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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니피캇 Jan 11. 2023

자아(自我) 같은 건 없다

닉 채터, 생각한다는 착각


닉 채터, 생각한다는 착각, 2021


1. 꿈


 꿈을 꾸는 동안에는 잘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격적인 내용인 경우가 있다. 나는 최근에 그런 류의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나에게 아들이 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는 아들 하나, 딸 하나다. 꿈에서 둘째 녀석은 내 딸과 전혀 상관없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현실에서 친구의 아들이었다. 꿈에서 이런 이상한 상황이 나타났을 때 주로 어떻게 반응했던가? 그날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는 했던 것 같은데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만일 꿈이 보여주는 모습이 틀렸다고 판단했다면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딸을 잃은 사실을 호소하면서 잠결에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꿈속의 상황을 납득해 버렸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다. 이것은 인지부조화다. 상황에 맞추어 내 생각을 바꾸어 버린 거다. 이렇게 중요한 내용도 인지부조화에 걸리면 꼼짝 못 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이나 앞뒤가 맞지 않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을 연상해보면 된다. 꿈속에서 아들 둘 아빠로, 다른 아이를 내 둘째 자식으로 여기고 있다가 문득 깨어났다. 아직 캄캄한 밤이었다. 잠에서 깬 직후라서 꿈 내용이 선명했다. 내가 꿈에서 가졌던 마음과 행동이 기억났다. 그리고 아내와 나 사이에서 자고 있는 딸아이를 돌아보았다. 꿈 속이었지만 내가 내 딸을 잠시 잊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급격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깊은 밤중이었지만 충격 때문에 정신은 또렷해졌고 어떻게 사랑하는 딸을 잊을 수가 있느냐며 자책했다. 두 번 다시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되뇌며 살며시 딸아이를 끌어안고 마음속으로 용서를 구했다. '그저 꿈이었을 뿐이야.'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동이 틀 때까지 결국 다시 잠들지 못했다.


 

1-1. 꿈이란 무엇일까?


 꿈이 무엇인가? 일부 심리학적 전통은 꿈이 어떤 무의식이나 숨겨진 본능, 또는 욕구를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꿈이 초자연적 현상을 담고 있다거나 운명적인 계시를 준다고 믿는 어리석은 미신에 빠진다. 꿈이 무의식과 숨겨진 욕구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미신보다는 고차원적, 지적 판단의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뇌 과학의 발달에 따라 그것 역시 객관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일종의 문학적인 해석으로 보는 입장들이 힘을 얻고 있다. '생각한다는 착각'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 신경과학이 밝혀낸 꿈이라는 현상을 조금 공부해 두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뇌과학과 심리학을 오가는 실제 실험들을 기반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세상을 인식하고 사람의 반응을 총괄하는 뇌의 기본적인 활동을 읽어 둔 덕분에 논의의 의미가 더 풍성하게 다가왔다. 이전에 읽었던 뇌과학 책의 기억들이 묶여서 끊임없이 '아하!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지금부터 꿈에 대해 내가 쓰는 내용이 그런 것이다. 뇌 활동 가운데 꿈은 아주 독특한 현상이다. 꿈에서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낀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몸은 가만히 누워있다. 어떻게 가만히 누워 있으면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전혀 상관없는 장면을 누빌 수 있는 것일까? 게다가 모든 감각을 실제와 똑같이 느낄 수 있다. 꿈을 만들어 내는 뇌 활동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사고능력에 대한 닉 채터의 주장이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인지 쉽게 이해된다.


 눈과 시각신경이 내 앞에 펼쳐진 장면을 받아들이면 뒤통수에 있는 후두엽의 시각피질에서 이 신호를 영상화한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은 눈과 시신경 세트가 외부 상황을 그대로 사진 찍듯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시각피질이 해석하여 영상화 한 장면이다. 눈이 멀쩡해도 시각피질에 문제가 생기면 제대로 영상화할 수 없다. 시각피질은 실제로 보는 것을 영상으로 변환하기도 하지만 상상으로 떠올린 이미지도 영상화할 수 있다. 그래서 눈에 손상을 입어 시력을 잃어도 시각피질이 온전하면 '꿈에서는 볼 수 있다.'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른 지각들도 비슷하다. 신경이 받아들인 정보를 뇌가 해석하여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뇌는 상상한 감각도 실제 느낌으로 만들 수 있다. 시각피질이 영상화한 정보와 다른 지각 정보들은 마루엽(또는 두정엽)이라고 부르는 뇌 영역에서 종합되어 총체적인 감각으로 인식되는데 실제 감각 정보가 없어도 시각피질과 마루엽의 협력만으로도 실제 감각을 재현할 수 있다. 이것은 뇌가 지어내는 세상이다. 뇌는 상상하는 장면을 실제로 몸이 감각하는 것처럼 꾸며낼 수 있다는 의미다. 가장 흔한 예가 꿈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꿈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먹고, 심지어 용변을 볼 수도 있다.


 꿈에서 일어나는 이 상상 정보들은 별로 특별한 패턴이 없다. 기억과 상상이 혼재되어 아무렇게나 만들어진다. 말했다시피 지각 신경에서 오는 자극이 없는데도 시각피질과 마루엽은 실재 지각과 똑같은 정보를 머릿속에서 구성할 수 있다. 그런 정보가 구성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으나 신경과학은 그 이상의 내용에 관하여 현재로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개인의 무의식에 있던 내용이나 숨겨진 욕망이 드러난다고 한다면 그 정보가 왜 무의식인지 왜 숨겨진 욕망인지에 대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것이 구분되는 지는 물론이고 실재하는 지도 알 수 없다. 꿈에서 겪는 감각적 경험들이 사람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처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영상화하는 방식인데, 지각 자극이 주어질 때나 주어지지 않을 때나 영상을 생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후천적으로 시력을 상실했으나 자신의 시력 상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톤증후군(Anton Syndrome) 환자들이 있다. 이들은 보지 못하는데 보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들이 시력 상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각 자극이 없는데도 뇌에서 시각적 영상이 계속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신경과학자들은 안톤증후군 환자들이  후천적 시력 상실이기 때문에 '본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그들이 본다는 주장도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안톤증후군 환자들은 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실제와 상관없는 영상을 본다. 즉, 상상한 장면을 본다. 이때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만일 안톤증후군 환자가 물건에 부딪히면 자신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안경을 안 써서 그렇다거나 대낮에도 주변이 왜 이렇게 어둡냐는 식으로 문제를 설명한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보면 실제로 보이지 않으니 사실과 다르지만 확신에 차서 설명한다. 시각이 필요한 행동을 요구받으면 당연히 실패한다. 그러나 다리가 아프다거나 팔이 아파서 행동을 수행할 수 없다며 엉뚱한 핑계를 만들 뿐 자기가 보는 장면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꿈에서 이상한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는 꿈에서 밥이 갑자기 흙이나 종이로 변해도 그것을 밥이라고 여기고 계속해서 먹는다. 종이를 먹고 있으면서 -심지어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꾸역꾸역 먹는다. 배우자나 연인 또는 잘 모르는 이성과 스킨십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거나 동성 친구로 바뀌어 있는 경우가 생기면, 감정이 아까와 같지 않음에도 원래 그 상대가 맞는 듯 계속해서 파트너로 수용한다. 여기까지 꿈에 대한 경험이 나와 비슷하다면 닉 채터의 책에서 충격받을 준비가 되었다.  



2. 의식이란 그저 그 순간에만 반응하여 끊임없이 꾸며대는 이야기꾼이다.


 닉 채터의 '생각한다는 착각'의 원제는 'The Mind is Flat.' (마음은 평면이다.)이다. 저자는 이 표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한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심오한 생각의 주체인 자아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저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흔히들 마음을 빙산에 비유한다. 의식이 물 위에 드러난 빙산이라면 무의식은 물속에 잠긴 훨씬 거대한 얼음 덩어리라고 말이다. 이 책으로 인해 무의식에 대한 비유는 가루가 된다. 마음이 평면이라는 표현은 런 직관을 정면으로 깨뜨리기 위한 표현이다. 닉 채터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아주 얄팍한 것일 뿐이다. 꺼뜨릴 수 없는 신념과 가치관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느끼는 자극에 그때그때 자기 합리화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증거를 들이밀어도 자신의 왜곡된 기억이 옳다고 주장하는 오류, 혹시 내 대답이 틀리면 사건의 인과관계를 왜곡하거나 자기 입장을 바꿔버리는 인지부조화, 자기가 주장하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취하고 상반되는 정보를 무시하는 확증편향 등 인간의 사고 과정에 얼마나 자주 비논리적이고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은 깨어있을 때에도 꿈에서처럼 깊은 생각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통찰, 성찰, 숙고 등의 뇌 활동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생물학적 기계로서의 인간 뇌는 그런 활동을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 싫어한다.


2-1. 쿨레쇼프 효과


 '쿨레쇼프 효과'란 러시아의 영화감독 레프 쿨레쇼프가 주창한 영상 편집의 효과다. 이것은 심리학자들에게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론이다. 유튜브에서 쿨레쇼프 효과를 검색하면 쿨레쇼프가 영화배우 이반 모주힌을 주인공으로 만든 영상이 나온다.  여러 가지 영상을 앞에 배치하고 이를 바라보는 듯한 편집으로 클로즈업한 모주힌의 얼굴 영상을 이어 붙였다. 음식을 찍은 영상에 이어 붙인 모주힌의 얼굴, 어린아이가 죽은 관을 찍은 영상에 이어서 나오는 모주힌의 얼굴, 관능적인 포즈로 누워있는 여인을 찍은 영상 뒤에 이어진 모주힌의 얼굴. 이 세 가지 영상으로 쿨레쇼프는 관객들에게 설문을 하였는데 모주힌의 표정에서 그의 감정을 읽어 보라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음식에 이어지는 얼굴에서는 배고픔이 느껴진다고 하였다. 어린아이의 죽음을 보는 모주힌에게는 슬픔과 침통함이 느껴진다고 하였다. 관능적인 포즈로 누워있는 여인을 보는 모주힌에게는 기쁨과 사랑에 빠진 표정이 보인다고 하였다. 예상을 하였는지 모르겠지만 모주힌의 표정 영상은 모두 무표정을 연기한 동일한 장면이었다. 이 실험의 심리학적 의미는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고도 그때 경험한 주변 상황의 영향으로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 내용을 미리 알고 보면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즉, 인간은 사실 그대로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 우리의 경험은 있는 그대로의 경험이 아니다. 제각각 그 순간순간에 자기 성향이나 능력에 따라 '해석'한 의미의 누적이다. 이러한 특징이 얼핏 보기에는  제시된 정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정보의 패턴을 분석하고 예상하여 비워진 틈새의 정보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래 그림을 볼 때처럼 말이다.


 닉 채터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는 어떤 지식을 한 영역에서 전혀 관련이 없는 주제로 옮겨 버리는 뇌의 뛰어난 유연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뇌는 사실과 전혀 상관없는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생성하여 기억으로 저장한다. 날 것 그대로의 기억이란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앞의 그림에서 그리지도 않은 공을 볼 뿐만 아니라, 검은 가시모양의 평평한 2차원 그림을 3차원의 원뿔로 보게 된다. 세상을 경험할 적마다 일어나는 이러한 의미의 생성이 각자의 시선에 따라 누적되면, 헛소리가 가득 쌓인 어리석은 자가 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창의성을 발휘하는 뛰어난 자가 되기도 한다. 덧붙여서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아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먼저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같은 현상을 보고도 각자 자기 멋대로 해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얕은 지적 능력으로 끊임없이 해석하고 이야기를 꾸며낸다. 자기가 원하는 정보만 취사 선택하고 싫어하는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할 수도 있다. 편향과 인지부조화에 빠지면 외부의 지적을 수용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편향에 빠지지 않는다. 인공지능의 빅데이터는 취사선택이 없고 해석이라는 가공을 거치지 않는다. 인간은 쿨레쇼프의 영상에서 모주힌의 얼굴을 세 가지 감정으로 해석하지만 인공지능은 픽셀을 분석하여 똑같은 이미지임을 확인할 뿐 아무런 의미도 추가하지 않는다.

 


3. 마음은 있을까?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철학자였다. 모든 것을 의심하였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상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지만 내가 의심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분명히 사실이라는 생각에 기반한 명제다.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의심 없는 사실이니, 의심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결론이다. 이에 대해 영국 경험론의 데이비드 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의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면 의심하지 않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자아의 본질에 대한 추가적인 의심이다. 나아가 과거에 생각하던 나와 지금의 생각하는 나는 같은 자아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한다. 현대 물리학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가 영양의 섭취와 배설을 거치면서 약 7년의 주기로 완전히 교체된다는 계산 결과를 내어 놓았다. 이로써 흄의 의심은 새로운 국면을 만났다. 7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같은 나일까? 죽은 데카르트와 흄은 의심하기를 마쳤으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의 마음은 무엇일까? 자아란 무엇일까?


 닉 채터의 '생각한다는 착각'을 세 번 읽었다. 이 책은 충격 그 자체다. 닉 채터는 우리가 자아라고 여기던 '마음'이 그 순간만을 모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는 이상한 해석 기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저마다의 깊은 신념이나 무의식의 세계가 없다는 것. 기억은 표면적인 해석이 겹겹이 쌓인 왜곡의 뭉치이며, 해석하는 능력은 자신의 기억이 사실인지 아닌 지를 검증하기보다 사실이든 아니든 자기 기억에만 의지하여 일관된 경향을 유지하려 할 뿐이라는 것. 그나마도 기억을 조금 조정당하는 상황에 놓이면 입장을 뒤집어 버리는 인지부조화까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증거들이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기존의 틀을 깨어야 본질을 발견할 때가 있다. 불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본질 아닌 것을 본질로 생각하고
본질을 본질 아닌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본질에 이르지 못한다.
잘못된 생각의 영역에 머무르기에.(담마빠다 11절)


 과학도 기존의 잘못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야 비로소 모르던 부분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의 직관은 불완전하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곳에서 본질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언제나 일단 방향을 잡으면 마음이 지어낸 시나리오에 사로잡혀 그 방향으로만 집중한다. 인간은 멀티플레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한 번에 4~5글자 이상에 포커스를 두지 못하고 때때로 오타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엉뚱한 방향에서 자아를 찾고 있었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자아의 본질은 사실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이 무엇일까? 자아란 무엇일까? 닉 채터는 신념을 담고 있는 마음도 없고 가치관을 살아가는 자아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한편으로 데카르트의 논리로 돌아가는 실마리를 남겼다. '인간은 해석한다.' 인간의 해석은 특별하다. 사실 그대로를 저장하는 인공지능 빅데이터와 달리 해석의 결과는 지혜와 어리석음을 별할 수 있는 정보이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정보이다. 자아의 본질이 우리의 예상보다 너무나 얇고 보잘것 없다고 밝혀지더라도 어찌하겠는가! 10만 년 전쯤의 인류는 현인류에 비해 자아가 더 얇았을지도 모른다. 10만 년 후의 인류가 존재한다면 지금보다 더 깊은 자아를 형성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교에는 하느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시작되었고 세상 끝 날에 완성된다는 예언적 교리가 있다. "이미 그러나 아직(이미 시작된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이라는 표어로 제시되는데 인간의 진화를 바라보는 태도로 의미를 확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종교적 구원을 생물학적 진화와 연결하는 것이 좀 무리가 있지만 (그리고 생물학적 진화가 반드시 더 진보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십만 년  미래의 인류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더 뛰어나게 진화할 것을 기대한다 그런대로 괜찮은 유가 아닐지. 지금은 표면적으로 밖에 알지 못하고 신념과 자아를 내재화하기 어려운 존재들이지만 희망이 있다. 우리는 우주의 거대한 역사를 생각할 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기 단계의 인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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