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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ish May 09. 2020

보편타당한 마음

정말 이상한 건 나일지도.

쓰레기 문제로 옆집과의 갈등이 있은 지 꽤 오래되었다. 옆집은 단독형 주택으로 몇 년 전에 신혼부부가 이사를 온 모양이었다. 요즘이야 뭐 이사를 왔다고 집집마다 떡을 돌리며 인사를 하는 시대가 아니다 보니, 정확히 언제 이사를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오며 가며 마주쳤을 때에 연령대가 그리 높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신혼부부"였다고 추정을 할 뿐이다. 갈등이 처음으로 터진 것은 옆집에서 자꾸 우리 집 문쪽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면서였다. 우리 골목길에 있는 모든 집은 자신이 거주하는 건물의 문 앞쪽에 쓰레기를 버리는 반면, 그 집만은 꼭 자리 집 문이 아닌, 조금 떨어진 우리 집 문에 가까이 음식물 쓰레기를 투기했다. 내 집 쓰레기야 나의 문 앞에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다지만, 남의 집 쓰레기는 또 다른 문제였다. 출퇴근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옆집 쓰레기로 화가 났던 아빠가 결국 옆집 부부의 아내에게 항의를 했다.


"쓰레기 본인 문 앞에 버리세요."


"여기도 저희 집 앞인데요."


" 아니, 지금 이 골목집들을 다 봐보세요. 다 자기 집 문 앞에 버리잖아요."


여자의 논리는 이것이었다. 자신의 집 문 앞은 아니지만 어쨌든 자기 집 건물 앞부분에 버린 것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 옆집과 우리 집 사이 그 중간 어디쯤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니, 남의 집 음식물 쓰레기가 이렇게 우리 집 앞에 있으면 집 들어올 때마다 얼마나 보기 싫고 짜증이 나는 줄 알아요?"


"저희도 쓰레기 문제 때문에 아주 골치 아파요. 자꾸 저희 집 앞쪽에 쓰레기를 버리는데.. "


"누가 쓰레기를 버려요?"


"아니, 사람들이 먹다 남은 음료 담긴 페트병이랑 과자 봉지 같은 걸 자꾸 버리고 가는데 제가 얼마나 짜증 나는 줄 아세요?"  


어른들의 싸움에 - 비록 그 여자와 나의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보이긴 했지만 - 웬만해선 끼지 않는 것이라 배워 자중하려 했지만, 나는 여자의 발언이 조금 이상하게 들려 참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머니. 그 쓰레기 버리는 사람들 저희 아니에요."


"아니, 집 앞에 쓰레기가 쌓여 있다니까. 페트병도 막 버리고."


"지금 계속 말씀하시는 그 사람들 저희 아니라고요. 저희는 페트병은 재활용 쓰레기에 넣어서 같이 버리는데 그걸 왜 저희한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저희는 지금까지 저희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 저희 집 문 앞에서 버렸고요. 음식물 쓰레기는 음식물 쓰레기 통 안에 넣어서 음식물 쓰레기 내놓는 날에 버리고 있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신경 써서 저희 쓰레기는 저희 집 문 앞쪽에 버릴 테니까, 아주머니도 아주머니 댁 음식물 쓰레기는 댁 문 앞에 버려달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여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지만 기어코 앞으로 음식물 쓰레기통을 자기 집 문 앞에 놓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상대가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님을 알고는 우리도 더 길게 말하지 않고 걸음을 돌렸다.




옆집은 그 뒤로도 종종 음식물 쓰레기를 ‘네 땅도 내 땅도’ 아닌 중간 지점 어딘가에 버렸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기 기저귀가 담긴 쓰레기도 함께 그 지점에 버리기 시작했다. 갓난쟁이 아기를 키우는 집은 우리 골목에 그 집 하나뿐이라 다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고 했는데, 쓰레기로 인한 갈등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옆집 건물 앞에 분류되지 않는 쓰레기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상태로 보아, 행인들이 지나가면서 버렸거나, 배달 음식을 먹고 정리하기 귀찮아 그냥 투기한 것들로 보였다. 시뻘건 떡볶이 국물 자국이 그대로 굳어진 플라스틱 용기나 미쳐 뜯겨나가지 못한 작은 살점들이 붙어있는 닭뼈와 분리된 튀김옷들이 담겨있는 치킨 상자 등이 너저분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쓰레기를 뭐 이렇게 버려.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갔던 나는 다음 날 아침 펼쳐진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랍게도 옆집에 쌓여있던 쓰레기가 우리 집 - 완전한 우리 집 영역 - 쪽으로 옮겨져 있는 것이었다. 마음속에서 깊은 빡침이 솟구쳐 올랐다. 막무가내식인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지?

아무리 자기 집 앞에 골칫거리가 쌓여있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타인의 집 앞에 쓰레기를 쓰윽 밀어 놓는 그 마음이 몹시도 밉살스러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상한 버릇 하나를 갖게 되었다. 외출할 때, 옆집 앞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으면, 핸드폰 카메라를 열어 사진을 찍어 증거로 남겨두기 시작했다. 집에 올 때 보면 그 쓰레기들은 발이라도 달린 것인지 우리 집 앞으로 옮겨 있었다. 뭐 이런 경우 없는 사람들이 다 있냐며 분개했지만, 생각해보니 개운치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우리 집 앞에 버릴 것이었으면, 애초에 우리 집 앞에 놔뒀을 텐데 옆집 앞에 있다가 우리 집 쪽으로 자리를 옮겨진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조금 생각해보니, 어떠한 상황인지 이해가 되었다.


삼 년 전부터 우리 골목에 작은 평수의 많은 다세대주택이 들어서면서 근처 대학교에 다니는 자취 학생들이 늘었는데 버려지는 쓰레기의 모양새를 보아하니 꼭 자취하는 학생들이 시켜먹을 법한 음식물 - 컵라면, 치킨 상자,  떡볶이 용기, 일인용 도시락 등 - 들이 주를 이루었다. '근거도 없이 대학생들을 의심하면 쓰나'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학기가 시작되면 쓰레기 양이 많아지고 방학 시즌에 쓰레기 양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 영 "근거 없는 의심"은 아니었다. 어쩌면 쓰레기 투기의 원범인은 옆집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범인이 따로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니 우리 집으로 쓰레기를 미는 그 심정이 이해가 잠시 되었지만, 생각해보니까 또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그걸 왜 우리 집에 미는 건 또 뭐야?


제가 어이가 없어서 웃습니다. (출처:무한도전 캡처)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나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쓰레기차가 차마 수거하지 못할 정도로 무분별하게 투기된 쓰레기는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은 쓰레기를 본 사람들이 너도나도 쓰레기를 그 자리에 쓰레기를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은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의 "깨진 유리창 이론" 사실로 증명되는 현장이었다. 도저히 두고  수가 없어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불법쓰레기 투기 신고를 넣었다. 주민센터에서는 "투기한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증거품이나 사진이 있으면 보내줄 것을 당부하며 쓰레기를 수거해 갔지만, 매번 증거도 없이 쓰레기 수거를 요청하기도 겸연쩍어 웬만한 것은 내가 직접 정리를 했다. 그런데 내가 버리지 않은 쓰레기를 내가 정리하는 횟수가 쌓이다 보니 억울함이 커져갔다. 점점 화딱지가 났다. 사람들이 어쩜 이렇게 이기적일  있지?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쓰레기를 투기하기 시작했다. (출처:Unsplash)


불만이 쌓이자 분노에 화살은 "옆집"을 향했다. 오랜 시간 축적된 괘씸함에 나는 잠시 나를 놓았던 것 같다. 옆집이 우리 집 쓰레기가 아닌 쓰레기를 우리 집 쪽으로 밀 때마다 나도 옮겨진 쓰레기를 다시 옆집에 밀어놓았다 (스스로가 자랑스럽지 않다). 판단의 기준은 쓰레기를 본 시간대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옆집에 놓여있던 쓰레기가 저녁만 되면 마법처럼 우리 집 앞으로 옮겨져 있을 때, 나는 그 쓰레기들을 다시 원래의 상태로 옮겨두었다. 이제 출퇴근을 할 때 옆집과 우리 집 건물 앞의 비포 앤 애프터 사진을 찍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자신이 옮겼던 쓰레기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자 옆집은 불쾌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나마 그전까지는 가지런하게 옮겨져 있었던 쓰레기는 이제 '누가 발로 찬 것' 같은 모습으로 제멋대로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쓰레기봉투가 터져 안에 있던 내용물이 쏟아져 나올 때도 있었다. 옆집이 옮겨 놓은 쓰레기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고, 옆집은 또다시 그 쓰레기를 발로 차 우리 집 앞으로 밀어놓는, 승자 없는 핑퐁게임은 몇 주째 이어졌다.




그렇게 대면하는 일 없이 몇 주째 이어지던 자존심 싸움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잠시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어느 날. 외출 전까지만 해도 옆집 앞에 있던 쓰레기들이 우리 집 앞으로 놓인 것을 본 나는 쓰레기를 외출하기 전 상황과 동일한 모습으로 돌려놓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택배 올 거니까 챙겨달라"는 언니의 메시지가 떠올라 급하게 현관문 밖으로 나가 살펴보았지만, 배달된 택배가 없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택배기사가 혹시 대문 앞에 놔두었나 싶어 대문 밖으로 나갔을 때, 쓰레기 더미를 바라보고 있는 옆집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남자는 성이 난 것으로 같았다. 허리에 손을 얹고 쓰레기 더미들을 째려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박제라도 된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뜨거운 분노가 그를 얼게 만든 것 같았다. 나는 대문과 우편함을 살펴 "택배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집 안으로 돌아왔지만, 이내 내 마음은 불안해졌다. 한눈에 보이는 그의 분노가 두려웠다기보다 또다시 마법처럼 우리 집 앞으로 쓰레기를 밀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대문 밖으로 나갔을 때, 보이는 광경은 달라져 있었다. 남자는 이제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핸드폰 플래시 불빛을 켜고는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증거"를 찾고 있었다. 투기범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만한 "우편물"이나 택배 상자 위 "운송장 출력지" 따위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남자는 행위에 열중해있었다. 나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쓰레기를 투기하지 않았기에 실제로도 거릴 낄 것이 없었다) 태연하게 우리 집 쓰레기가 가지런히 놓인 우리 집 대문과 옆집 문 앞에 놓인 쓰레기를 한 프레임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그새 어둑해진 탓에 내 핸드폰에서도 팍-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다음 날 쓰레기 더미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옆집 건물 벽면에는 쓰레기 무단 투기 경고 판넬이 부착되어 있었고 골목 집집마다 쓰레기 배출일 안내문이 붙여져 있었다. 옆집의 신고로 주민센터에서 다녀간 모양이었다. '누가 누굴 투기범으로 의심하나' 싶은 고까움이 일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무단 투기 경고 판넬"이 제 역할과 기능을 잘 수행하여 옆집도 우리 집도 쓰레기로 인해 고통받는 날이 없으면 싶었다.




안타깝게도 경고 판넬은 나와 옆집과 주민센터의 소망에 부응해주지 못했다. 경고 판넬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접착력이 심하게 약한 것이 문제였다. 벽에 고정되지 못하고 바닥에 흉물스럽게 널브러진 판넬은 그것이 온몸으로 막고 싶었던 무단 투기된 쓰레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퇴근길에 옆집 앞에 방치된 판넬을 바라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호기롭게 경고문을 붙였는데 결국 저렇게 되는 건가. 옆집도 골치 아프겠구먼.


쓰레기를 우리 집 쪽으로 슬쩍 밀어 자신들의 문제를 우리 집에 떠넘겨왔던 옆집에 약간의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판넬로 인해 다시 또 골머리를 썩을 것이 퍽 안쓰러웠다. 잠깐 동네를 찾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하였다가 돌아오는 길. 나는 마주한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흉물이 되어버린 판넬이 우리 집 건물 앞으로 옮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사람들 진짜 안 되겠네. (출처 : Unsplash)


내 이웃의 뻔뻔함에 기가 찼다. 그전처럼 쓰레기를 살짝 밀어 우리 집 건물 앞에 두는 수준이 아니었다. 옆집과 인접해 있는 면이 아닌 반대쪽 벽면에 판넬이 세로로 세워져 있었다. 이전의 뻔뻔함이 그냥 커피였다면, 이건 티오피였다. 백번 양보해서, 남들이 버린 쓰레기야 화가 나서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본인이 좋다고 받아 붙여 놓은 판넬이 제 기능을 잃었다고 하여 왜 우리 집, 그것도 본인 집과 인접한 곳도 아닌 안쪽에 버리는 건지. "어쩌면 옆집도 피해자"라는 생각에 연민의 감정이 들었던 것이 사무치게 후회되었다.


쓰레기 무단 투기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지
 잘 알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를 뜨악하게 만든 옆집의 행동은 나로 하여금 "보편타당한 마음"은 존재하는가를 고민케 하였다.


20대 초반, 미숙한 나는 미숙한 연애를 했다. 상대가 나의 말과 행동에 얼마나 영향을 받을지, 어떤 상처를 받을지 고려하지 않은 채 내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을 했다. 상대가 느낄 박탈감이나 좌절감 등은 고려하지 않고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 물론 물리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였다지만, 그래도 부끄럽다 - 행동하며 타인의 마음과 감정을 쉽게 여겼다. 늘 "갑"이 되고 싶었고, 그 위치를 선점했을 때 오는 쾌감도 있었다. 화가 나지도 않는데 기분 상한 척 행동하여 상대를 불안하게 했고, 나의 말 한마디, 나의 표정 하나에 상대의 기분이 변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살다 보니 결국 벌을 받게 되었다. 지친 상대는 나에게 이별을 고했고, 나는 뒤늦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아주 오랜 시간 아파했다. 사랑해주고 예뻐해 주던 사람의 부재도 나를 아프게 했지만, 나는 그런 사람에게 했던 나의 행동에 대한 후회로 더욱 괴로워했다.


"마음을 다치면 이렇게 아프구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을 치면 절대로 안 되는 거구나.”


후회로 마음이 괴로울 때면, 나는 울면서 기도를 했고 - 재회를 바라는 기도는 아니었다 - 신께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절대로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지 않겠다고. 누군가가 나로 인해서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날 통곡의 기도를 하며 나는, 어쩌면 신이 주는 가장 무거운 형벌은 "나의 행동의 그릇됨을 직시할 수 있는 눈과 그로 인해 느끼는 후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겪은 아픔을 타인이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나는 그것이 "보편타당한 마음"이라 생각했다. 그런 마음은 매우 자연스럽고 사리에 맞는 것이어서 어떤 상황에도 적용 가능하고 문화나 성별의 차이, 개인의 사고력과 지각력의 편차와는 무관한 객관성을 가졌다고.

그렇기에, 때때로 만나게 되는 불의들을 이해하는 건 더욱 어려워졌지만,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저것은 그냥 소수의 일탈일 뿐이야.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야. 탈일상적인 일이라고.


애물단지가 된 판넬을 우리 집으로, 그것도 가능한 한 자신의 집에서 가장 먼 지점에 버려두고 간 옆집의 행동을 보며 나는 내가 '보편타당하다' 믿어온 마음이 진짜 그런 것인지 이제 확신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불의와 무례함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내가 이상한 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출처:Unsplash)


어쩌면 고통을 크기와 무게를 알고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는 내가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악의를 가진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건지
그것을 기이하다 여기는 내가 비정상인지
이젠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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