일을 시작하라고 했다. 아버지도 많이 좋아지셨고, 아기도 슬슬 가져야 한다고 시어른들께는 말씀드렸지만, 실상은 내가 어찌될까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결혼하고 신혼을 즐길 새도 없이 아버지 병간호로 1년을 꼬박 보낸 것에 대한 미안함 역시 있었을 테고 말이다.
그렇게 간병 1년만에 나는 간병 최전선에서 전역했다.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일주일에 2번 시댁으로 가 아버지를 케어했다. 아버지에게 닥달하고 잔소리하는 내가 없으니 아버지는 내가 가는 날 빼고는 운동을 멈추셨고, 결국엔 서서히 다시 몸이 굳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1년 반만에 돌아가셨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 우리는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 시할머니와 함께 산다고 하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를 했다. 시어머니도 아니고 시할머니라니, 요즘 누가 시할머니를 모시냐며 걱정걱정을 했다. 나도 걱정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신랑의 마음을 알기에, 따라주고 싶었다. 시어머니도 아니고, 시할머니니까 오히려 더 낫겠다 싶었다. 아직 건강하시고 정정하시니 괜찮겠다 싶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각만큼 어려운 일 또한 아니었다. 마음이 편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살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2019년, 할머니에게 뇌경색이 찾아왔다. 얼굴의 반이 마비가 되고, 말이 어눌해 지셨다. 추석 연휴인 탓에 응급실로 달려갔다. 급성뇌경색이라는 진단이 내려졌고 할머니는 급히 입원을 하셨다. 그 무렵 치매도 찾아왔다. 나는 덜컥 겁이났다. 10여년 전, 뇌경색으로 온 몸이 굳어버린 시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 때 처럼 할머니의 간병을 도맡게 될까 두려웠다. 작은 어머니와 할머니 일을 논의하던 중 나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머니, 사실 저 너무 무서워요. 할머니께서 아버지처럼 드러누우시게 될까봐…… 다시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게 될까봐…… 그 땐 몰라서 했지만, 지금은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그래서 너무 겁이 나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마. 너 혼자 할머니 도맡게 하지 않을거야. 할머니가 그정도 상태라면 요양병원에 모시면 돼. 그게 할머니한테도 더 좋을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말해주시는 작은어머니가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어쩌면 그 때 그 일이 작은어머니와 나 사이에 느슨했던 끈을 단단히 조여주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을 주고 받는 너무나도 감사한 사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병원 입원 한달이 되어도 아직 걸음이 불안하고 발음이 어눌하셨다. 병원에선 퇴원하라 하는데, 집으로 와서 재활을 꾸준히 하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고민 끝에 재활전문 요양병원에 한두달 정도 더 입원하시며 전문적인 재활을 받으시도록 했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고 두 달 후 코로나가 터졌다. 초창기 코로나의 공포가 극심하던 시기인지라 본의 아니게 할머니의 입원 기간이 두달에서 1년 반으로 늘어났다. 전화위복이랄까? 할머니는 1년 반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저녁으로 재활치료를 받으셨다. 덕분에 퇴원하시던 때 할머니는 말짱히 걸어서 나오셨다. 똑똑한 발음으로 이야기를 하셨고, 그 어느 때 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셨다.
문제는 치매였다. 초기 치매 진단을 받으신 할머니는 매일 물건을 찾으셨다. 이 서랍, 저 서랍 뒤지시며 옛날 고리짝 적에 입으시던 옷이 없어졌다며 화를 내셨다. 할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동안 내가 할머니 옷을 몽땅 다 갖다 버렸다며 작은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조금 전 한 말을 잊고 내게 생사람을 잡는다며 화를 내셨다. 할머니의 화는 점점 많아졌고, 나는 매일 똑같은 일로 할머니와 싸워야 했다. 원래도 건강염려증이 있으셨지만 치매가 진행되면서 염려증은 더욱 깊어만 갔다. 약을 늘리는 건 괜찮지만 줄이는 건 용납을 못하셨다. 원하는 게 있으시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 까지 며느리들을 달달달달 볶으셨다. 그렇게 2년이 또 지났다. 할머니는 조금 더 독불장군이 되어계시고, 조금 더 어린아이 같아 지셨다. 아침마다 할머니의 당체크를 하고 혈압을 잰다. 할머니의 하루 약을 챙기고, 때가 되면 병원 진료과들을 돌며 약을 탄다. 잘 다니시던 주간보호센터를 안가시겠다고 드러누우시면 센터에서 맘에 안드는 일이 있었던 게다. 선생님들이 소홀하다 느껴졌다던가, 다른 할머님 중 하나가 주목을 받는다 생각하시거나…… 잘 드시던 밥을 갑자기 안드시겠다시며 드러누우시면 그건 내게 불만이 있으신게다. 사고싶은 것이 있으시다거나, 영양제를 맞고 싶으시다거나, 약의 갯수가 적다고 생각될 때이다. 나는 그 때 그 때의 상황을 파악해야 하고, 어떻게든 원하시는 걸 해드려야 했다.
이번에도 나는 돌봄의 최전선에 서있었다. 할머니에 관한 모든 것은 다 나의 몫이었다. 식사, 병원, 약, 목욕은 물론 말벗과 감정쓰레기통 역할도 내 몫이었다. 할머니의 치매 증상 중 부정적 감정을 발산하는 것이 가장 컸기에 매일 반복되는 화와 욕을 받아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진 신랑에게 돌봄을 분담하자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알아서 도와주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신랑은 도와달라 이야기 하기 전엔 하다못해 당체크도 알아서 해주지 않았다. 일요일마다 할머니 손톱, 발톱을 맡아서 깎아드리라 얘기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신랑은, “나 어떻게 깎아야 할지 모르는데~ 그러다 할머니 살도 같이 잘라내면 어떻게 해~” 라고 말했다. 웃으면서 이야기 한 걸 보면 장난도 반은 섞였겠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사실 재밌지도 않았고, 어이가 없었다.
“자기 할머니라고!!! 내 할머니가 아니라 자기 할머니!!!”
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신랑은 허허허 웃으며 “내 할머니가 자기 할머니지~” 라고 받아쳤다.
물론, 우리 신랑이 모든 것을 내게 다 맡기고 나몰라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도 이 사람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몰라서 그러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키워졌기에 정말 몰라 저러겠거니 싶다.
언제가 누가 그랬다. 시어머니 간병을 하던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도 어머니 좀 케어하라고 했더니 그 남편이 말하기를,
“알았어. 이제부터는 내가 어머니 보살필테니까 당신이 나가서 돈 벌어 와~”
나는 이 말이 대단히 폭력적이라 생각한다. 한 집안에 누군가는 경제활동을 해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돌봄의 역할을 해야겠지. 그래, 맞다. 하지만, 남편의 저 말에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동안 단절된 경력을 가진 아내에게 경력을 이어온 자기가 벌어 온 만큼의 돈을 당장 벌어오라는 가당찮은 요구가 들어있다. 아울러, 결국 그러지 못하는 너 자신을 알라는 오만한 무시가 담겨있고, 그러니 돌봄은 네 몫일수 밖에 없다는 단정이 담겨있다. 알았으면 앞으로 내게 돌봄을 강요하지 말라는 협박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남녀차별에 관한, 페미니즘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경제활동을 하는 아내와 집안일을 담당하는 남편의 상황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바깥 일을 하는 누군가와 안의 일을 하는 누군가의 일에 대한 경중이 나뉘고, 그로 인해 돌봄에 있어서 경한 쪽으로 당연히 의무가 떠안겨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과 밖의 일이 아직 우리나라에선 안=여자, 밖=남자의 일인 경우가 훨씬 많기에 여자쪽이 부당하다 느껴지는 사례가 더 많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돌봄은 (돌봄의 대상이 부모든 자식이든) 함께 하는 것이지 돈을 벌지 않는 한 쪽이 짊어지는 게 아니다. 이 간단한 것이, 왜 그리도 힘들고 어려운지…… 하루종일 돌봄의 최전선에서 애를 쓰다 보면 미처 신경쓰지 못한 살림들에 죄책감이 밀려온다. 하루 날 잡아 살림에 좀 신경쓰면 돌봄에 소홀한 것 같아 또 죄책감이 밀려온다. 돌봄의 대상이 아플 때, 화가 났을 때, 평소와 다를 때 돌봄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은 죄인이 된다. 왜 그럴까? 왜 그래야만 할까?
그래서 돌봄에도, 간병에도 마지노선이 필요하다. 돌봄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 돌봄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이 건강해야 돌봄의 대상도 건강할 수 있다. 돌봄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이 행복해야 돌봄의 대상도 행복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가족들과 협정을 맺어야 한다. “여기까지“라는 마지노선이 필요하다. 그저 “살림 나부랭이나 하며 종일 뒹굴거리는 네가 돌봄을 맡는 것이 당연하다”가 아닌, “가족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안에서 일하는 당신이 돌봄의 이 부분을 맡고, 가족의 평안과 편안을 위해 밖에서 일하는 나는 돌봄의 저 부분을 책임지겠다”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은 잠시 넣어두자. “왜 내가 해야해?”, ”왜 그것까지 해야해?“ 이런 마음은 조금만 워워~.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돌봄도 공평할 순 없다. 조금 더 돌봄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이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분담하려 노력한다면 돌봄은 결코 언제 터질지 모를 지뢰를 잔뜩 깔고 있는 DMZ가 아닐것이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돌봄의 최전선에 있다. 하지만 갓 결혼해 겪었던 아버지 간병때와는 조금 달라진 게 사실이다. 할머니는 매일 쇠약해져 가고, 가족들은 돌봄 안에서 주어진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아직 돌봄의 마지노선을 명확히 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경계가 어디쯤이든 더이상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다. 이런 마음이 되기까지 나는 나대로,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힘든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의 방법들을 찾아내고 터득했을 것이다. 비록 요구를 해야 움직이는 신랑일지라도 그 요구에 불평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따라줌에 감사한다. 어머니를 손주에게 맡겼다는 이유로 늘 우리 부부(특히 나)에게 미안해 하고, 고마워 하시는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두 분의 배려와 애정에 감사한다. 츤데레 같고, 다정하기도 한 도련님들과 아가씨에게도 감사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잘 자라주고 있는 내 아이에게도 감사한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면서도 나를 가장 성장시켜 주시는 나의 시할머니, 이입분 여사님께도 마음 깊이 감사, 또 감사드린다.
오늘도 돌봄의 최전선에 있을 누군가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우리의 DMZ에도 꽃이 피고, 봄이 올 거라 믿으며, 부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