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레드 다이아몬드, 문명의 붕괴
나는 개신교 재단의 사립중학교를 나왔다. 1학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종교 과목이 있었는데 교사는 어느 교회 목사님이었다. 목사님은 말을 정말 잘했다. 그중에 진화론을 비난하던 수업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만약 진화론이 옳다면 지금은 왜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간 단계의 동물이 존재하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내가 보기에, 반박할 틈이 없는 완벽한 근거였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대결시키는 그의 강의 자체가 당시의 나에게는 새로운 사고방식이었기에 신선하기도 했다. 이 수업으로 인해 가톨릭 신자인 나도 한동안 진화론을 적으로 간주 하였더랬다. (나중에 내가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이 바로잡아 주셨다.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진화론과 대결하는 이론이 전혀 아니다. 다만 어디에나 근본주의자들이 있을 뿐이다.) 과학의 발전과 상관없이 아직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들이 그런 편향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진화적인 한계 때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진화론적 발견에 의하면 진화라고 부를 만한 변화는 최소한 2만 년의 시간이 흘러야 겨우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2만 년 전의 인류 대부분은 들판에서 짐승의 무리처럼 떼 지어 사냥을 하고 사냥을 당하는 생태계의 한 단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적으로는 현대의 인류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4만 년 전의 인류는? 6만 년 전의 인류는?
우리는 "근력이 좋아야 80년"(시편 90장 10절)을 겨우 살 수 있는 생명체다. 2만 년은커녕 2천 년도 까마득하게 느끼는 존재다. 지질학과 진화는 인간의 짧은 시간 동안 실시간으로 관측되는 변화가 아니다. 너무 느리기 때문에 안 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80년을 사는 인간의 지각에 수십 수백만 년의 진화는 당연히 안 느껴진다.
물리학자 머리 겔만(Murray Gell-Mann)
"양자역학을 모르는 사람은 금붕어와 다를 바 없다."
나는 머리 겔만이 사람들의 지식수준을 탓하려고 저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양자의 존재와 운동에 대한 물리학인데 그 양상이 인간이 직관하는 거시 세계와 다른 모습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하다거나 양자 도약이나 중첩 같은 우리가 보는 거시 세계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판타지가 양자 세계에서는 실제로 일어난다. 우주의 양자적 존재 양식은 그러하다. 인간의 물리적 한계 때문에 그런 미세한 세계의 신비한 현상을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감각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이와 완전히 반대로 우주의 거대한 크기도 우리의 지각 능력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다. 인류는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을 거듭하고 계산을 해 본 후에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는 사실이나 중력과 중력으로 인한 시공간의 휘어짐도 인간의 직관적 지각 능력으로는 인지할 수 없다. 우주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팽창하고 있으므로 지구를 중심으로 반지름이 430억 광년 이상 떨어진 우주의 정보에는 빛의 속도를 능가할 방법을 찾지 않는 이상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틀리지 않았다면 우주에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 있는 물질은 없으므로 우리는 반지름 430억 광년의 구에 고립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고립이라고 하기에는 상상할 수 조차 없을 만큼 거대하지만.)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의 크기조차 영원히 알 수 없다.
시간적으로는 어떠한가! 130억 년이 넘는 우주의 시간 속에 지구의 나이는 46억 년, 호모 속의 인류의 조상이 발생한 최근의 시간은 길게 보아 300 만년 그 가운데 호모 사피엔스 최초의 문명은 3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 이렇게 썼다.
"단지 70년밖에 살지 못하는 생물에게 7000만 년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이것은 100만 분의 1에 불과한 찰나일 뿐이다. 하루 종일 날갯짓을 하다 가는 나비가 하루를 영원으로 알듯이, 우리 인간도 그런 식으로 살다 가는 것이다."(칼 세이건, 코스모스)
머리 겔만의 금붕어 비유는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이해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인간이 동물과 달라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간은 왜 동물과 다른 지성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발언이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그냥 나약한 동물적 육체에 감정과 계산이 조금 더 세밀한 뇌를 가진 존재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양자적 규모에서 우주적 규모로 넓게 보면 금붕어가 세상을 보는 시야와 공부하지 않는 인간의 육체가 세상을 보는 시야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물적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금붕어와 마찬가지로 잘 먹고, 잘 쉬고, 잘 놀다가 가는 것이다. 그런 인류가 지구의 생태계를 단 몇 분 안에 종말 시킬 무기를 만들어냈고, 그들이 생산하는 이산화탄소는 지구를 생명체들이 생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온난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 무기와 산업문명의 산물들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자세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절반 이상의 인류가 그럴 의지가 없다. 아니, 이런 위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 인간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금붕어라는 것이 아니다. 불과 2만 년의 시간 동안 인류의 선구자들은 타고난 한계를 넘어설 만큼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지성의 체계를 갖추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좌우지간 양자적 세계에서 우주적 세계까지 시야를 넓히는 사람들은 (방정식을 모르더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인간과 금붕어의 차이만큼 거대한 비(比)로 시야의 범위를 넓히게 된다.
'문명의 붕괴'를 요약하자면 인간의 인지적 한계가 역사상 많은 문명의 생존 터전을 파괴했다는 주장이다. 자연의 변화는 인간 인지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거대하고 오랜 움직임이다. 지질학적 시간 규모 안에서 인간의 시간은 정말 하루살이의 일생에 비유할 만하다. 그러나 인류가 다루는 도구와 생활방식은 자연의 어떤 생명체들 보다 강력하다. 자연의 순환을 일그러뜨릴 만큼 커졌다. 사용자의 능력에 비해 손에 쥔 도구가 너무 강력하다.
남태평양 이스터 섬은 숲이 무성하고 풍요로운 섬이었다. 섬의 주민들은 그 섬의 숲이 조성되는 데 수천수만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낌없이 주는 숲의 풍요에 젖어 마음껏 나무를 베어 사용했다. 수 백 년 만에 이스터섬의 나무는 단 한 그루도 남기지 않고 벌목되었고 주민들은 궁핍과 고통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궁금증을 품게 된다. '마지막 나무를 베었던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베었을까요?', '나무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인지하였다면 왜 재조림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을까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연구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스터섬의 사람들은 그런 줄을 몰랐다. 겨우 수 십 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보았던 섬의 모습이 죽을 때까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섬의 자원이 회복되는 시간이 그렇게 느리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수십 세대를 거쳐 오는 동안 이스터섬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어졌다.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두 가지 위협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하기를 촉구한다. 전쟁과 기후 위기. 버튼 하나를 잘못 누르면 인류와 지구의 생태계는 초토화된다. 인간의 손에 달려있는데 그것도 극히 일부의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들이 관리하고 있다. 인간의 오만함과 불안정한 심리적 오류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사실 아슬아슬한 줄을 타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논리적으로 이해하더라도 애써 외면하는가 하면 논리를 뒤틀어서라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칼 세이건의 일갈처럼 지구를 관찰하는 어떤 고도의 이성적 존재가 있다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폭약을 둘러야 한다는 미친 자들과 다름없지 않은가?
기후 위기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두려운 점이다. 지구 사회는 상호 간에 더욱 밀접해지고 있다. 아메리카의 오염 물질이 아시아에도 위협이 되고 아시아의 오염 물질이 유럽과 아프리카의 환경을 파괴한다. 원인이 분명하지만 해결책으로 나아가는 길은 너무나 복잡하다. 기후 문제는 자연과학적 문제만이 아니고 정치 사회 외교적으로 얽히고 꼬여버린 실타래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인류를 흔적까지 지워버릴 수 있는 거대한 위협 앞에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결을 앞세우는 극단적, 또는 이기적 주장들 때문에 협력이 가로막히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핵무장을 주장하는 얼간이들처럼 어리석어지기 십상이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여러 가지 가능한 멸망의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는 얼마나 긴장하고 있을까. 사람들 각자는 지금 기후가 점점 변한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지 모르나 당장 나 자신이 죽거나 고통받지 않으면 먼 일로 여긴다. 강 건너 불이 우리 동네로 넘어올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고 있지만 여전히 두려움 없이 불구경만 하는 존재들이 우리 인간이다. 우리는 우주에서 유일할 지도 모르는 귀하디 귀한 지구의 생명을 소멸시키고 우주에서 가장 강한 금붕어로서 사라질까?
지구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큰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이 크고 느린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러~~~~~~~~~~~~~~~~~~~~~~~~~~~~~~~~~~다~~~~~~~~~~~~~~~~~~~~~~~~~~~~~~~다~~~~~~~~~~~~~~~~~~~~~~~~~~~~~죽~~~~~~~~~~~~~~~~~~~~~~~~~~~~~어~~~~~~~~~~~~~~~~!!!!
<책꼽문>
-결론적으로 이스터 섬의 숲이 완전히 사라진 이유는 친절해 보이는 섬사람들이 예외적으로 나쁜 짓을 하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태평양에서 환경적으로 가장 취약한 지역, 요컨대 삼림 파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큰 땅에서 산 불운한 사람들이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다른 어떤 사회들보다 이스터 섬은 환경적으로 취약한 요인들을 많이 지닌 지역이었다.
- 이런 이유에서 많은 학자가 이스터 섬의 붕괴를 하나의 비유로, 어쩌면 우리 미래에 닥칠 최악의 시나리오로 보는 것이다.
- 오늘날 우리는 호경기라는 이유로 쓰레기를 버리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집을 가진 사람, 투자자, 정치인, 대학 운영자 등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경제 상황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지낸다. 게다가 언제쯤이나 그런 변화가 닥칠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낭비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는 듯하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언젠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내핍 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붕괴의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 붕괴가 환경적으로 취약한 지역에 위치한 소규모 변방 사회의 전유물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가장 발달한 창의적 사회도 붕괴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마야는 우리에게 전해준다.
- 바이킹이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아이슬란드는 4분의 1이 숲이었다. 정착자들은 나무를 베어내 초지를 만들었고, 나무들을 땔감과 목재와 숯으로 사용했다. 정착하고 수십 년 만에 삼림의 80퍼센트가 사라졌고, 현재는 96퍼센트가 사라졌다. 달리 말하면 이제 아이슬란드의 면적 중 1퍼센트만이 숲이다(사진 16). 고고학적 발굴로 찾아낸 검게 그을린 커다란 나무 덩어리들을 분석한 결과는 놀라울 뿐이었다. 농지와 초지를 만들려고 베어낸 나무들이 그냥 버려지거나 태워졌다! 언젠가 목재가 부족한 때가 닥치리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문명사회가 실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붕괴하고 말았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자원 토대가 악화되고 있다는 징후가 문명사회 구성원들이나 행정 관료들에게 분명하게 보였다면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 합리적인 조치를 취했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 한 집단은 실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그 문제를 예측하는 데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실제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한 집단이 이를 인지하는 데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혹 감지했다 하더라도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 세계 기온이 매년 0.01도씩 상승해온 것이 아니다. 대신 모두 인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해마다 불규칙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변동 폭이 크고 불규칙했으므로 결과적으로 매년 평균적으로 약 0.01도씩 상승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 이해충돌의 한 가지 특별한 형태는 '공유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각 소비자가 절제를 발휘하여 과다 사용을 억제하는 것이 모든 소비자에게 이익을 안겨준다. 하지만 각 소비자가 가져갈 수 있는 자원의 최대량을 제한하는 등 효과적인 규제가 없다면 각 소비자는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물고기를 잡지 않거나, 내 양에게 풀을 뜯어먹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부나 목동이 나 대신 가져갈 것이다. 그러므로 자제심을 발휘해봤자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 매일 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댐이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뿐이다.
- 결과가 미래에 어떻게 나타날 것이냐는 점이 불확실할 뿐이다. 예컨대 지구의 평균 기온이 21세기가 끝날 즈음에 섭씨 1.5도 상승할 것이냐, 아니면 5도까지 상승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런 수치가 대단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 빙하기가 한창일 때 지구의 평균 기온이 겨우 5도 떨어졌을 뿐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충격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폴더에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생존이 바로 옆 사람의 생존에 달려있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 요컨대 미래의 운명이 우리 손안에 달려 있다..... 해결책은 지금도 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그 해결책을 적용하려는 정치적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