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딸이 대학입시를 앞두고 수시 원서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아침에 딸을 조수석에 태우고 등교를 하던 길이었습니다. 딸의 표정이 어두워 보이길래 “원서작성을 앞두고 힘든가보네.”라고 말을 건네자 “엄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라고 답을 하였습니다. 원서접수를 앞두고 선택지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가다가 갑자기 딸이 말했습니다.
“엄마는 좋겠다. 성공해서.”
순간 저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습니다.
“유은아, 금방 뭐라고 했어?”
“엄마는 좋겠다고~ 성공해서!”
조금은 퉁명스러운 어투로 다시 말했습니다.
예상치 않은 딸의 말에 다시 물었습니다.
“유은이는 엄마가 성공했다고 생각해? 엄마는 한 번도 엄마가 성공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아니, 엄마 너무하네. 엄마가 성공한 게 아니면 뭐야?”
“유은아, 엄마는 진짜 엄마가 성공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놀랍고 궁금하네.”
“엄마, 엄마는 친구들 엄마랑 달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즐겁게 일하잖아. 나는 내가 뭘해야 좋을지 아직도 모르겠어.”
급식당번을 자원해서 해주지도 못했고 학교 행사가 있는 날이면 반차를 내서 급히 가서 잠깐 보고 오는 것이 제가 해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엄마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하는 일들은 거의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못다 한 일은 집으로 가져와서 아이들이 잠든 뒤에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일찍 자지 않는 날에는 못다 한 저의 일 때문에 아이들을 다그치기도 했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는 대구에서 수업을 마치고 오면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아빠랑 잠든 모습을 보며 미안해하던 날들이 많았습니다.
주말에는 과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딸들은 거실에서 놀게 하고 저는 식탁에 앉아서 딸들이 노는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제 과제를 하기 바빴습니다. 둘이서 잘 놀다가 싸우면 아이들을 야단친 날도 많았습니다.
대학교 수시 원서 접수로 인해 고민스러운 딸의 입에서 나온 “엄마는 좋겠다. 성공해서.”라는 말이 나의 마음에 깊게 새겨졌습니다. 저는 딸들에게 늘 미안한 엄마였습니다. 일하고 공부를 하며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엄마들에 비해서 해준 것이 적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딸이 생각하는 성공이 그런거라면, 그리고 엄마를 보며 그런 말을 해주는 딸을 보며 미안한 마음 가득하지만 딸의 말을 나 스스로 인정해도 될 것 같았습니다.
몇 달 전 싸이월드가 복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에 싸이월드 앱을 다운받아서 들어가 보았습니다.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시절이 마침 제가 결혼해서 딸들을 낳고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는 시기였습니다. 그 사진첩에는 너무나 이쁜 딸들의 사진이 가득했습니다. 혼자서 그 사진을 보며 웃기도 하고 추억에 잠겨 있는데 둘째가 옆에 와서 핸드폰을 보더니 “엄마, 이게 나야? 너무 귀엽네.”라며 핸드폰을 뺏어서 혼자서 열심히 사진들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싸이월드 사진첩 속에 가득한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한동안 자뻑의 시간에 빠져있던 둘째가 갑자기 던진 한마디에 깜짝 놀랐습니다.
“엄마, 나 충분히 행복했었네.”
“희은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엄마, 나 어릴 때 엄마 아빠랑 여기저기 놀러도 많이 갔었네. 엄마, 그리고 언니랑 나랑 입고 있는 옷이 너무 이쁘네. 와~~엄마가 신경 많이 써줬네.”
둘째의 그 말에 딸들의 어린 시절, 그 시절의 나를 돌아보며 딸에게 물었습니다.
“희은아, 저 사진 속에 있는 집에 살았을 때 엄마는 너희들한테 미안한 게 많은데, 엄마가 일하고 공부하느라 너희들과 많이 못 놀아 줘서.”
“맞아. 엄마. 나랑 언니는 거실에서 놀고 엄마는 맨날 식탁에서 공부했던 것 같다. 그래도 사진 보니 언니랑 나랑 거실에서 완전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엄마의 마음에는 미안함으로 남아 있는 그 시절의 사진을 보고 '충분히 행복했네.'라고 말하는 딸을 보며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미안함은 그저 엄마의 몫이구나. 너희들은 그때의 엄마를 다르게 기억하고 있구나.'
혼자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엄마, 엄마가 그때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또 공부도 해서 지금의 엄마가 있는 거 아니야?”라고 시크하게 한 마디를 던지는 딸을 보며 저의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딸들이 생각하는 성공이 그런 거라면, 딸들의 말처럼 지금의 나에게 성공했다고 인정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안함으로 가득했던 시절을 충분히 행복했다고 말을 한다면 그 시절 아이들의 엄마로 덜 미안해해도 되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엄마로서의 시간을 일하며 공부하며 보내며 늘 미안함으로 가득했던 마음에서 벗어나 이제는 다 큰 딸들과 여자대 여자로서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유은아, 희은아! 충분히 행복했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지금의 엄마를 보고 성공했다고 말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