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신폭신하고 달콤하다. 눈사람처럼 하얗고, 어떤 것은 무지개색이다. 겉에는 분이 살짝 묻어 있어 한 입 베어 물면 텁텁함이 느껴지지만,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녹아 포근하게 씹힌다. 코코아에 넣어 먹으면 단맛이 두 배가 되어 맛있다. 초코파이 사이에도 들어 있다. 오레오오즈에 든 것은 딱딱하다. 미국 어린이들은 캠프파이어에서 꼬치로 만들어 불에 구워 먹는다. 지구 두 바퀴를 돌기 한참 전에는 열량이 다 소비된다. 그리고, 원어민 선생님들의 단골 보상이다.
생각해 보자. 왜 원어민 선생님들은 마시멜로를 그렇게 좋아하셨을까? 초콜릿과 사탕도 있는데 말이다. 대중성과 호응으로 친다면 초콜릿이 가장 적임이었을 것이다. 내 경험이지만,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발표한 뒤에 마시멜로를 받으면 잘 먹기는 했지만 그 마시멜로를 얻기 위해 피 튀기는 발표 경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이왕 받았으니 맛있게 먹자’ 그쯤 되지 않았나 싶다. 정말 인기 있었다면 따로 사와 동급생 사이에서 은근한 권력을 누리려는 아이가 한 명쯤은 있었을 터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이에 관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외국에 한국어를 가르치러 간 선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먼 타국에 우리나라 말을 전파하러 온 만큼 한국의 문화를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려면 아이들에게 주는 보상도 한국의 간식인 편이 더 좋지 않겠나. 그중에서도, 그 나라에도 있을 수 있는 과자나 다른 문화권의 간식보다는 우리나라의 전통 간식인 약과나 유과, 쌀강정 등을 준비하려고 할 것이다. 이를 원어민 선생님들에게도 적용하면 한국에도 이미 많은 초콜릿과 사탕 대신 비교적 생소한 마시멜로를 준비함으로써 고유의 식문화를 소개해 보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싶은 것이다.
그 전략이 한국 어린이들에게 먹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원어민 선생님 수업 시간=마시멜로’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었으니 전혀 효과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때 이후로 마시멜로에 좀 더 열린 마음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마시멜로를 좋아한다고는 못하지만 먹게 되면 그래도 즐기려고 한다. 스모어 쿠키를 먹어 보고 나서 더 괜찮다고 느끼고 있다. 두툼한 아메리칸 쿠키 맛집으로 유명한 곳에서 산 쿠키였는데 마시멜로에다 시판 과자 로투스까지 함께 들어 있었다. 에어프라이어에 따뜻하게 데운 쿠키는 향이 진하게 났고, 말랑말랑해진 마시멜로가 혀에 착 감겼다. 많이 먹고 싶은 맛은 아닌데 살짝 더해지면 좋은 마시멜로는 감초 역할이 제격인 것 같다.
마시멜로가 우리 삶에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한 계기라면 ‘마시멜로 이야기’도 떠오른다. 『어린이를 위한 마시멜로 이야기』는 어둠의 마시멜로 광고 도서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마시멜로를 먹음직스럽게 그려 놓았다. 연분홍색 표지 곳곳에 그려진 색색의 마시멜로들은 참 매력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푹신한 베개 같은 원통형 마시멜로와 유니콘처럼 알록달록한 트위스트형 마시멜로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모습은 <슈가슈가룬> 가방을 메고 다니던 한 어린이를 사로잡기 충분했다. 나는 그 책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는데, 그건 학년 권장도서여서는 아니었다. 나는 그 안에 담긴 교훈적인 내용에 감명받았다. 특히 유혹을 잘 견디는 어린이가 크게 자라 성공한다는 마시멜로 실험은 인내의 미덕을 내게 가장 효과적으로 가르친 대목이었다.
만족 지연의 미학에 대하여 들어 본 적이 있다. 당장 원하는 것, 마음의 충동을 잠시 미루어 두고 인내하는 일. 그 대신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을 먼저 하는 일. 이 일을 해내는 사람이 성공에 한 발 더 가까워진다고 한다. 이것이 옳은 말임은 부정할 수 없다. 요즘의 욜로(YOLO) 가치관과는 거의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원시적 욕구만 채우면서 하고 싶은 대로만 살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저마다 할 일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먹고 살고 사람답게 지낼 수 있다. 가끔 '욜로'와 '한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욜로족이 본능과 충동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현재 나의 행복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건 내가 강제로 하는 게 아니면서도 성실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겠다는 의미고, 적어도 내 삶은 괴로움과 불행뿐이라는 자기파괴적인 생각들로 인생을 채우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뜻이다. 정말 ‘끌리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기’가 아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게 되어도 하기 싫은 걸 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 항상 좋을 수만은 없고, 좋아하던 게 일이 되면 싫증이 나기도 하니까. 다만 내 두 발로 걸어들어온 길이기에, 빛나던 첫 마음을 곱씹으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 이 길을 잘못 왔다는 확신이 든다면 돌아가도 된다. 그것이 스스로 불행을 막고 마음의 목소리를 들어 주는 진정한 욜로의 삶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마시멜로는 항상 잘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쓰였던 것 같다. 마시멜로 실험에서 그랬고, 초등학교 시절 원어민 선생님들이 그랬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는 스스로 마시멜로를 구해다 먹을 수 없는 어린아이였고, 지금은 마시멜로 한 봉지쯤 거리낌 없이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보상해 줄 수 있고, 어떻게 보상해 줄지 직접 결정할 수도 있다.
마시멜로 실험이 정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과 무관하게, 그로부터 나온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마시멜로를 쌓아두기만 하다가 인생이 끝나면 어떡하냐고? 왜 쌓아두기만 하는가. 그래야 한다는 조건은 걸려 있지 않았는데. 할 일을 하나 끝내면 하나 먹고, 잘 끝냈으면 두 개를 먹으면 되는 거다. 그렇게 자신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주는 게 인생이지, 당근 혹은 채찍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