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맛밤 Nov 01. 2023

이혼은 신속하게 (1)

이혼할 결심

 28살을 며칠 앞둔 밤. 컴퓨터 화면에서는 강사가 실해석학 정리 증명에 한창이었다. ‘집중해야지. 집중해야 하는데...’ 집중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그러다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연필을 떨어뜨렸다. 휴대폰에는 ‘진상만’ 이름이 떠 있었다. (물론 가명이다.)      


“마눌! 나 잘했지!”

개소리 시작 멘트다.

“12시 안 넘었잖아. 잘했징?”

시계를 보니 23시 55분. 자정을 딱 5분 남겼을 때였다.

“데리러 와랑. 눈 와서 땍띠가 안 잡혀. 웅? 제바알. 마눌 빨리와앙.”

취기와 애교가 대충 섞인 목소리에 커튼을 휙 젖혔다. 짙은 어둠 덕분에 까만 도화지에 튄 화이트처럼 선명하게 눈이 보였다.



 아파트 입구를 나서는데 푸닝이(하늘색 모닝의 애칭이다)의 머리에 희끗희끗 눈이 덮여 있었다. 너도 참 피곤하지? 동병상련을 느끼며 차 문을 열려고 보니, 지금 막 갈아 낸 우유 빙수가 소복이 쌓여있었다. 입으로 후 불었다 역풍을 맞았다. 얼굴에 기분 나쁜 축축함을 묻힌 채 시트에 앉아 시동 버튼을 눌렀다. 끽-드드릉 하며 거칠게 시동이 걸렸다. 수많은 밤 술에 취한 진상만을 날라댔기에 푸닝이와의 밤길은 익숙했다. 하지만 스키장이 되어버린 도로는 처음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새하얀 눈길에 푸닝이의 첫 자취를 남기며 조심스레 나아갔다.      


 15분 거리를 두세 배쯤 걸려 드디어 올림픽대로를 만났다. 제설차의 엄호를 받으니 든든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제야 반은 안도, 반은 한탄인 한숨과 함께 이 짓을 일 년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새어 나왔다. 새해에는 꼭 임용에 합격해 이혼 통보를 해야 하는데. 가능한 계획일까. 철저히 혼후 순결을 지켜준 알콜릭 진상만. 그리고 항상 나의 포기로 끝난 싸움들. 덤으로 시댁과의 갈등까지. 결혼 1주년을 앞둔지금은 각방을 쓰며 생필품 같은 대화만 오고 갔다. 그 지경에도 사회 통념상 부인의 역할은 꼼꼼히 수행했다. 논알콜릭 진상만에게 꼬투리 잡히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 진상만은 내가 ‘그 일’을 용서했다고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찔한 생각에 나들목을지나칠 뻔 했다.


 무사히 진상만의 학교에 도착했다. 그가 애용하는 픽업 장소다. 술에 취한 선생님을 학생들이 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 따위 하지 않았다. 대개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학생이 있을 가능성도 없었지만. 덕분에 아직 그는 교사다. 진상만이 조수석에 앉자마자, 따뜻한 온기는 금세 알코올과 기름 쩐내로 뒤덮였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공기를 오염시킨 가해자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답답해서 토할 것 같다며. 이내 창문을 내리더니 흡족한 듯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함께 빨려 들어가는 눈을 쩝쩝거리며 음미하기까지. 아이스크림이 숙취에 좋은 거 아냐며 낄낄댔다. 제대로 미친 알콜릭을 위해 기도했다. 제발 그대로 잠들어라. 네가 좋아하는 벤츠처럼 몰아줄 테니.


 잠시동안의 평화는 올림픽대로의 끝과 함께 깨졌다. 진상만이 잠에서 깨어 각성했다.

“12시 전에 연락했는데 왜 칭찬 안 해줘?”

“임용 때려치고 약대 갈래? 나 셔터맨 하고 싶은데.”
 “그래도 나만 한 남자 없지?”

그의 끈질긴 노력은 가상했지만 맞장구쳐줄 정신이 아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2차선 도로를 오직 푸닝이 눈에 의지해 나아가느라 운전대를 잡은 손에 땀이 슬 맺혔으니. 하지만 훅 들어온 위험 싸인에 몸이 굳어졌다.

“지금 너, 나 무시하냐?”

레퍼토리는 한결같았다. 폭언이 줄줄이 이어졌고, 와중에 한 번의 폭행도 있었다.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하는 눈물이 행여나 떨어지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버텼다. 겨우 한 번의 깜박임에 흘러버릴 눈물을 지키려고 오기를 부렸다. 함박눈과 눈물이 섞인 시야는 곧 아득해졌다. 마침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꽉 잡은 운전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가 났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푸닝이 가로수에 처박혀 있었다. 조용해진 옆자리를 봤다. 기절했나? 서늘해지던 찰나, 진상만은 비몽사몽 눈을 뜨며 말했다.

“다 왔어?”

사고가 났다는 말에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초간 안위를 걱정한 내가 미친년이지.     


 차 문을 여는 순간 휙 날리는 옷을 붙잡아 여몄다. 푸닝이는 앞 범퍼가 찌그러지고 한쪽 눈이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사고 접수를 하고 삼십 분쯤 지났다. 함박눈은 부지런히 겨울왕국을 세웠다. 코끝, 손끝, 발끝. 모든 말단기관이 간질거리다 점차 감각이 무뎌졌다. 위험하니 나오라는 권유에도 조수석에서 버티던 진상만. 드디어 차에서 내렸다. 공기가 상쾌하다며 싱글벙글. 끊었다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냄새를 피해 거리를 두고 섰다. 진상만과 푸닝이 한눈에 들어왔다. 취한 사람과 망가진 차라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한 시간이 더 지났다. 푸닝은 여전히 부서진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꼬투리 잡지 않을게. 그만해도 돼.’

나의 만류에도 푸닝은 비상등 역할에 충실했다. 너도 참 미련하다 싶은 그때, 푸닝이 내게 말했다.

‘도망쳐.’      


 나는 마침내 이혼할 결심을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