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1. 부모 자식 간의 계약관계
얼마 전 아들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 한바탕 훈계의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와 아들은 말을 많이 했지만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고 각자의 이야기만 하였다. 나는 아들에게 모진 말을 쏟아냈다.
- 아빠와 엄마는 너에게 기대를 했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선생님들이 네 성적이 우수하다는 칭찬을 했기에 우리는 은근히 큰 기대를 했다. 그런데 아닌가 보다. 너는 엄마 아빠 보다도 독서량이 적고 겨울방학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과 보냈다. 내가 착각했다. 넌 그냥 그저 그런 수준이다. 하찮은 게임 따위에 인생을 낭비하면서 시간 아까운 줄을 모른다. 스마트폰 사용시간이 자동으로 제한될 때에는 네가 네 방문을 닫고 있으면 공부를 하고 있으리라 믿었었지만, 지금은 문을 닫고 있으면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신뢰가 깨어진 게 누구 탓이냐? 아빠는 이제 기대를 접을 테다. 그리고 엄마 아빠는 부자도 아니라서 한정 없이 네 인생을 돌봐 줄 수 없다. 딱 대학 입학 전까지, 대학에 입학하면 학비까지만 도와줄 예정이다. 그만하면 부모로서의 의무는 충분한 것 아니냐? 공부가 하기 싫다면 더 좋다. 매일 게임이나 해라. 대학도 갈 일이 없으니 싸게 먹히겠구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면 되겠네.
사춘기가 시작된 아들은 눈물을 쏟으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대꾸를 했다.
- 나도 다 계획해서 하고 있다고요! 아빠는 내가 하루종일 게임만 하는 것처럼 얘기하네요? 협박이네요? 내가 실망스러워요? 나도 힘들 때가 있어요. 정말 답답해서 미치겠다고요.
- 니가 집에서 스마트폰 게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게 있냐? 답답한 사람은 나지, 네가 답답할 게 뭐가 있냐? 게임이 잘 안 풀려서 답답하냐, 아이템을 못 사서 답답하냐?
내 말은 팩트였고 팩트를 말했더니 이상하게 나도 아들도 더 화가 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부터는 아들의 표정에서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아빠의 벽을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체념한 것인지, 아빠의 빈틈없는 논리에 굴복하게 된 것인지. 내 훈계가 계속되는 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평소에 나는 아이들의 스마트폰 사용에 꽤 관대한 편이었고 아내는 계획과 시간제한을 주장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 겨울 방학에 아들의 일과를 관찰하다가 내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아무래도 스마트폰이 주는 쉬운 도파민은 아이들 스스로 제어하기 어렵지 않은가. 이야기할 타이밍을 잡아보려고 몇 번 시도를 했으나 아들은 대화를 피했고 결국 쌓인 불만의 에너지가 이런 식으로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에서 평소 내 속마음이 어떠했는지가 드러났다. 나는 관대한 척, 아이들을 믿는 척했지만 사실은 아이들과 거래를 원했다. '아빠가 이 정도 양보를 해 줄 테니 너희도 적당한 선을 긋고 알아서 하는 모습을 보여라.' 그래서 아이들이 적당한 눈치를 보기를 기대했다. 나의 관대함이란 내 기준에서 '관대'이지 아이들 입장에서는 선을 넘어가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으름장'이었을 테다. 결국 내 관대한 기준을 슬금슬금 넘어가려는 아이들의 모습에 인내심이 무너졌다. 나는 '팩트와 옳은 말'을 쏟아냈고 아빠가 옳다는 판결을 관철하기 위해 부모 자식 간의 계약을 들이밀었다. 스마트폰의 폐해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아빠의 '영혼 없는 공정함'이 훈계의 핵심으로 올라왔다. 아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 것이 이 부분이었으리. 이제 아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테지. '아빠는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아빠는 부자가 아니라서 태산처럼 언제까지나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고 했다.', '아빠는 나에게 대학이라는 제한시간을 설정했다.', '부모님과 적절하게 거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진짜 문제는 게임을 많이 하는지 적게 하는지가 아니다. 내 표현에는 아비로서의 관대함이 아니라 가치 있는 투자 대상을 찾는 투자자의 비정한 모습이 숨어있었다. 아들도 점점 아빠와의 관계에서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이틀 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는 도중에 내 머릿속에서는 그날의 사건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복기되었다. 심작가에게 그러했듯 그녀의 할머니는 내가 아이를 옳은 말로 혼 내고도 왜 찝찝한 기분이 드는지, 감정까지 상하면서 실컷 싸우고도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기분이 드는지 알려주었다. 내가 했던 말이 옳은 말인지 뭔지 몰라도 아이에게 분명히 상처를 주었다. 나는 아들을 품지 않고 이겨버렸다. 나는 얼마나 형편없는 아비인가. 가슴이 미어졌다.
2. 말에 담을 수 있는 것들
작가의 할머니는 1905년 생으로 소박하고 평범한 분이었다. 당시의 대부분 여인들이 그랬듯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말을 멋들어지게 하거나 타고난 카리스마와 고상함이 뿜어져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분에게 남다른 성품이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부드럽고 엄격하지 않았다. 말은 적고 마음은 넓은 분이었다.
"할머니가 평생 한 말들의 80퍼센트는 단 열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려, 안 뒤야, 뒤얐어, 몰러, 워쩌’다. 표준어로 하자면 ‘그래, 안 돼, 됐어, 몰라, 어떡해’일 것이다."
말이 적은 것이 뭐가 그리 특별한 모습인가 싶지만 할머니의 표현에는 짧지만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마셜.B 로젠버그는 '비폭력 대화(NVC:Nonviolent Communication)'에서 말 한마디에 공감의 요소와 공감을 파괴하는 요소가 얼마나 쉽게 숨어들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우리는 어떤 일에나 기준을 설정하고는 기준에 맞는 행동을 좋거나 잘했다거나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기준에 맞지 않은 행동을 나쁘다거나 이상하다거나 틀렸다고 평가한다. 평가는 타자에 대한 규정으로 발전하고 이것은 자주 대화로 표현된다. 옳은 말을 해 주려거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을 도우려는 좋은 의도일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아끼는 마음으로 몇 마디 충고나 조언을 하려 할 때를 상상해 본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답시고 "내가 너 정말 아껴서 하는 말인데......"라며 시작한다. 충고나 조언에는 거의 대부분 상대방을 평가하는 과정이 숨어있다. 충고와 조언은 '내가 너를 평가해 보니 이러했다. 내 기준에는 저렇게 하는 게 옳다.'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이제 반대로 내가 듣는 이의 입장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런 식의 조언에서 상대방이 나를 정말로 아낀다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는다. 그의 기준에 내가 못 미친다는 씁쓸한 자괴감, 나를 은연중에 평가하고 있었다는 불쾌함 같은 감정이 일어난다. 충고와 조언을 해준 사람은 오히려 감정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공감이 파괴되는 지점이다. 평가는 비교와 관련 있다. 나와 타자, 타자와 타자를 비교함으로써 상황 대처의 잘잘못을 따져내려 하고 더 잘했을 때의 가정과 현실을 비교하여 실패라고 낙인찍는다. 사람은 비교당하면 심리적으로 자기 삶의 주인공에서 밀려난다. 나는 왜 이럴까, 쟤는 왜 저럴까, 그는 왜 저 모양일까, 라며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과 타인을 소외시킨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 정혜신 선생은 '충고, 조언, 평가, 판단(충조평판)' 이 네 가지를 묶어 말할 때 가장 피해야 할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런 말들은 심리적 폭력이다. 심작가 할머니의 짧은 표현들이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날 임상심리상담사인 친구가 심작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심리상담 전문가들은 상대의 어려움을 위로할 때 '당신이 어떠어떠해서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하면서 그의 상황을 함께 되짚어가며 공감을 표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상담사인 친구가 심작가의 평소 말 습관에서 그것보다 훨씬 좋은 표현을 발견했다. 심작가는 타인의 아픔을 접할 때 "저런.."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상대를 바라본다. 친구는 이 짧은 표현이 구구절절한 긴 표현보다 훨씬 공감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고 하였다. 상상해 보았다. 따뜻하게 바라보며 "저런.." 하는 간단한 표현을 내뱉으면 상대는 내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공감은 상대방을 온전히 주목하여 그의 감정에 내 마음을 밀착하는 태도다. 당신은 이 상황의 주인공이고 나는 당신의 아픔과 기쁨과 당신의 온 삶을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표현이다. 심작가는 이것이 할머니에게서 배운 태도였다고 고백한다. 할머니의 표현은 짧았지만 항상 이런 공감의 태도를 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할머니에게서 바다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날 때가 있지 않은가.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든든하고 편안한 사람, 한없이 기대고 싶은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 내가 어떤 잘못을 해도 따뜻하게 위로만 해 줄 것 같은 사람. 심 작가의 할머니는 그런 느낌을 주는 분이었던 것 같다. 내 아들은 잘못을 꼬치꼬치 캐는 아빠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나는 자주 그랬다. 혹시 잘못될까 봐, 혹시 허술한 행동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흉이 잡힐까 봐 조바심을 가졌다. 조심성 없이 밥을 먹다가 음식을 옷에 흘린다거나, 자기 물건을 잘 간수하지 못한다거나, 지저분한 것을 묻히고도 알지 못한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도 깐깐하게 지적하고 때로는 혼을 냈다. 아이가 이런 아빠에게 마음 편히 기댈 수 있을까. 문득 아빠가 지적할 만한 상황이 발생할 때면 지극히 사소한 것에도 내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을 깨닫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바다처럼 넓고 태산처럼 든든한 아빠는 못되었구나. 다만 스스로에게 조금 위로를 해 보자면, 부작용의 결과가 크기는 하지만 이것은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콤플렉스가 작용한 것이리.
사실 스마트폰 게임을 오래 하는 문제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재미있는 놀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다가 어머니에게 혼났던 적이 많았다. 절제가 필요할 때는 차라리 '안 돼~' 하는 짧은 말과 단호한 표정이 더 많은 소통일지 모른다. 왜 반대하는 지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릴 때는 조곤조곤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아이가 몰라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은 한층 조심스러워져야 하는 것 같다. 쓸데없이 많은 말로 아이를 승복하게 하려다가 아들과 나는 사랑이 아니라 거래하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공감이다. 존중이라는 것은 나를 낮추거나 상대를 높이라는 말이 아니다. 상대방의 선택을 들어주고 상대방의 감정을 바라보고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피는 태도다. 마셜 B. 로젠버그는 우리의 말을 잘 들여다보면 모두 '감사' 아니면 '부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였다. 아이가 "됐어! 혼자 있고 싶어!"라고 했다면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지만 내 편이 필요해.'라는 진짜 바람을 담고 있다. "아빠는 대체 왜 그래?"라고 했다면 '아빠의 그 말이나 행동은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일으켜. 아빠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실 난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훌륭하기를 소망하거든.'이라는 진짜 바람을 담고 있다. 진짜 원의를 끄집어내야 진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어느 날 교편을 잡고 계신 고모와 통화하면서 당신의 신세 한탄을 들었다. "퇴직을 앞둔 사람이라고 학교에서 나를 퇴물 취급한다. 물론 나이 든 사람과 일하는 게 불편하겠지. 그렇지만 고의로 나를 소외시키고 어쩌고저쩌고..., 일은 또 얼마나 못하는지 이게 다 결국 내 고생이야. 어쩌고저쩌고..." 화도 내고, 섭섭함과 실망스러움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들이 쏟아졌다. 자존감에도 상처를 입었는지 자기 방어의 보호막을 치고 했던 말을 반복하면서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갑자기 공감해 주어야겠다는 의무감이 솟구쳤다. '비폭력 대화'에서 배운 것을 써먹는답시고 고모의 감정을 확인하면서 차근차근 접근하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기대와 전혀 반대 상황이 펼쳐졌다.(내가 제대로 못했던 거였지만) 고모는 감정이 더 격해졌고 자기 방어의 벽을 더 단단하게 잠갔다. "너도 그런 놈들과 한 번 일해봐라. 분통이 터지는지 안 터지는지.", "아니,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니? 내가 이상해 보이니? 내 탓이라고 생각하니?" 내 기대와 전혀 다른 반응에 당황해서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들으면서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무의식 중에 해결책을 도모하려고 했구나. 고모가 원하는 건 '나 화났어.'를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얘야 내 편 좀 들어줘.'였구나!' 그래서 이렇게 맞장구쳤다. "아니, 이런 망할 놈들이 감히 우리 고모한테!!" 고모의 목소리가 활짝 밝아지며 대답했다. "그렇지! 바로 그거지!"
심작가의 할머니라면 아마도 "아이고, 워쩌~"라고 하셨겠지.
3. 사랑하는 방법에 대하여
프레드릭 배크만은 소설 [불안한 사람들]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아이들한테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부모는 필요 없어요. 자기 부모면 되지." 이 표현에 답이 있다. 훌륭한 부모가 되려는 강박은 자녀들을 엄하게 가르치고 자꾸만 안정적인 상황에서 일정 거리 떼어 놓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사자는 새끼를 훈련시키려고 절벽에서 떨어뜨린다는 어느 사기꾼의 거짓말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았다. 그래서 무의식 중에 자녀를 사랑할수록 일부러 시련을 주고 극복하도록 채찍질해야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적을 떠올려본다. 아니 지금도 내 상황을 곰곰이 살펴본다. 내게 필요한 부모와 가족이 나를 강인하게 키워줄 강력하고 능력 있는 코치인지,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랑하는 존재인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냉철하게 나를 비판하고 잘못을 따박따박 지적해 주는 책사가 필요한지, "좀 못해도 괜찮아. 나는 언제나 네 편이고 항상 네 뒤에 서 있을 거야. 필요할 때는 언제든 내 손을 잡아."라고 말해주는 위로자가 필요한지. 심작가에게 할머니는 넓고 따뜻하고 언제나 열려있는 안전한 품이었다. 할머니의 넓음은 가족들이 느낀 안정감의 원천이었다. 할머니는 세상의 우러름을 받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심윤경의 할머니였다. 그것으로 완벽했다.
렘브란트 - 돌아온 탕자 문득 성경에 나오는 '자비로운 아버지'가 떠올랐다.(루카 15, 11-32)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졸랐고 그것을 챙겨 집을 떠났다. 작은아들은 방종한 삶을 살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재산을 탕진했다. 거지 꼴이 된 작은아들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 집을 그리워한다. 그는 염치도 없이 아버지에게 품꾼으로라도 써 달라고 애원하리라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멀리서부터 작은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끌어안는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용서를 비는 말에 용서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기뻐하기만 하며 잔치를 벌였다. 작은아들은 준비했던 사죄의 말을 다 하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말을 끊고 종들에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했다. 작은아들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잘 드러난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이런 성품을 몰랐을 리가 없다. 과연 그의 반성은 진심이었을까? 이제 다시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그가 진심으로 뉘우친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자비로운 아버지는 아들이 또 속이더라도 몇 번이든 속아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이런 사랑을 보아야 한다. 첫째 아들은 이런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도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첫째 아들은 완벽한 논리로 옳은 소리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첫째 아들이 같은 요구를 했다 해도 똑같이 아낌없는 기다림으로 대했을 것이다. "얘야,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그 아이가 돌아와서 나는 기쁘고 행복하구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서 내가 본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다같이 넓고 태산처럼 든든한 존재'였다. 할머니는 심작가에게 그런 존재였다.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기다리고 바라보아 주는 존재였고 사랑하는 사람이 외롭지 않게 그의 편이 되어 주는 존재였다. 거기서 파생되는 안정감은 삶에 큰 힘이다. 돌아온 탕자나 그의 형은 모두 아버지의 자애로움 덕분에 항상 안정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모습이지만 너무나 어렵다. 부모가 되면 누구나 조바심을 내게 되는 것 같다. 내가 겪었던 실패를 자녀들도 겪어야 할까 봐 두렵다. 그리고는 빨리 그들에게 고난을 이겨낼 의지와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눌린다. 나 자신은 평생 그렇게 강해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나는 수없는 실패를 겪어왔고 몇 번이고 다시 기회를 얻고 싶어 하면서도 아이들에게는 여러 번의 '다른 기회'를 허용하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내가 강하지 못하므로 마음이 더 조급한 것이다. 조급증은 인간이 처한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인생은 유한한데 그것을 많이 의식하는 나이가 될수록 시간은 더 빠르게 느껴진다.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생각은 늘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내가 과거에 했던 실패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미 없는 후회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이런 생각은 내 가까운 사람들의 삶에도 비슷하게 억압적인 방식으로 간섭하게 만든다. 내 조급증은 전염되고 말 것이다. 조급증의 위험성은 한 번의 실패로도 지나친 충격이나 좌절을 안게 된다는 데 있다. '이번 생은 늦었어', '이번 생은 끝났어' 같은 우울하고 못된 유행어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안정과 희망이 얼마나 있는지 측정하는 척도가 아닐까.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몇 억이 들어간다고 보도했던 천박하고 최악이며 엉터리이고 머저리 쓰레기 같은 뉴스는 30, 40대 부모 세대에게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였다. 그러나 부모들보다 그 자녀들에게 더 무시무시하고 지독한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성장과정을 사랑과 자애가 가득한 행복한 시간이 아니라 자본을 투입하여 생산되는 물건처럼 느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자기 성장에 몇 억이 들어갈 수 없는 경제적 형편에 놓인 아이들은 태산처럼 기대고 싶은 부모에게도 편히 안기지 못하고 마음속은 언제나 두려움과 투쟁으로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시작부터 불량인 것 같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안 그래도 이런 식으로 세상에 넘쳐나는 것이 '충조평판'인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까지 '열심히'라는 충고를 보탤 필요가 있을까. 상처받은 가족에게 심작가의 할머니처럼 "괜찮아~"하며 토닥여 줘야겠다.
아! 이제 아빠다운 태도로 다시 편지를 쓴다.
'아빠가 틀렸다. 미안하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우리 행복하게 살자. 이런 것도 해보고, 저런 것도 해보아라. 실수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다. 아빠는 언제까지나 너희 뒤를 받쳐주마. 두려워하지 마라. 혹시 살면서 겁이 난다면 아빠를 생각해라. 그리고 힘들면 언제나 아빠에게 와서 안겨라. 나는 항상 온 힘을 다해 너희를 지켜줄 테다!'
허세가 조금 들어가도 괜찮다. 아이들도 자라면서 언젠가 부모의 사회적 크기를 알게 된다. 내가 돈을 좀 못 벌어도 사회적 위치가 보잘것없어도 상관없다. 아이들에게 훌륭한 부모는 필요 없다. 자기 부모가 필요하다.
아들이 히죽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와! 우리 아빠 또 왜 저러는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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