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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무 Mar 18. 2022

'멀쩡한' 구관 구조를 가졌었다면...

- 어릴 적 나의 꿈 -


어릴 때 꿈이 무엇이었나요?

출처_pixabay

각종 인터넷 사이트 회원 가입을 할 때, 비밀번호를 모르는 경우를 대비해서 자신만이 아는 답변을 설정하는 기능이 있다. 나는 그때마다 이 질문을 설정해 놓고 답을 ‘성우’라고 적는다.


아주 어렸을 때와 초등학교 시절 꽤 오랫동안은 아나운서라는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무슨 계기였을까?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한 3년 동안 치열하게 성우라는 직업에 열망했었다. 내가 만약 우리 아들들에게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토요 명화 시절 얘기를 꺼낸다면 나를 완전히 옛날 사람 취급을 할 테지만, 아빠와 오빠와 함께 설레이며 토요 명화 보던 그날들이 생각난다. 지금 아이들이야 원하는 영화를 딱딱 넷플릭스 이건 VOD(Video On Demand) 서비스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볼 수 있지만, 우리 때만 해도 방송되는 프로그램이 나와 있는 신문을 쫙 펼쳐놓고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동그라미 쳐 가면서 확인했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영화 보기를 즐겨하던 난, 늘 토요일 코너를 집중해서 보았었다. (갑자기 진짜 내가 진짜 옛날 사람처럼 느껴지네^^;;) 사실, 초, 중, 고 시절 토요 명화를 볼 때는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화면 너머에서 목소리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딱히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성우들이 나와 브라운관 1/3 가량에서는 영화 장면이 나오고 나머지 화면에서는 성우들 연기하는 모습을 본 그때부터는, 영화를 보든, 만화를 보든, 심지어 흘러나오는 광고를 보면 이 목소리를 내면서 연기하고 있을 성우들이 그려졌다.


나는 늘 내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지금도 가슴 한편에 좀 묵직한 중저음을 내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남아있다- 한때는 허스키하고, 묘한 매력이 목소리에 잔뜩 묻은 듯한 탁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었다. 20대 후반에 결혼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나는 남편과 둘이 사는 집의 ‘안주인’이 되었는데 각종 걸려 오는 집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집에 엄마 안 계시니?’라는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그렇다. 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가는 하이톤이고 누가 들어도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리다. 일부러 목을 꾹꾹 눌러 목소리를 변형시키는 노력을 했을 때도 있었지만 성우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내 목소리가 그래도 꽤 쓸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대회 이름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유명했던 성우분의 이름을 딴 보이스 콘테스트에 나가서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우가 되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까? 혼자 이런저런 검색을 하다가 성우를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을 찾게 되었고 매주 토요일마다 한 대학 강의실에서 함께 스터디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스터디를 갔을 때, 정말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목소리의 사람들을 한자리에 만나면서 심장이 쿵쿵거렸다. 물론 떨리기도 했지만 설렘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터디를 매주 경험할수록 좌절에 빠졌다. 매주 다른 원고들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기 발표하는 시간에 나는 늘 같은 지적을 받았다. 즉 특정 발음이 정확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우는 목소리로 연기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을 구사해야만 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너무도 절망스러웠다. 집에서 연습을 열심히 해도 똑같은 지적은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성우분이 오시는 학교 특강이 있어 냉큼 신청해서 들었었는데, 난 특강이 끝나고 이 성우분을 만나기 위해 모든 행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찾아가 나의 고민을 말씀드리고 그 자리에서 테스트 아닌 테스트를 보게 되었다. 그분 말씀이 나의 구관 구조상 특정 발음이 정확하게 나오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성우라는 직업이 간절하다면 수술을 하는 방법을 권하셨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내게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날 눈물 꽤나 흘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KBS 성우 시험을 보고 당당히(?) 떨어진 경험을 마지막으로 나의 꿈을 접었다. 아직도 그런 구조적 문제라는 꽤 괜찮은 핑계를 대며 꿈을 접을 이유를 말하지만, 성우를 하고 계신 분들처럼  그야말로 천애의 목소리도, 연기력도 나에게는 없었기에 결국 접긴 했을 것이다.


그래도 난 늘 비밀번호의 답을 ‘성우’라고 적으면서 그 꿈을 이루고 TV 너머에서 연기하고 있을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다음 생애에는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멀쩡한’ 구관 구조로 태어나보고 싶다. 그때에도 여전히 성우라는 직업이 있긴 할까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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