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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ish Jan 02. 2020

사과하지 않는 사회

행위와 의도의 무관함과는 무관한 사과의 필요성

사과하지 않는 사회.    

 


창고형 마트에서 겪은 일이다.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라 번잡한 곳에 취약한 나는 그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지 않기로 작심하고 간 터였다. 구매할 제품만 딱딱 집어 들고는 민첩하게 계산대를 향했다. 계산을 마치고 푸드코트에서 피자 한 조각까지 클리어한 나는 오늘의 퀘스트를 끝냈다는 뿌듯함을 누리며 출구로 향했다. 내가 방문한 곳은 유료 회원제로 운영되는 외국계 창고형 마트로, 출구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직원이 “영수증 확인”을 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출구 에스컬레이터 앞에는 항상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비교적 사람이 적은 편이었던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기줄에 몸을 맡기고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그때, 등 뒤로 툭툭 뭔가가 나에게 부딪혀왔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아주머니가 커다란 카트를 내 허리 켠에 바짝 붙여놓은 채로 긴 대기줄 사이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비집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내가 조금씩 앞으로 나갈 때마다 ‘새치기를 하겠다!’는 그녀의 강한 의지는 쇳덩이의 차가운 감촉과 묵직한 무게감이 되어 나의 허리 부근에 자꾸 전달되었다. 등 뒤로 몸을 돌려 내 허리춤에 자꾸 카트 붙여대는 그녀로 인해 마침내 나의 허리가 꺾이는 상황까지 되자 나는 몸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맞추어 ‘카트 좀 안 부딪히게 조심해주세요’의 메시지를 담은 간절하면서도 살짝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었다. 하지만 간접적인 시그널 속 안에 있는 메시지는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 알고도 개의치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 뒤로도 꾸준히 카트를 밀어대는 통에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지만 곧 에스컬레이터에 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을 동력 삼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두 줄로 세워졌던 줄이 에스컬레이터 입성과 함께 하나의 줄로 모아지고 그 과정에서 그녀와 나의 사이에는 카트 하나, 중년의 부부 두 사람만큼의 틈이 생겼다. 미세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자극 때문이었는지, 불쾌한 기분이 만들어 낸 환상통인지 허리 한 부분이 욱신욱신 아파와 그 부분을 오른 검지와 중지에 약지까지 동원하여 통증을 느끼는 부위를 문지르고 있던 그때.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아줌마 거 되게 치네. 왜 자꾸 밀어요?”     


내 뒤에 선 중년 부부 중 남성분께서 조금 전까지 내 허리에 카트를 바싹 부쳐대던 아주머니를 향해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허리 공격의 대상이 나에게서 그로 옮겨진 것 같았다. 그의 목청이 어찌나 우렁찼는지, 딱히 목소리를 높인 것 같지 않았음에도 - 적어도 그 단계에서는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 많은 사람이 이목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갑작스럽게 타인의 음성과 시선들이 쏟아지자 그녀는 당황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두 눈을 껌뻑이며 서있었다.     


“거, 카트로 밀지 좀 마세요 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힌 상태에서 자신을 나무라는 말 한마디가 더해졌고, 아주머니의 얼굴은 빠르게 상기되었다. 그때부터는 아주머니도 그저 껌뻑이던 눈을 흔들림 없이 아저씨에게 고정시키고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밀긴 누가 밀어요?”     


전쟁의 서막이었다. ‘밀긴 누가 밀었냐’는 아주머니의 한 마디는 옆에 가만히 상황을 좌시하던 아내까지 참전하게 이끌었다.      


“아니, 아줌마. 지금 계속 카트로 밀었잖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그러더구먼.”      


조금씩 상승되는 데시벨의 우리 주변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결제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캐셔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민 거 봤어요? 민 거 봤냐고요?”     


그녀의 문제적 발언은 또 한 번 아저씨의 감정을 자극했고, 아저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소리를 쳤다.     


“아니, 그럼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뒤에 부딪히니까 부딪힌다고 하지. 가만히 있는데 부딪힌다고 말하겠어요?”     

“..아니..제ㄱ..”     


쩌렁쩌렁, 어찌나 소리가 컸는지 아저씨의 성난 목소리가 그 넓은 공간을 가득 메웠고, 이에 질세라 카트를 민 아주머니가 반격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주어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아저씨 오른편에 서있던 아내 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 문장을 막아섰다.      

그냥 사과하면 좋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왜 자꾸 이런 말 저런 말 더해서 서로 기분 상하게 하세요?


“아줌마! 그냥 미안하다 하면 될 일을 왜 자꾸 아니라고 해요? 그냥 미안하다 하고 부딪히지 않으려고 하면 되지 왜 말을 그렇게 하냐고요!! 그냥 사과하면 좋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왜 자꾸 이런 말 저런 말 더해서 서로 기분 상하게 하세요?”    




그렇다. 사실 이 분란은 사과 한 마디면 쉽게 무마될 일이었다. 만일, 미안하다는 말이 그 아주머니 입에서 나온 가장 첫마디였다면, 그날의 그 사건이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되어 이 글의 소재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상 속에 일어났던 사소한 일로 잠시 기억되다 잊혔을 일이었다.      


본질을 꿰뚫는 말에 아주머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에스컬레이터가 5층 주차장으로 다다를 때까지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중년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소연하고 맞장구를 치는 식으로 종전(從前)의 해프닝에 대한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지만, 카트를 밀던 아주머니는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최대한 아래로 떨어뜨리며 그 불평을 애써 무시했다.               



잘못된 행동 혹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했을 때,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유효한 사회적 원칙이다. 이것은 사건이 분쟁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주며 대립을 줄이고 화해를 이끌어내는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해준다. 사과는 관용과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방법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점점 이 중요한 미덕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의 발을 밟은 후, 길을 걷다가 어깨가 부딪혔을 때, 지하철 반동으로 몸이 쏠렸을 때 발휘된 생존 본능으로 타인의 팔을 무의식적으로 잡았을 때, 전화를 잘못 걸었을 때.

일상에서 흔히 발생하는 이러한 해프닝들을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뿐임에도 요즘에는 이 말을 듣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 한 마디면" 하고 운을 떼면 "천냥 빚도 갚는다"라는 문장이 자동으로 완성이 될 정도로 "따뜻한 말, 진정한 사과"가 가진 힘은 우리 안에 인이 박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말을 하는 것을 꺼려한다.

왜 그럴까.


상황이나 그 속에 있는 고유한 사정과 이야기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지만, 공통으로 읽히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 바로, 행동의 결과와 행위자의 의도가 무관하다면,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의도가 없었을 때, 혹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일어났을 때, 사과의 의무 의식에서 자신을 쉽게 해방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지하철이 덜컹거려서 밟은 거지. 당신의 발을 밟으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부딪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거리가 이렇게 복잡한데 어깨 좀 부딪힐 수도 있지. 누구는 부딪히고 싶어서 부딪혔나.'


'버스가 갑자기 멈춰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앞사람 팔을 붙잡아버렸네. 버스가 잘못했네. 갑자기 브레이크만 안 밟았어도 팔을 잡았을 이유가 없잖아.'


'사람이 착각해서 전화번호 잘못 누를 수도 있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이런 류의 생각들은 '남에게 해를 끼칠 의도는 없었으니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데, 우리는 이런 자기 합리화를 통해 자신의 행동으로 일어난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악의가 없었다면 혹은 의도가 선했다면, 과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잠시,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하철에서 승하차문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 손을 뻗어서 좌석 끝 한 기둥을 잡고 있는데 지하철이 커브를 돌면서 반동으로 당신의 몸이 오른쪽으로 쏠렸다. 왼쪽에 서서 대기하던 사람의 몸도 순식간에 당신의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졌고 그 사람이 매고 있던 백팩이 당신의 왼팔을 퍽- 치고 말았다. 꽤 부피가 있고 무거운 물건이 들어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 백팩에 맞은 자리에 욱신욱신 고통이 몰려왔다. 하지만 백팩의 주인은 '지하철 운전을 뭐 이렇게 하냐'는 말을 자신의 뒤에 서있던 친구에게 하는 것 말고는 당신에게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정거장에서 하차해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커브를 돌다 보면 관성력에 의해 몸이 반대 방향으로 쏠리는 것은 자연현상이며 여기에 기관사의 의도가 개입될 여지는 없다. 백팩 주인 역시, 백팩으로 누군가를 치고 싶은 욕구는 없었다. 단단한 물체로 당신을 아프게 할 의도는 누구에게도 없었지만, 그러나 접촉면에 고통을 느끼는 분명한 피해자(당신)가 존재한다. 피해 사실이 분명히 있음에도, 단지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이유로 직접적인 가해자로부터도 사과를 받을 수 없다면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피해자가 있음에도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이런 모습은 결코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의도가 있건, 없건, 우리의 행동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했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끼쳤다면, 사과하는 것이 맞다.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잘못을 인정하는 것. 진정성 있는 사과하는 것.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물리적 배상이든 정서적인 보상이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어른다움의 모습이 아닐까. 점점 이 사회가 '사과'에 박해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몇 자 끄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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