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난다)
처음 박준 작가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접했을 때, 나는 적잖이 흥분했고, 몹시 흔들렸다. 서정주, 윤동주, 도종환, 산골 소녀 옥진이의 시를 가슴에 품고 다니던 시절에 맞닥드리던 시와 요즘의 시는 사뭇 다르기에,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이런 류의 시는 더이상 만날 수 없는겐가 싶어 시집을 끊은 지 오래였기에, 박준 작가와의 만남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도대체 그 '류'가 무엇이기에 이리도 이 작가의 시에 다시금 설레느냐 묻는다면, 단순히 개인적인 글의 취향이라 해야하려나?
너무 어려워 읽는 내내 사전을 옆에 끼고 봐야 하는 글은 싫고, 그렇다고 해서 술술 읽히다 못해 의미마저 날아가 버리는 가벼운 글도 싫다. 너무 딱딱해서 한 페이지 읽는 데 십년은 지난 것 같은 글도 싫고, 그렇다고 너무 달달하고 예쁘기만 한 미사여구와 온갖 눈부신 비유 가득한 글도 싫다.
술술 읽히되 읽는 중간중간 멈추어 생각하고, 마음 가득 고민하고 상상하게 하는 글, 그래서 쉬이 읽히는 반면 완독에 시간이 걸리는 책. 닰살스럽지 않은 비유와 생각지 못한 은유로 쓰인 시집. '아, 그렇구나....'가 아닌 '아, 나도 그랬는데....' 하게 되는 책. 덮고 나서 완독의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책 보다는 두번, 세 번 읽어도 아직 완독하지 못한 듯 한, 내년에, 5년 후에, 10년 후에 다시 펼쳐 읽고 싶은, 영원히 시원한 완독을 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책이 좋다.
별스럴 것 없지만 까탈스럽지 않지만도 않은 나의 책취향에 딱 들어맞는 작가를 만나면 어느 새 나는 이 새로운 취향저격자의 책을 싹 긁어모으는 호더가 된다.
박준의 시집을 읽고 나는 오랜만에 호더의 기운이 발동됨을 느꼈다. 그의 글은 담담하지만 가슴이 저릿했고, 너무나도 일상적이지만 굉장히 특별했고, 하나하나 소소하지만 아주 크게 다가왔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글은 딱! 내 취향이다.
시인이 쓴 산문은 연과 행만 생략됐을 뿐이지 그 자체로도 시였다. 함축을 풀고, 마침표를 찍고, 끊어진 문장을 이었을 뿐인데도 여전히 글자와 글자 사이에 운율이 춤추고 감정을 건드리는 선율이 울려퍼졌다. 작가가 시인임을 잊을 만 할 때쯤이면 어김없이 "나는 사실 시인이라오" 라고 속삭이듯 짧은 시를 페이지 중간중간 읊조렸다. 그 짧은 시들이 또 나의 마음을 내 추억 어딘가로 인도해 울컷하게 만들고 나면, 시인은 다시 조곤조곤 문장을 늘이고 마침표를 찍으며 이야기를 내뱉는다. 그의 이야기 어느 하나 표시하고 싶지 않은 곳이 없고, 어느 문장 하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곳이 없어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어느 문장을 옮겨야 하나? 어느 문장을 외쳐야 하나?
책을 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 괜시리 어깨에 손을 올리게 된다. 나의 취향과 같은 누군가를 이렇게 종이로, 글자로, 문장부호와 여백으로 만나게 되면 꿈에 그리던 오랜 벗을, 너무나도 잘 맞아 서운할 것 없고 아쉬울 것도 없는 완전 찐친을 만난 것만 같아 가슴이 또 뜨끈해온다.
올 해, 박 준이라는 벗을 만나 나의 1년이 또 얼마나 행복할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