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을

세입자의 설움을 처음 알다..

by 달콤한 봄

누수가 문제였다.

아니다. 오래된 아파트라 그렇다.

그것도 아니다. 내가 세입자라 그렇다.


일이 일어난 건 여느 때와 다름없었던 평범한 오후였다.

관리사무소에서 직원 두 분이 벨을.. 아니 현관문을 두드렸다.

(우리 집 벨은 밖에서 눌러도 집 안에 들리지 않는다... 아무 소리 없이 인터폰 화면이 켜지면 아이들이 그걸 눈치채고 나에게 알려주곤 한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으면 그제야 밖에선 현관문을 두드린다.)


"아랫집에 누수가 있어서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 아.. 그런가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공사업체 선정하셔서 보수공사 진행하셔야죠"

- 아 저는 세입자인데.. 그럼 집주인께 연락드리면 될까요?

"네, 빨리 진행하셔야 할 겁니다"


지방에 살고 있는 집주인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전세계약을 진행할 때 남편이 부동산에서 만난 게 전부였다.

남편 말로는 집주인이 꽤 '나이스' 하다 했다.


아랫집에 연락을 해서 천장 누수된 부분을 직접 확인하고 집주인에게 보낼 동영상을 촬영했다.

그리고 주말을 포함한 일주일 간 나의 스케줄을 집주인에게 전달했다. 집주인과 몇 번의 메시지와 여러 번의 전화통화 끝에 공사 날짜는 2주 후로 정해졌다. 업체가 바쁘다는 이유였다.

누수된 부분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이 때문에 관리사무소에서는 좀 애매하다 했다. 크게 번진 게 아니어서) 아랫집과 나는 공사가 진행되기만을 기다리며 2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랫집은 아랫집대로 천장 누수가 더 번지지 않는지 늘 촉각을 곤두세웠을 테고, 나는 나대로 화장실 쓰는 게 조심스러웠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두 번 샤워하는 남편은 저녁엔 머리만 감는 것으로 대체했고 아이들 샤워는 일주일에 두 번가는 수영장에서 해결했다. 그리고 나는..ㅎㅎㅎ 더 이상은 생략.


드디어 공사 날이 되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아이들 등교와 등원을 준비했고 공사 담당자는 아랫집부터 방문한 뒤 9시경 우리 집에 도착했다. 공사를 위해 아랫집 남자는 반차를 내고 오전에 공사 담당자를 맞이한다고 했다. 공사 진행하는 사람은 화장실을 보자마자 한 숨을 쉬었다. 이건 누수탐지를 할 필요도 없겠다는 말과 함께. 의아해하는 날 뒤로하고 몇 가지의 테스트를 진행한 뒤 담당자는 나에게 말했다.

"제가 이래서 여길 안 하려 했던 겁니다. 두 번이나 털었는데(거절했다는 뜻인 듯) 집요하게 연락하셔서 오기로 한 건데 역시나네요."


무슨 말인가 하니, 대부분의 오래된 아파트는 욕실 방수가 이미 제 기능을 못한다고 한다. 만약 보일러나 상하수도 배관 문제로 누수가 된 거라면 아랫집의 천장은 이미 넓은 부분이 썩어 있었어야 했던 것. 공사를 2주나 미뤘는데도 누수 부분이 넓게 퍼지지 않았다면 이것은 화장실 방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장실 방수 공사를 하면 되지 않는가? 그러면 화장실 전체 타일을 뜯어내 방수작업을 다시 한 뒤 타일 마감을 다시 해야 하는데 그걸 집주인이 해 주겠냐는 말이다.


- 아니요, 저희 집주인은 방수문제라 하면 공사를 해줄 텐데요.

"그럴 리 없습니다. 제가 그동안 많은 집을 다녀봤지만 세 놓은 집에 돈 들이는 집주인은 없습니다"


너무나 단호한 한마디. 아닌데, 우리 집주인은 '나이스'하단 말이다.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단톡 방을 만들어 아랫집과 나에게 불편을 끼쳐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던, 보통의 임대인과는 다른 집주인이란 말이다.

그래도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집주인에게 얘기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나의 의견은 처참히 묵살당했다. 공사 담당자는 세세한 얘기를 할 필요도 없다며 집주인에게 간단한 방수조치만 하면 되겠다고 통화한 뒤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진행과정을 보러 출근 전 잠시 들린 아랫집 남자도 내 의견을 거들었다. 아니 그래도 제대로 공사를 해야 장기적으로 괜찮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지만 공사 담당자는 그 얘기를 정말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젊은 사람들이 뭘 모르네라는 표정을 지으며.


어찌 됐건 공사는 진행되었고, 나는 지방에 사는 '나이스'한 집주인을 대신해 공사가 진행되는 부분을 열심히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 전송하였다.


변기를 뜯어 안을 시멘트로 메꾼 뒤 다시 백시멘트를 발라 부착했다. 욕조 벽 갈라진 타일 틈을 실리콘으로 메꿨다. 화장실 바닥의 하수구 부분을 스펀지와 시멘트로 보강한 뒤 다시 백시멘트로 마감했다. 공사는 예상과 달리 두 시간여 만에 금세 종료되었고, 나는 완료된 애프터 사진을 집주인에게 전송했다.

변기를 다음날 정오까지 쓰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공사가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2주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임시 보수라는 점에서 조금의 찜찜함은 있었지만. 시멘트가 마를 때까지 볼 일은 집 앞 관리사무소 화장실을 이용했다. 코로나로 노인정이 폐쇄되어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늘 자기 전 시간에 큰 볼일을 보는 큰 아이는... 엉덩이가 변기에 닿지 않게 내가 아이를 안고...... 더 이상은 생략.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공사를 계획하고 진행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집주인의 태도는 남편의 말처럼 '나이스'했다. 세입자로서 집주인에게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라는 말을 듣는 것도 처음이었으니.


그리고 다시 2주 정도가 지났다.

주말 오후 아이들과 여느 때처럼 집콕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이제 아랫집 공사도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화장실 사용하는데 불편은 없었는지요?"로 시작된 집주인의 말은 대화가 오고 갈수록 점점 이상한 뉘앙스로 변해갔다.


"그런데, 타일이 벌어진 부분은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사실 이 집에 들어올 때 도배도 하고 싶고 여러 가지 손 볼 부분이 많아 보였지만 이사 날짜를 조정할 수가 없어 전 세입자가 전출한 뒤 두 시간 뒤에 우리는 이사를 들어왔다. 도배는커녕 입주청소도 할 수가 없었고 전 세입자들이 나간 뒤 이삿짐보다 내가 먼저 도착 해 청소기와 물걸레를 들고 온 집을 서둘러 닦았더랬다.

10개월 간 이 집에 사는 동안 여러 흠 - 이를테면 문짝이 찌그러졌든가 욕조에 패인 부분이 있다든가 - 을 발견했지만 이미 20년 된 이 오래된 아파트에 그런 흠집이 없는 것도 이상할 터. 평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를 추구하는 무던한 나로서는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으니 굳이 집주인에게 얘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세입자가 나간 뒤 집 상태를 살펴보는 건 부동산 중개인과 집주인의 몫 아닌가?


슬슬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우리가 입주했을 때부터 욕실 타일은 벌어져 있었고, 사실 그런 세세한 부분을 다 말씀드리기엔 이 집은 너무 오래되었으며, 그렇게 치자면 말씀 드릴 내용이 너무나 많다. 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집주인은 본인이 예전(집주인이 이 집을 매입한 시기가 전 세입자가 살고 있을 때니 아마도 최소 4년은 지났을 것이다)에 집을 봤을 때는 상태가 괜찮았다는 것이다. 어랏, 이거 잘 못하면 우리가 뒤집어쓰게 생겼는데.

나는 화장실만 해도 욕조에 크랙이 여러 부분 있으며..라고 말을 시작했다. 집주인은 깜짝 놀란 듯했고 그렇다면 그 부분을 사진 찍어 전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고, 나는 집주인과의 통화가 생각나 20년 된 플라스틱 욕조의 크랙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전송했다. 두 시간여 뒤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무척이나 격양된 목소리로.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제가 분명히 예전에 가서 봤을 때는 멀쩡했습니다. 그전에 사시던 분들도 평소 통화했을 때 사는데 전혀 불편과 지장이 없었다고 했고요. 이사 들어가셨을 때부터 욕조가 그랬다고요? 그럼 전에 사시던 분들이 그렇게 만드신 거군요! 아니 어떻게 그분들이 그럴 수 있죠? 제가 다른 사람들 5-6천씩 전세금을 올릴 때 저는 아내를 설득 해 천만 원 정도만 올렸었고 그분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 드렸는데 어떻게 집을 그렇게 막 쓸 수가 있는 거죠? 아니 제가 연락을 한번 해봐야겠군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휴대폰 너머로 집주인의 말을 들으며 몸이 좀 떨렸지만, 티를 안 내려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얘기했다.


- 사는 데에 전혀 지장 없습니다 저도. 그래서 이야기를 따로 안 했던 것이고. 이 욕조가 설치된 지 이미 20년이 넘었는데, 그 전 세입자분들이 그러셨는지 전전 세입자분들이 그러셨는지 그건 저도 알 수가 없네요. 이 집은 주방 말고는 특별히 리모델링을 한 집도 아니고 이미 20년이 넘은 오래된 집입니다. 하다못해 벽의 못 구멍이나 욕조 크랙 이런 것 들, 저도 오래된 아파트에 크게 기대 안 하고 감수하며 사는 거지 하나하나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는데요. 정 그러시다면 주말에 하루 정해서 집 상태를 보러 오시죠.


집주인이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했다.

“제가 내일 서울로 출장을 가는데 아침 8시쯤에 잠시 가 봐도 될까요?"


8시.. 코로나로 학교도 유치원도 못 가는 두 아이들이 한참 자고 있는 시간이다. 나 역시.

하지만 이러다가는 이 집의 모든 흠과 부실을 내가 떠맡겠다 싶어 하루라도 빨리 집주인이 집의 상태를 보는 게 낫겠다는 마음에, "알겠다"라고 이야기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코로나 때문에라도 좀 나중에 보시라 이야기할 것을.

당장 내일 8시란 말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집을 최상의 깨끗한 상태로 만들어놔야, 트집을 잡히지 않게 된다. 단순히 집 상태를 떠나서 여러 가지 수납이나 정리가 하나라도 빈 틈이 없어야 집주인에게 '이렇게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 집을 험하게 사용할 리 없어'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내 마음은 마치 지난 10개월 간의 방학 동안 핑핑 놀다가 당장 개학이 내일 아침이 되어 그간 밀린 방학숙제를 밤새 해 내야 하는 학생의 마음이 되었다. '이 집에서 얼마나 깨끗하게 살고 있는가!!' 검사받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삼시 세 끼에 간식까지 챙겨야 하고 이 방 저 방을 순서대로 초토화시켜놓는 두 남자아이들과 함께..


우선 싱크 후드를 닦고, 주방 찬장 문짝을 닦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개차반의 주부는 아니어서 큰 일은 아니었지만 몇 달간 기름때가 낀 주방 후드 겉면은 좀 힘들긴 했다. 화장실 바닥과 타일, 욕조와 세면대, 변기를 닦고, 베란다로 나가 창문과 바닥을 쓸고 닦았다. 가스레인지의 기름때, 하다못해 싱크 수도꼭지와 세면대 틈새까지 빛나게 닦았다. 분리수거가 일주일에 한 번 뿐이라 베란다에는 재활용품도 있었는데 그것도 예쁘게 정리했다. 벽에 테이프로 살짝씩 붙여둔 아이들의 그림도 다 떼어냈다. 뒤돌아보니 아이들이 작은방을 장난감으로 초토화시켰다. 장난감을 다 정리하고 흩어진 책들을 정리하는 동안 아이들은 침대가 있는 방을 인형으로 또 초토화시켰다... 이 망할 놈의 코로나.

아이들도 눈치가 있기에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정리하며 온갖 신경이 곤두서 있는 나를 알아챘다. 여섯 살 난 작은 아이는 자기 전 장난감을 열심히 정리했고 큰 아이는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책들을 낑낑대며 책장에 옮겨 정리했다.


남편이 퇴근한 뒤 저녁을 먹고, 또다시 정리 시작. 정리와 청소는 아이들이 잠들고 난 뒤 밤 12시가 되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이 정도면 완벽했다.

집주인이 도착하는 시간이 아침 8시이기에 알람을 7시 30분에 맞춰두고 평소보다 일찍 잠을 청했다.


7:30 am, 눈을 떴다. 내가 일어나는 소리에 아이들도 같이 깼다.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집안을 둘러봤다. 이불을 정리하는 동안 아이들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 인형 하나씩을 들고 놀이를 시작했다. 아침에 누군가 집에 오기에 집을 어지르면 안 된다는 것을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집주인이 도착하려면 1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7:53 am, 문자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서울 출장이 취소가 되었네요^^;;"



장난하는 건가 이 사람.

어이가 없어 털썩 앉았는데 아이들이 물었다.

"엄마, 아무도 안 와?"

응, 아무도 안 와.라고 이야기하니 작은 아이가 또 물었다.

"엄마 그럼 이제 장난감 가지고 놀아도 돼?"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왔다.


결혼 10년 차, 세 번의 이사와 네 명의 집주인. 우리가 그동안 집주인 복은 있었다며 남편과 흐뭇하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너무나 분해졌다. 우리가 그 간 내 집 마련에 크게 욕심내지 않았던 것에. 왜냐하면 우리는 전세살이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작에 이런 집주인을 만났더라면 '내 더러워서라도 내 집 산다!!'라고 생각했을는지.

정확히 4년 10개월 전에 지금의 집주인은 우리가 낸 전세금보다 4천만 원 비싼 금액에 이 집을 매입했다. 그리고 지금 이 집은 집주인이 매입한 금액에서 정확히 두 배가 올랐다.


집주인에게 답을 보냈다.

- 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 알겠습니다.


집주인은 답이 없었다.


남편에게 집주인의 메시지를 캡처하여 보냈다.

남편도 어이없어했지만 위로도 잠시 이내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번 원활한(?) 재계약을 위해 아무 때나 편한 때 오시라 답장 보내자..."


나는 더 이상의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만약 이 집에서 나간다면 그 사이 너무나 오른 전셋값 탓에 더 이상 이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와 남편의 생각은 순진하다 못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세입자는 언제나 '을'이다.

나이스 한 집주인은 없다.

설사 세상에 정말 친절하고 천사 같은 집주인이 있다한들, 살고 있는 이 집이 내 것이 아니라는 그 사실은. 빌려서 살고 있다는 그 사실은, 언제나 세입자를 위축되게 한다.


비록 인천의 손바닥만 한 빌라 한 칸이라도 내 집이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친정엄마의 이야기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곧 불혹을 앞두고 있는 나는 비로소 겨울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