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2021-01 올가 토카르추크/최성은 역(민음사)

by 소연


실체가 없는 신의 영향력은 실체하는 모든 생물에게 미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 인간만이 신의 영향력 아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실체하는 모든 것들의 신이 되었다.


이름마저 생소했던 이 작가는 무려 노벨문학상 수상자란다.

사진을 보니 꽤 젋다.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탔다니 더더욱 그녀의 소설이 궁금해진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제목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길고 생소해 잘 외워지지도 않는 제목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묵직한 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쟁기 끝에 탁! 하고 걸릴 것만 같다.

알고 보니 작가가 각 챕터의 초입마다 인용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들 중 한 구절이란다.

역시.

시인의 언어는 다르구나.


처음엔 그저 동물권을 다룬 소설이겠거니 했다.

그래서 뒤의 결말부분을 읽을 때 나름의 반전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듯 하다.

찾아보니 추리소설이란다.

아, 그렇구나.

다 읽고나서야 알았다.

사실 기-승-전 까지는 그냥 소설이었다.

그러다 '결'로 치달으며 급격하게 추리소설로 변모하였다.

나에겐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점성학의 혼돈 속에 방황하다 뚜렷한 주제의식의 빛을 본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인간이 스스로 생태계의 왕이 되기 전,

모든 생명체가 공동체였던 그 긴 시간동안은

철저한 약육강식에 의해 나름의 질서가 유지되고, 개체수가 정리, 보존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에 의해, 오직 인간이 정한 필요유무, 유희, 이익을 위해 개체수가 정리되고 결정된다.

누가 인간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했나?

생태계 자연법칙에 대한 인간의 개입이 불 사용을 시작한 호모 에렉투스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맨 몸으로 공평하게 마주서면 한 입 거리도 안 될 인간을 동물들은 언제까지 두고보기만 할까?


어쩌면 복수는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재해와 바이러스.....

이미 오래 전 부터 자연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또 경고했는지도 모른다.

신 놀음에 빠져버린 인간은 그 경고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지도 모른다.

그 옛날, 신이 물과 불로 세상을 심판하고 걸렀듯

인간도 그럴 수 있으리라 믿는지도 모른다.


결국엔 인간도 똑같은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에 불과한 것을....

자연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속한 작고 작은 나사 하나에 불과한 것을......






세상의 미세한 조각들은 평범한 사고방식으로는 꿰뚫기 어려운, 복잡한 연결망의 우주에 의해 나머지 다른 조각들과 견고하게 묶여 있다. 그렇게 세상은 작동한다. 마치 정교한 일본제 자동차처럼.
p.87


나는 고통이 빚어낸 유령이다. 어떠헥 하면 좋을지 막막할 때마다 나는 목에서 사타구니까지 번쩍이는 지퍼를 채우고 있다가, 그것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내리는 상상을 해 본다. 그러고는 팔에서 팔을 빼고, 다리에서다리를 빼내고, 머리에서 머리를 떼어 낸다. 내 몸에서 몸을 빼내자, 그 거죽이 마치 낡은 옷처럼 내게서 흘러내린다. 그 안에 담겨 있던 나는 훨씬 더 연약하고 섬세하며 거의 투명하다. 나는 해파리처럼 희뿌연 우윳빛의 형광색 몸을 갖고 있다.
이것은 내가 나를 안도하게 만드는 유일한 환상이다. 그렇다. 그 순간 나는 자유롭다.
p.98


"어떤 악마가 이 혐오스러운 공허함을, 이 영혼을 오싹하게 만드는 허공을 만들었을까?"
p.106


"다들 그저 멧돼지 한 마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죠." 나는 연설을 계속했다. "하지만 끝없이 쏟아지는 종말론적인 폭우처럼 날마다 우리의 도시에 무차별 제공되는 도살된 고기들의 범람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폭우는 살육과 질병, 집단 광기, 정신의 혼미와 오염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심장도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견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복잡한 정신세계는 인간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생겨난 것입니다. 진실을 환상이나 덧없는 말장난으로 포장해서 그것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는 것이죠.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찬 감옥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자에게 고통을 가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다들 제 말 듣고 계시죠?"
p.157


봄은 단지 짧은 막간일 뿐이고, 그 뒤에는 강력한 죽음의 군대가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이미 도시의 성벽을 포위하고 있다. 우리는 포위된 상태로 살고 있다. 인생의 한순간을 잘게 쪼개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에 질려 숨이 막혀 버릴지도 모른다. 몸 안에서 끊임없이 분열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머지않아 병을 앓고, 죽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날 것이며, 그들에 대한 기억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점점 사라질 것이고, 결국엔 옷장 속의 옷 몇 벌,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된 누군가의 사진들만 남을 것이다. 그렇게 가장 소중한 추억은 흩어져 버리고,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자취를 감추겠지.
p.179~180


모든 앞날이 미지수이고, 도래하지 않은 모든 미래는 공기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쉽사리 파괴될 수 있는 신기루처럼 불투명하다.
p.230


태양을 지날 때 불꽃은 눈이 먼다.
p.302


"그거 아세요? 우리가 때로는 스스로 창조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무엇이 나쁜지 좋은지도 직접 정하고, 자신을 위해 의미의 지도를 손수 그리면서요. 그러고 나서는 자신이 고안해 낸 뭔가를 쟁취하려고 평생을 아등바등 살아갑니다. 문제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버전을 갖고 있어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죠."
p.309


정신은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방어 체계다. 우리 뇌의 용량이 어마어마하다지만, 정신의 주된 임무는 정보를 걸러 내는 것이다. 지식의 무게를 모조리 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입자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p.310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엉겅퀴에게는 생명권이 없는가? 창고의 곡식을 훔쳐 먹는 쥐는 또 어떤가? 꿀벌과 말벌, 잡초와 장미는?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더 못한지 과연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 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용한 것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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