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백원담 역)/푸른숲
"사람은 살아가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 하나 내 뜻 한 대로 흘러가 주지는 않을진데...
우리는 왜 이렇게 아둥바둥 그 삶의 물길을 돌리려 애쓰며 사는 것일까?
모질고 질긴 '복귀'라는 노인의 삶을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지어지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무지하고, 우매해 보이는 우리의 어르신들이 어쩌면 역사에 휘둘리고, 시절에 쓸려다니면서도 그 시대의 역경을 모두 딛고 살아남은 참된 삶의 승리자들은 아닐런지....
소설을 읽는 내내 연신 눈물이 흘러내리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음과 동시에 밀려드는 묘한 시원함은 아마 그의 삶에 비해 너무나도 풍족하고 무난한, 그야말로 더할나위 없는 나의 삶을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 하나 내 뜻 한 대로 흘러가 주지는 않을지라도
어차피 한번 왔다 가는 인생,
그래도 열심히는 살아봐야지 않겠는가!
삶의 물길을 돌려놓진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봐야지 않겠는가!
혹여 시리고 모진 시간에 맞닥뜨렸을 때
최선도 다해보지 않고 주저앉아 팔자탓만 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운 되지 말아야지.....
"노인의 뒷잔등과 소의 등이 하나같이 까무잡잡한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저물어가는 두 생명이 그 낡은 판자 같은 밭을 화락화락 갈아엎는 모습이 수면 위로 솟구쳐오른 파도 같았다." -p.18-
"<이 소는 그러니까 결국 이름이 몇 개입니까?>
....(중략).......<소가 자기만 밭을 가는 줄 알까봐, 몇 개의 이름을 불러 그를 속인 것이오. 다른 소도 밭을 갈고 있다고 알면 신이 날 것이고, 그러면 밭 가는 일도 힘이 날 것이 아니겠소.>" -p.19-
"내 딸 봉하가 네 살 때, 늘 마을 어귀로 달려가 할아버지가 똥 누는 것을 구경하곤 했는데, 아버지는 나이가 많으시니까 똥통 위에 앉아 있는 다리가 사뭇 떨렸겠지. 그러면 봉하는 이렇게 묻곤 했다네.
<할아버지, 왜 흔들거리시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시곤 했지.
<바람이 분 것이란다.>"
-p.21-
"나중에 나는 생각했네. '스스로 자신을 위협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모두 운명이다. 옛말에 큰 재난에 죽지 않으면 반드시 훗날에 복을 받는다고 했으니 내 나머지 반생은 분명 점점 나아질 것이다'라고 말일세. 그런 생각을 가진에게 말해주었더니 가진이 이로 실을 끊으면서 나를 보며 말했네.
<복은 안 받아도 좋으니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 있기만 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요.>
나는 가진의 말뜻을 알아들었다네. 아내는 우리들이 앞으로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야. 그녀의 얼굴이 많이 늙은 것을 보고 가슴이 시리게 아파오더군. 가진의 말이 맞았어. 한 가족이 매일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는가?" -p.111-
"길을 걸어가는 동안 정말 견디기 어렵더구만. 나는 일부러 봉하를 쳐다보지 않고 내처 앞으로만 갔는데, 가다 보니 날은 저물었고 찬바람이 쌩쌩 소리를 내며 얼굴로 불어닥치는가 싶더니 목덜미로 파고들었어. 봉하는 두 손으로 내 옷소매를 꼭 잡은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쭈그리고 앉아 두 발을 문질러주자 작은 두 손을 내 목에 얹었다네. 그애의 손은 차가웠고 가만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네. 거기서부터 봉하를 등에 엎고 갔지.
읍내에 이르러 그 집이 가까이 보이자 가로등 밑에 봉하를 내려놓고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네. 우리 봉하는 얼마나 착한 아이였던지 그 순간에도 울지 않고 눈만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볼 뿐이었어. 나는 그애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고, 그애도 손을 펴서 내 얼굴을 매만졌는데, 그애의 작은 손이 내 얼굴을 매만지는 순간 더 이상 그애를 그 집에 돌려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했구만. 그래 봉하를 업고 도로 길을 돌아나왔지. 봉하는 작은 팔로 내 목을 잡고 있었는데, 얼마쯤 가자 갑자기 나를 꼭 껴안았다네. 자기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 -p.128-
"옷을 벗어 소매통을 찢어서 유경이의 눈을 가리고 옷으로 감싸서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는 아버지 무덤 앞에 가서 말씀드렸지.
<유경이가 갈 거예요. 잘 대해주세요. 그애가 살아 있을 때 저는 잘해주지 못했어요. 두 분이 저 대신 그애를 달래주세요.>
유경이가 구덩이 속에 누워 있는데, 보면 볼수록 어찌나 작던지 열세 살이라기보다는 가진이 처음 갓 낳아놓았을 때의 모습처럼 조그맣더군. 손으로 흙을 퍼서 유경의 몸 위에 덮고 작은 돌로 표시를 해놓았는데, 행여 돌이 그애의 몸을 아프게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 -p.199-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내 옷은 흥건히 젖어버렸고, 가진은 울면서 말했지.
<유경이가 이젠 이 길을 달릴 수가 없어요.>
구불구불 읍내로 통한 작은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달빛만 처연하게 길 위를 내비추는데, 소금, 하얀 소금이 한가득 흩어져 있는 것 같았어." -p.204-
"집에 돌아와 이희는 봉하를 침대에 누이고 자기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봉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지. 이희의 몸은 점차 동그마니 오그라드는데, 그런 모습을 눈뜨고는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얼굴을 돌리고 벽에 그려진 그와 봉하의 그림자만 바라보았네. 그러나 그 또한 기가 막혀 볼 수가 없더군. 그 두 그림자는 검고 커다랐는데, 하나는 누워 있고, 하나는 꿇어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어. 오직 이희의 눈물만이 움직이고 있어서 방울방울 커다란 검은 점이 두 사람의 그림자 사이에서 굴러내리는 것을 응시할 따름이었네." -p.259-
"<생각해봐. 보러 오지 않는 건 그렇다 치고, 나는 어린아이니까 길을 잘 모르잖아. 그러니 네가 나를 데리고 돌아가야지.>
<네 아빠는 너를 보러 올 수 없어. 나도 너를 데리고 돌아갈 수가 없고. 네 아빠는 죽었거든.>
<나도 아빠가 죽었다는 건 알아. 하지만 깜깜해졌는데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잖아.>
나는 그날 저녁 이불 속에 누워서 녀석에게 죽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를 말해주었네.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곧 땅에 묻히는 것이고, 살아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고 설명해 주었지. 녀석은 처음에는 무서워서 덜덜 떨더니, 그 뒤로는 더 이상 제 아비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피 울었다네. 고근이의 작은 뺨을 내 목 위에 대니, 뜨거운 눈물이 내 가슴으로 흘러내렸지. 고근이는 그렇게 울다가 울다가 잠이 들었다네." -p.279-
"나는 안다. 황혼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리라는 것을. 나는 광활한 대지가 바야흐로 결실의 가슴을 풀어헤치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부름의 모습이다. 여인이 자기 아이들을 부르듯, 대지가 어두운 밤이 내리도록 부르고 있는 것이다."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