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3일 (화)
이번 추석은 쉬는 날도 참 길다. 무려 10일. 10일이면 내가 올해 초, 회사를 그만두고 갔던 이탈리아 여행 기간과 같다. 뭐, 딱히 할 것도 없는데 내가 좋아하는 여행이나 갈까 하다가도, 제주도 왕복 티켓이 100만 원을 호가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여행을 망설였다. 그러다, 우연히(라고 쓰고 사실은 꾸준히 관심 있었던) 핀에어 웹사이트에서 평소 가고 싶었던 코펜하겐 8박 9일 일정이 170만 원인 것을 발견했다. 운명인가. 제주도 왕복 티켓이 100만 원인 것 치고는 왠지 모르게 저렴하게 느껴져, 덜컥 티켓을 구매했다.
찬찬히 숫자가 커질 조짐이 보이던 나의 불쌍한 통장이 한순간 쪼그라 들었다.
강제 다이어트를 한 통장과는 달리, 티켓을 산 이후 내 마음은 더욱 포동포동해졌다. 회사(‘아파트멘터리’)에서 늘 이야기로 접하던 덴마크에 내가 직접 가게 되다니! 여행 준비로 한층 더 짙어진 덴마크 여행에 대한 기대감은, 일상을 행복의 나날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종종 '북유럽 홀릭' 소연님이 보내주시는 칼슘두유(본인ㅋㅋ)의 코펜하겐 관련 포스트와 최근 오픈한 MENU라는 가구 브랜드 쇼룸에 대한 아티클을 읽으면서 덴마크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북유럽 특유의 세련되면서도 여유로운 분위기는 진짜일지,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북유럽 사람들의 철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덴마크 여행 전, 본가인 파주에 갔다. 오랜만에 뵙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는 무뚝뚝하기만 한 손녀의 손을 어루만져 주셨다. 일본 여행에서 돌아오신 엄마는 조심히 여행 다녀오라는 말씀과 함께 300달러를 손에 쥐어주셨다. 새벽 5시 30분, 아빠는 나보다도 먼저 나갈 준비를 하고 공항에 데려다주셨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무척 특별한 순간들. 특히나 홀로 여행을 떠나기 전, 설명하기 힘든 ‘든든함'을 얻는 순간이다. 온 식구가 모이는 명절에 아이러니하게도 홀로 여행을 떠나는 나를 존중하고 응원해주는 마음이 느껴져서겠지.
2017년은 내게 특별한 해이다. 새로운 회사에서의 여정을 시작했고, 좋은 친구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를 좀 더 가까이에서 알게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건? 내가 두려워하는 건? 나의 사랑스러운 점은? 기괴한 점은?" 나를 멀찌감치에서도, 현미경 보듯 가까이에서도 살펴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가 겪어왔던 경험과 역사를 훨씬 더 깊게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홀로 여행도 나를 돌아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일상에서 벗어난 일을, 내가 내키는 대로 마구 마구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격한 요가 동작 후에 하는 사바사나(savasana; 일명 송장 자세로,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로 누워서 완전한 휴식과 이완을 취하는 자세)처럼, 열심히 일상을 살다가 떠나는 나홀로 여행은 '나'와 '인생'을 느긋하게 돌아보게 한다. 미지의 세계를 이방인으로 멀찌감치서 바라만 보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 자세히 느껴보기도 하면서, 완전한 외부와 나의 교감을 관찰한다. 말 그대로 '인사이트 트립'이다.
나는 항공사 마일리지보다는 '최저가' 항공 서비스를 사랑한다. 그래서 여행을 갈 때마다 각기 다른 항공사를 이용하는데, 기억에 남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항공사는 딱히 없다. 그런 면에서, 핀란드 항공인 '핀에어'의 서비스는 매우 인상적이다. 기내식이나 영화/드라마 컬렉션과 같은 물리적인 서비스뿐만 아니라, 친절하고 내공 있는 고객 응대 서비스도 훌륭했다. 또한, 승무원의 앞치마부터, 냅킨, 종이컵, 담요 등 모든 제품을 핀란드의 유명 텍스타일 브랜드인 마리메꼬(marimekko)의 디자인으로 만들어 제공하는 것도 인상 깊었다.
12시간가량의 비행 끝, 드디어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했다. 코펜하겐 공항은 내가 기대한 만큼 깔끔하고 정갈하진 않았지만, 자유롭고 예술감 넘치는 분위기였다. 공항에서 쓰기엔 대담해 보이는 펜던트 조명부터, 컨테이너 컨셉의 화장실까지. 소매 걷는 모양만 봐도 느껴지는 패션 센스가 이런 걸까. 공항의 첫인상은 코펜하겐의 아름다움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예상치도 않은 '아름다움'을 공항에서 보게 된 두근거림은, 공항 근처 숙소까지 이어졌다. 단지 '저렴해서' 선택한 숙소인데,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사랑스러우면서도 깔끔했다. 너무 귀엽기만 하지도 않고, 과하게 세련되어 이질감을 주지도 않았다.
타지에서의 첫 날, 다행히도 아름답고 편안한 공간을 만나서, 무섭지도 어색하지도 않게 편안한 저녁 시간을 마무리 한다. 내일을 기대할 틈도 없이 잠들어버린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