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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니피캇 Dec 19. 2022

가난 구제는 정말 나라님도 못할까?

J.D 밴스, 힐빌리의 노래

J.D 밴스, 힐빌리의 노래

J.D 밴스, 힐빌리의 노래, 2017


1. 기초생활수급자의 딜레마


  어느 날 회사에서 자신을 기초생활수급자라고 밝힌 사람의 전화 문의를 받았다. 본인이 일을 하여 소득이 생기게 되면 기초수급 지원이 끊기느냐는 질문이었다. (우선 나는 관련된 내용을 정확히 안내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나의 일이 그런 정책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사회복지와 관련 있지도 않다. 다만 누구나 가끔 판단력이 흐려지는 때가 있다. 그런 때가 남들보다 조금 더 자주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럴 때면 아무나 붙잡고 묻게 될 수도 있다. 굳이 답변해 주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관련 내용을 알아두면 계속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알아보았다) 검색을 조금 해보니 이런 경우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수급자 급여의 종류나 금액도 다양하고 일을 할 수 있는 형편도 다양하다. 수급자의 조건을 유지하면서 근로 소득을 추가하려면 받고 있는 급여의 종류와 금액, 그리고 가족 구성 등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전략을 짜야한다.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발생하면 수급이 끊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해주고 자세한 숫자는 주민센터 사회복지 담당자에게 문의해 보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개인차에 따라 이런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해를 해도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생각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나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산업안전보건과 관련된 일을 한다. 내 직업의 특성상 소득이 낮은 분들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문의가 적지 않다. 이런 문의가 자주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내 주변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뉘었다. 기초수급 자격을 지키려는 태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그런 태도 때문에 평생 기초수급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악담을 하며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경제적 전략을 짜야한다는 관심 어린 충고를 하는 사람이나 기초생활 지원을 이렇게 기계적으로 하면 어떻게 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겠느냐며 정책의 맹점을 지적하는 사람이나 그들은 어떤 개인적 사정으로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지 연민하는 사람들은 아주 적었다. 안타깝다. 누구라도 수급자의 상황에 처한다면 비슷하게 되지 않을까? 일을 하면 안정적인 지원금을 끊어 버리는데 일하여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불안정한 일용직이나 단기 계약직이라면 어떤 바보가 안정적인 지원금을 포기하고 불안정한 노동을 선택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초생활 수급자들의 저 딜레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칠 뿐이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일까? 가난한 이들이 받는 고정적인 지원이 세금에서 지출되고 무상이라는 생각에 배가 아파서일까?


2. 터널 시야


 J.D 밴스는 속칭 힐빌리라고 불리는 미국의 하층민 백인 출신이다. 어린 시절 그의 세상은 우울하고 절망적이고 가난한 터전이었다. 불안한 가정환경은 정서적 불안을 키웠고 산업구조의 변화로 그 지역 전체가 침체로 밀려들면서 경제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희망을 그려볼 수도 없었다. 대체로 가난한 이들은 삶을 통째로 침체로 몰아넣는 대단히 위험한 현상인 터널시야에 빠진다. 터널시야란, 터널 안에 들어선 사람처럼 눈에 보이는 출구 하나에만 몰두하여 다른 부분을 의식적으로나 인지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다. 시야가 좁기 때문에 당황하고 실수가 잦고 문제 해결의 다양한 방법을 고려하지 못한다. 자주 어리석은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고집의 기저에는 터널에 갇혀 자기가 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일단 터널시야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문제가 생긴 분야에서 중장기적인 여유를 찾기 전에는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정신적 현상이지만 일종의 물리적 한계에 더 가깝다.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방면에서 터널시야에 갇힐 수 있다. 그 가운데 가난은 인생의 여러 측면을 방해한다. 근본적인 생존을 위협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난의 터널에 갇힌 사람들에게 약한 의지를 탓하는 말은 '너도 열심히 일하면 빌 게이츠처럼 될 수 있어.' 라던가, '열심히 훈련하면 우사인 볼트만큼 빨라질 거야.' 같은 종류의 응원과 함께 '세계 2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리'다.


- 가난의 굴레

 게을러서 가난해지기도 하겠지만 가난할수록 더 게을러지는 악순환도 일어난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지적한다. 야구선수가 되겠다면서 코치가 무서워 야구부에 들어가지 않고, 사무직에 채용되기를 원하면서 관련 자격을 취득하려는 공부는 하지 않고 방법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람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입으로는 떠들면서 정작 자신은 파트타임 일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목격하면 그 과정을 배우려고 할 생각은 않고 결과만 부러워하거나 그가 행운아였다거나 보통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실력자라고 규정해 버리고 만다. 자기와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먼 존재라고 못 박아서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도전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 노력할 수 조차 없는 모순적 현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다양한 사회조건적 영향이 있다. 힐빌리들의 마을에서는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특별히 똑똑하지 않으면 그런 기회를 아예 추구하지 않고 가족이 후원하지도 않는다. 분위기가 이렇다는 것은 중요한 현상이다. 마약과 알콜 중독에 빠진 부모들도 자식들에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일장연설을 늘어놓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부모 본인들도 모르고 당연히 자식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도 없다. 이런 절망적 터널에서 가난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탈출구가 뭐가 있었을까. 가정폭력과 체념과 술과 마약과 범죄 등 현실도피의 도구들이다. 이런 모순적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부모들이 갇힌 터널에 함께 갇힌다.


- 인지부조화의 침투

 중장기적 여유를 가져올 수 있는 행운이나 직접적인 도움 없이 터널 시야에 갇힌 사람들을 구제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자신의 가난한 현실에 돌파구가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돌파구를 인정하는 순간 자기 무능을 인정해야 하고 돌파구를 찾아 돌파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 때문에 그들을 탓할 수 없다. 그들을 가둔 터널은 정말 어둡고 막막하다. 터널시야에 갇힌 사람들에게 힘찬 삶의 의지를 요구하는 것은 마치 덧셈 뺄셈을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미적분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차라리 돌파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지부조화를 공고히 하여 가난한 현실이 자기 탓이 아니며 그래서 자기는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그들은 터널시야에 갇혀있기 때문에 터널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의 시야를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 상황을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은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은 다시 현실 외면으로 이어진다. 무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두려움 때문에 더욱 인지부조화를 고집한다.


- 중장기 계획과 목표가 없다.

 터널시야와 인지부조화로 발생한 편향된 사고방식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마음을 이끈다. 대부분 공부와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무식을 인정하더라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독서가 지식과 지혜를 가져오고 장기적으로 삶의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진다는 충고를 온 힘을 다해서 외면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행운에만 집중하고 그들의 노력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물론 가난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반드시 독서를 하는 것은 아니고 독서가 가난을 직접적으로 탈출시켜 주는 것도 아니지만 독서와 공부하는 태도는 가난 탈출과 분명히 정비례한다. 꾸준한 독서와 공부가 터널 시야를 깨뜨릴 수 있지만 가난의 터널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장기적 안목이 없다. 눈앞의 하루하루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을 볼 여유도 없고 보려는 의지으니 중장기 계획의 노력보다는 로또와 같은 대박 따위에 심취한다. 심한 경우 도박에 빠져든다.



 혼돈은 혼돈을 낳는다.
불안정은 불안정을 낳는다.
여기가 바로 미국의 힐빌리 가정이다.
(본문 중에서)



3. 심리적 안정감의 중요성


 어린 밴스는 할머니에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다.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기에 가족과 자기 마을이 겪고 있는 가난과 두려움과 혼란이 끝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통을 곧 끝내 줄 절대적인 희망을 얻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소식은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이지만 가장 강력한 안정을 제공할 수 있다. 밴스는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싶었다. 누구라도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달래어 주기를 바랐다. 실제로 종교가 주는 안정감은 매우 실질적이다. 절대적 존재의 사랑이라는 교리적인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기도나 도덕적 행동, 특수한 종교적 규칙 등의 종교생활 자체가 공동체에 소속감을 제공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소소한 성취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패배감에 절어 있는 사람들에게 일상의 작지만 반복되는 성취는 자존감을 키워주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다.

 

 마음의 여유는 곧 시야의 여유다. 조직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안정적인 삶을 성취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소위 '헝그리 정신'이라는 용어는 틀렸다.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 극복 의지를 요구하기는 어렵다.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한 사람들에게 폭넓은 사고를 기대하면 안 된다. 실제로 성공한 운동선수들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일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통계에서는 매우 드문 이야기다. 드물기 때문에 더 특별하게 여겨지기는 하지만 그들은 타고난 천재일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인 가난한 사람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요구하면 안 된다. 게다가 어린 시절 천재성을 인정받던 사람들도 불안한 환경적 요인 때문에 인생을 통째로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인간의 성장에 안정감이 중요하다.(애덤 그랜트, 오리지날스)

 

4.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태도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자격 유지를 위한 노력이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태도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그들과 대화를 해보면 좌절과 생존 욕구와 단절과 잘 살고자 하는 욕구와 도움을 갈구하는 마음이 뒤범벅된 불안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출구가 아주 먼, 빛이 거의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혀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순간순간 눈앞의 문제에 항상 허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수급자격은 안정감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타인들은 앞으로 나아가려면 그것을 포기하라 다그친다.


- 큰 구렁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관심은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키운다. 성경은 이 간극을 "큰 구렁"이라고 표현했다.(루카복음 16장)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았는데 그 부자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부자의 집 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살았다. 라자로는 평생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고 부자도 세월이 지나 죽었다. 부자는 죽어서 고통을 받았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이스라엘의 신앙 시조)의 곁으로 갔다. 부자가 고개를 들어보니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부자가 외쳤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나는 부자가 죽어서 조차 끝내 라자로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은 것이 '큰 구렁'이라는 단어와 함께 그의 마음속 간극이라고 생각한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진실된 위로가 나올 리 없다.


 - 공감

 현대 신경과학과 심리학은 공감의 기제가 타자와 나를 동일시하며, 타자와 나에게 동일한 뇌 반응이 일어나는 물리적 실재임을 밝혀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도 끝내 라자로와 대화하지 않는다. 라자로는 부자의 집 문간에서 평생 부자의 관심과 자비를 구걸했으나 관심받지 못했다. 부자는 생전에 라자로의 고통을 공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자기 생각뿐이다.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식혀달라고 하고, 뒤에 이어지는 대화에서 라자로를 자기 가족에게 보내어 경고해 달라고 애원한다. 라자로가 그렇게 고통을 겪었다는 이야기에 안타까워하거나 자신이 과거에 무관심했던 태도를 미안해하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들의 관계 사이에는 여전히 '큰 구렁'이 있다.


 고통받는 이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도 안타까운 감정이 전혀 동하지 않는 진짜 소시오패스는 적지만, 고통받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공공의 지원과 정책에 부정적인 의견을 쏟아내는 소시오패스적인 태도의 사람들은 여론을 형성할 만큼 많아진다. 공감 신경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 안에서도 제각각 편향이나 인지부조화 같은 다른 심리적 기제가 공감을 방해하는 것 같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남들에게 형편없는 인성으로 비치는 것은 두려워한다. 착하다는 칭찬에 즐거워하고 악하다는 흉은 싫어한다. (세월호 유가족이나 이태원참사 유가족에게 악담을 쏟아내는 부류의 숫자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도 이와 비슷하다. 비인간적 악담을 쏟아내 놓고 스스로를 악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논리가 정당함을 인정받으려고 애쓴다. 소시오패스나 소시오패스적인 태도나 결론적으로 악행인 것은 변함없지만.)  


5. 환경 조성


 네덜란드의 저널리스트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에서 읽었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효과적인 방책이 인상적이었다. (뤼트허르 브레흐만,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과거에 아프리카에 구호 물품이나 식량을 보내던 시절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구호활동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개선이 되지 않았다. 정말 속담대로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하는 걸까? 그럴 리가. 만일 그 말이 맞다면 전 인류는 여전히 들판에서 짐승을 사냥하고 식량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어야 옳다. 사유재산과 부(富)라는 개념은 호모사피엔스의 시조들에게는 있지도 않았고, 인간 사회가 굶주림을 고민하지 않게 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인간은 원래 아무것도 없이 가난하게 태어났다. 그러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풍요로움으로 진보하고 있을까? 최근 실험적으로 저소득 국가의 극빈층 사람들에게 구호품이 아닌 현금으로 기본 소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수행하였는데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저축할 여유가 생겼고 저축이 생기자 내일이 불투명하고 매일 생존을 다투어야 하던 삶이 안정을 찾은 것이다. 저축으로 얻은 안정이 자녀 교육과 재투자로 이어졌고 중장기적으로 계획할 여유가 되었다. 당연히 생활도 점점 개선되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돈을 술이나 도박으로 탕진하였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실험을 감시의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좋은 먹잇감이기 마련이다. 자극적 뉴스이니 뉴스팔이들의 그물을 벗어날 수도 없었을 테다. 그러니 언제나 성공의 사례보다 실패의 사례가 더 크게 부각된다. 때문에 진실은 가려지고 정책은 반대 여론에 밀려 중단되곤 한다. 그러나 이 통계적 개선은 시작에 불과하다. 일부를 성공적으로 구조하면 그들이 씨앗이 되어 훗날 지역 발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러면 처음 구조에 실패했던 사람들도, 아니면 적어도 그 후손들에게 기회의 길이 또 열릴 수 있다. 기쁘게도 성공의 비율은 반대자들의 탁상공론을 부셔버릴만큼 매우 높은 수준으로 일어났다. 지역 전체의 막혀있던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기아는 수십 년 전의 상태보다 훨씬 개선되고 있는데 이것은 선진국의 구호물품 때문이 아니다. 여유를 찾은 그들 스스로가 계획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모든 선진국들이 거쳐 온 역사이기도 하고 현재의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이 진보하는 실제상황이기도 하다. (혹시 나의 주장에 의구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를 참고하시길 권한다.)

 

 6. 맺음


 저자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가난의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방향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왜 우리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아픔을 느끼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일말의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메시지다.

 밴스는 이렇게 자문한다. '인생에서 개인 탓은 어느 정도인가? 부모의 탓은 어느 정도인가? 그럼 그 부모에게서 부모의 개인적인 잘못은 얼마나 되는가? 어디까지 비난해야 하고 어디서 공감해야 하는가?' 나는 이런 질문 앞에서 언제나 말문이 막힌다. 세상은 원인을 추적해 들어갈수록 더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기술이든 철학이든 인간의 현재 수준으로는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 문제를 붙잡고 살아야 한다. 그것은 명백하게 '사람다움의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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