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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 Jan 17. 2024

나를 곱씹어 주는 우유 크림 롤케이크




내 믿는 구석은 우유 크림 롤케이크다.



언제 먹어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음식이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다. 지치고 피곤할 때 먹으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기꺼이 포근하게 위로가 되니까. 냉장고에서 갓 꺼내 차가운 상태의 흰 우유를 우유 크림 롤케이크에 곁들여 먹으면 이보다 기분이 폭신폭신- 편안해질 수가 없다. 은은한 맛의 롤케이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하얀 도화지처럼 깨끗한 모습으로 마주 앉아 '너 좋을 대로 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앞으로의 일은 내 몫이라는 듯.


그러면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롤케이크를 씹는다. 크림만 똑 떠내 따로 먹어 본다. 고소하다. 풍부한 유지방 덕에 혀 위에서 몽글몽글 거품을 내며 뭉그러진다. 단맛이 난다, 온통 스민다. 오래 머금은 쌀이 그렇듯이. 금방 목구멍 뒤로 넘겨버린다면 알지 못할 맛이다. 작은 한 입으로 많은 걸 보여주지 않는 음식들은 대개 그렇다. 그래도 계속 먹을 사람은 먹고 영 별거 없다 싶은 사람은 포크를 내려놓는다. 틀린 사람은 없다.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요 기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기 있어 줄 것인지 아닌지. 그마저도 즐겨 줄 수 있는지.


믿음이라는 건 기다려 주는 일인가. 나를 배반하지 않을 거라는 마음으로 같은 자리를 지키는 것. 쉽게 떠나지 않는 것. 그건 믿음의 대상을 의심하지 않는 일인가, 나의 믿음을 보호하는 일인가.

때론 숭상하는 일인가. 본디 멋진 사람이라,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 상냥한 사람이라,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많은 행위를 선해해 주는 일인가. 어떻게 너마저... 비상금 같은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말들이다. 믿음으로써 고통받는 건 누구의 탓일까. 끝까지 믿기로 결심한 자기 자신? 그 마음을 저버린 모든 것들?

'나의 책임'으로 일임되는 것이 무수히 많다는 걸 깨닫는 요즘, 믿는다는 말은 곧 탓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믿었기 때문에, 배신을 탓한다-자연스러운 명제지만 결국 훗일을 감당하는 건 나의 몫이므로. 내 믿음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결심이 선행되어야 믿음을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너무 어렵다. 그저 단순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나를 증명할 필요 없이도. 그냥 천천히 씹는 것만으로도 더 진한 맛을 보여주는 우유 크림 롤케이크처럼. 뒤돌아보면 언제나처럼 거기 있어 주는, 이토록 포용적인 우유 크림 롤케이크는 내 마음의 고향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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