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간섭의 뒷면은 관심

by 노란고구마


서귀포의 한 동네 의원에 앉아 있다. 어제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완만한 내리막길이라 방심한 탓에 발밑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잠깐 통증이 있다가 곧 괜찮아질 줄 알았건만, 다음날 아침 신발을 신지 못할 정도로 발등이 퉁퉁 부어올랐다. 진료를 받아보니 인대가 늘어났고 일주일정도 반깁스를 하게 되었다.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절뚝거리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다른 여행자들이 떠난 빈 방에 홀로 남겨지니 묘한 소외감이 밀려왔다. 가고자 했던 목적지는커녕 걷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니, 같은 시간에 성큼성큼 나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든다.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한없이 약해진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박집 사장님이 밥은 먹었느냐며 물으신다. 점심을 먹을 참인데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 되니 얼른 나오라 하신다. 오늘 아침에도 내 발을 보고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동네 의원을 추천해 주셨다.

식탁에는 몇 주 동안 이곳에 묵으며 올레길을 걷다 오늘 체크아웃을 하시는 중년 부부와 민박집 사장님 그리고 내가 마주 앉았다. 숙소에서 종종 일과를 마친 저녁에 여행자들과 모여 밥을 먹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점심을 함께하는 건 처음이었다.


여행자 아주머니는 크게 다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내 밥과 국을 손수 퍼주셨다. 아저씨는 나도 그런 적이 있다며 지금 잘 쉬어야 나중에 고생을 안 한다고 다독여 주셨다. 살다 보니 인생이 생각보다 짧지 않으니, 조급해하지 말고 젊을 때부터 몸을 아껴 쓰라는 경험 어린 조언도 덧붙이셨다.


밤이 되어 잘 준비를 하는데 며칠째 같은 방을 쓰고 있는 간호학 전공의 친구가 내 무릎 아래에 베개를 놓아주었다. 발을 심장보다 높게 올리고 자야 부기가 빨리 빠진다며 요령을 알려준다.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사방에서 움직이지 말라며 필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 평소라면 간섭이라 느꼈을 법한 말들이었지만 그 안의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관심이 고마웠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사실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간섭의 뒷면에는 타인을 향한 관심이 전제되어 있다. 어제 처음 본 사이임에도 진심으로 안쓰러워하고 뭐라도 도와주려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정서인 ‘정’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서로에 대한 관심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에너지가 넘친다고 말하나 보다.


내 위주로 말하는 게 간섭이라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하는 건 관심이다. 즉, 상대가 원하는지 고민하지 않는 것이 간섭이고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미리 헤아려보는 것이 관심이다.

만약 내가 주는 마음이 간섭이 될지 관심이 될지 헷갈려 주저하게 된다면, 그저 상대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된다. 이렇게 해주는 건 어떨까 하고 말이다.


넘치게 받은 관심에 보답하고자 숙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며칠간 그들의 서포터가 되기로 했다. 여행자들이 숙소로 돌아오기 전에 민박집 사장님을 도와 함께 먹을 저녁을 준비하고, 처음 올레를 걷는 분들에게 길을 설명해 주고 필요한 물건이나 주의할 점들을 알려드렸다. 누군가를 맞이하며 관심을 쏟는 일에 이런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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