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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니피캇 Jun 19. 2023

신 없음의 증명

신, 만들어진 위험, 리처드 도킨스

신, 만들어진 위험, 리처드 도킨스


1. 무신론자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라는 베스트셀러 덕분에 리처드 도킨스는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를 뽑는 대회가 있다면 다윈과 멘델에 이어 3위 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를 뽑는다면 단연 압도적 1위일 것이다.


 이 책을 앞에 놓고, 가톨릭 신자로서 나는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호교론적 태도를 장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뭔가 강력한 것이 나올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래서 도킨스의 무신론이 오래 전부터 유명했지만 근래에야 읽어 볼 마음이 생겼다.

 '과학 지상주의자이면서 이 시대의 천재 인간 중 하나인 도킨스가 무신론을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하는 근거라면 혹시나 반박이 어려운 과학적 발견은 아닐까?'

 신 존재에 관하여 나와 도킨스는 극단적으로 의견이 다르지만 나는 그에 대한 편견이 없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읽었던 빈틈없는 논리와 살짝 까칠하고 냉소적인 스타일은 좀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불안과 호기심이 반반이었다.


 도킨스의 무신론은 크게 두 가지 주장으로 되어 있다. a. 신은 없다. b. 종교는 위험하다. 신이 없다는 주장은 다시 과학적 무신론과 비논리적 교리와 경전 및 종교사를 근거로 한다.  


2. 과학적 무신론

 이 책을 읽기 전에 과학적 무신론의 배경이 '될 수도' 있는 '빅히스토리'를 정리해 두는 것이 좋다. 우주의 시작과 138억 년의 긴 시간, 양자역학이 다루는 미시세계와 고전물리학이 다루는 거시세계, 원소와 생명 기원으로부터 인간의 오늘날까지의 거대한 이야기를 아우르는 통섭적 과학을 '빅히스토리'라고 부른다. 자연과학의 견지에서 보면 현재란 우주의 길고 긴 역사의 우연한 균형의 상황일 뿐, 인류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또는 갑자기 창조된) 환경이 아니다. 우주의 빅히스토리에서 기승전결의 스토리가 깔끔한, 그러니까 준비된 시나리오는 발견되지 않는다. 루트비히 볼츠만에 의해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의 증가에서 미시적 존재들(원자, 분자 등)의 운동은 확률임이 밝혀지고 따라서 만물의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브라운 운동'(액체나 기체 안에서 움직이는 분자들의 운동, 연기나 맑은 물에 떨어진 잉크 방울이 퍼지는 운동)이라는 물리학적 결론이 있었다. 그보다 앞서 다윈은 환경에 더 잘 적응한 생명체가 더 잘 살아남았다는 생명의 우연적 진화를 확인했다. 이른바 '자연선택' 이론이다. 생명은 일정한 목적을 향해서 점점 복잡하고 고등한 존재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여러가지 무작위적 돌연변이가 일어났고 그 가운데 살아남기 유리한 개체들이 자기 유전자를 후세로 퍼뜨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돌연변이에 의한 생명의 진화도 넓게 보면 브라운 운동이다. 진화의 결과는 반드시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할지, 퇴보할지, 이것도 저것도 아닐지 미래를 알 수가 없다. 나아가 우주의 역사는 모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양자역학적인 변화의 우연한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인간의 지성도 점점 뛰어난 존재를 발생시키는 놀라운 진화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었다. 공룡의 시대를 끝낸 5차 대멸종 이후 신생대는 6,600만년 만에 인간이라는 특출난 존재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5억 4천만 년 전 고생대 캄브리아기 대폭발(지구에서 생명체가 급격하게 많아진 지질학적 사건)부터 중생대가 끝나는 4억 8천 만년의 시간 동안 4회에 걸친 대멸종과 생명의 번성을 반복하면서도 인간과 유사한 지적 능력을 갖춘 생명체는 한 번도 나타난 적 없었다. 인간의 탄생도 일정한 진화의 방향이 아니라 어쩌다가 일어난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도킨스의 입장(또는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진화의 방향이 없다는 것은 신의 계획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된다. 이로써 우주를 "설계"할 수학적, 과학적 지능을 보유한 신의 존재는 틀린 가정이 되었다. 제멋대로 변하는 대혼돈의 우주임이 밝혀졌는데도 종교는 신이 아름다운 세상을 계획적으로 창조하였고 인간을 신의 모상으로 지었다고 주장한다. 우주는 완전한 자로서의 신이 창조한 세계라고 하기에 너무나 불안정하다.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주는 완성된 결과물도 아니다. 여전히 변하는 과정의 순간일 뿐이다. 


 종교는 전지전능한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이 완벽한 설계자는 우주를 구성하는 안정적인 물리법칙으로부터 양자세계의 불안정한 법칙도 창조하고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도록 그만의 권능을 사용한다. 세상은 계획된 창조물이며 그 가운데 인간은 신을 닮도록 설계된 존재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발견한 빅히스토리적 근거에 따르면 세계는 계획된 설계도의 구현이 아니라 우연히 사람을 닮은 순간에 포착된 구름과 비슷하다. 호모 사피엔스의 30만 년은 우주의 138억 년 역사에 비하면 아주 잠깐이나 다름없다. 설계된 결과물이 아닐뿐더러 여전히 진화가 진행 중인 과정이다. 건축가가 설계도를 근거로 집을 짓는 것을 "하향식"이라고 한다. 정확한 치수와 각도, 재료, 배치를 미리 준비하여 계획에 맞추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종교가 말하는 신의 창조는 하향식이다. 신의 계획에 따라 세상이 이루어진다. "상향식"은 완전히 반대다. 흰개미는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다. 흰개미는 단순한 법칙만을 따른다. 아직 그것이 어떤 법칙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흰개미들은 흙에 묻어있는 페로몬의 신호에 따라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는 단순한 규칙으로 집을 짓는다. 어떤 흰개미도 지휘하지 않고 어떤 흰개미도 결과물을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나 상향식으로 지어진 개미집은 인간의 눈에 놀랍게 보인다. 마치 완벽한 가우디의 설계도가 흰개미의 DNA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완벽한 대열을 이루는 새와 물고기의 거대한 무리도 상향식 행동양식이다. 인간의 눈에 그것은 완벽한 공연처럼 보인다. 신이 그렇게 아름다운 움직임을 본능에 심어 주어서 계획된 안무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아니다. 무리지어 움직이는 행동은 우두머리 개체의 총지휘 하에 개체 하나하나가 자기 위치를 인식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개체는 자기 감각에 들어오는 즉각적이고 국지적인 무엇인가에만 반응하여 움직인다. 이를테면 '옆의 새가 무엇을 하면 이렇게 해야한다.'라는 규칙만 본능으로 지니고 있다. 각자가 모두 그렇게 하는데도 신비로운 집단군무가 일어나는 것이다. 무리의 행동은 그 결과로 만들어진 우연한 상향식 결과다. 세포의 분열도 이와 같다. 우리는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DNA를 생명체의 설계도라고 말하지만 세포 단위에 있는 설계도는 생명체 전체의 설계도가 아니다. 개별 세포는 자신이 어떻게 분열해야하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만 알고 있다. 연구자들은 상향식 시뮬레이션을 컴퓨터로 구현해보았다. 컴퓨터상의 새들과 세포는 예상대로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우주의 역사도, 생명의 역사도 상향식이다. 이것이 과학적 결과다. 우주의 전체 모습을 기획한 설계자는 없다.


3. 비논리적 교리

 도킨스가 보기에 성경(코란)과 각 종교의 교리도 모순 투성이다. 아브라함의 순명을 시험하려는 의도로 아들인 이사악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 신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는 신인가? 도를 넘어도 한 참 넘은 장난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극적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파라오에게 완고한 마음을 심어주어 이집트의 모든 맏이를 몰살시킨 사건은 얼마나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이야기인가? 성경은 파라오의 저항이 파라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적었다. 하느님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하느님이 계획적으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순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지 않도록 조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 담아놓고 신의 구원 역사를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합당한가? 욥의 신앙을 시험하려는 악마를 허락한 것은 또 어떤가? 자식과 모든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재기할 수 있는 건강조차 빼앗긴 욥에게 시험이 끝난 후 복을 받아 다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특히 자식을 잃은 그 고통은 평생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을 안겨주었을 텐데?


 이런 직설적인 물음에 '정상적인' 신학은 성경의 사건은 구체적 실제 사건이 아니라 상징과 은유라고 대답한다. 어떤 이상한 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일점일획도 거짓이 없는 실제 역사의 기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도킨스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일관성 없는 종교적 입장은 분파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도킨스의 상대는 가톨릭, 이슬람, 유대교, 프로테스탄트와 유사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모든 유일신교다. 유일한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서로 다른 신을 믿는 것처럼 각자의 기준으로 신을 정의하고 신학과 교리도 천차만별이다. 특히 프로테스탄트는 통계도 내기 어려울만큼 많은 분파로 분열했다. 전선이 넓어서 도킨스가 불리할 것 같지만 만일 토론이 이루어진다면 유신론 종교들끼리 뒤엉켜 자기네끼리 뒤죽박죽 될 것이다.


 도킨스는 구약의 세상부터 신약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일신 종교들의 비논리적 교리와 태도를 싸잡아 비난한다. 인간의 해방과 완전한 사랑의 감동적 스토리가 아니라 모호하고 편향적이며 때로는 잔인한 이야기를 상징으로 사용한 것은 사랑보다는 억압과 복종의 강요다.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 자체로 구원이나 신적 다스림의 상징이라고 하는 종교인들은 극단적으로 아무 대화도 가능하지 않다. 매사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와중에 죄없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는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참히 죽어야 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버림을 받은 것인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자기들이 믿는 신을 그렇게 거룩하다고 정의하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배타적이고 비신자들에게 지옥불의 저주를 예언하고 있지 않은가? 신은 사랑하는 존재라고 하지 않았던가? 종교집단은 모순 투성이의 성경에서도 가끔 훌륭한 가르침을 이끌어냈으나 견강부회에 가깝고 종교의 대부분 역사는 훌륭하지 않았다. 정치와 권력과 야합하고 복음을 복음답게 전파하지도 않았다. 자기 종교를 강요하기 위해 거부하는 이들을 폭력으로 굴복시킨 역사는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파스칼은 신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킨스는 반대로 말한다. 역사를 보라.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과 과학의 퇴보를 생각할 때 그런 신은 없는 것이 낫고 그런 종교도 없는 것이 낫지 않은가?


4. 과학과 이성의 범위

 유시민 작가가 알릴레오 북스에서 도킨스의 무신론 책에 관하여 짧은 코멘트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도킨스 정도 되는 대과학자가 무신론을 주장하려면 신학자들과 토론이 될만한 주장과 논거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도킨스의 무신론 관련 서적은 피상적이고 깊이가 얕은 것 같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는데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이 목표로 하는 독자층이 어떤 사람들이었을지 잘 모르겠지만 논리와 과학이 탄탄한 반면 철학적 깊이는 다소 아쉽다. 신이라는 주제가 자연과학만으로 다룰 문제는 아니다. 자연과학적으로 신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 형이상학적 토론도 필요없다고 생각한다면 도킨스와 유신론은 서로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도킨스의 말대로 싸움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와도 친밀함을 유지하고 대화를 지속하길 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도킨스의 마음을 열려면 깊은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다. 도킨스의 글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을 넘어 신을 믿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도킨스와 대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교황의 글을 읽으면 가상의 대화를 상상할 수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라는 책을 동시에 읽었다. 이 독후감은 다음 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상향식'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수준 안에서 반박할 것인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개종시킬 능력도 의도도 없다. 다만 몇 가지 질문을 생각했다. 도킨스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쏟아지는 무신론 속에서 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나에게 신앙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질문은 '신이 존재하는가 라는 주제를 말하기 전에 과학적 토론이 가능한가?', 두 번째 질문은 '신에 대한 종교의 정의가 미숙한 것은 종교의 미숙함이지 무신론의 증거가 아니지 않은가?', 세번째 질문은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근거로 '상향식' 진화와 우주의 구성요소들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내세운다면 과학적으로 완벽한 창조란 무엇일까?'


 4-1 신 존재에 관하여 과학적 토론이 가능한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은 3차원이다. 수학적으로는 4차원 이상의 공간을 계산할 수 있으나 3차원 존재인 인간은 4차원 이상을 감각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다. 애드윈 A. 애벗은 소설 "플랫랜드"에서 저차원 공간의 존재가 고차원 공간의 존재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놀라운 방법으로 표현했다. 이 소설은 공간의 차원이 늘어감에 따라 그 속의 존재들이 어떤 차이를 갖게 되는지 쉽게 설명한다. (유튜브에 "플랫랜드"라고 검색하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이 소설을 무료로 볼 수 있다.) 1차원(점, 선)의 존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1차원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다. 선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 1차원의 선 가운데로 2차원의 면이 가로지른다면 1차원의 존재에게는 여전히 점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1차원에서는 오직 하나의 선을 벗어난 곳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차원의 존재들은 점이나 선이지만 선으로 이루어진 것은 추론할 수 있을 뿐 점 외에는 볼 수 없다. 자신이 1차원에 갇힌다고 상상해 보라. 이제 2차원으로 넘어가보자. 2차원의 존재에게 모든 존재는 점이나 선으로 보인다. 2차원의 존재는 면이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좌우, 앞뒤 점이나 선으로만 보인다. 내가 원자의 두께로 납작해 졌다고 상상해 보라. 앞에 삼각형이 나타나도 사각형이 나타나도 모두 납작하게 누워있으니 선으로만 보인다. 우리는 내가 면이라는 사실과 타자가 면이라는 사실을 전후좌우 사방에서 둘러보며 추론할 수 있지만 위와 아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모양을 실제로 볼 수 없다. 3차원 입체도형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만일 3차원의 존재의 손가락 하나가 내가 존재하고 있는 2차원의 세계에 들어온다면 나는 그 손가락 단면이 나의 세계와 만들어내는 원의 접하는 선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손가락이 다시 면의 바깥으로 나가버리면 우리는 유령을 본 것처럼 놀랄 것이다. "선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2차원에서는 그 면을 벗어난 공간을 인식할 수 없다. 차원은 직선의 축이 90도로 교차하면서 생겨난다. 2차원은 두 개의 축이 직교하면서 만들어내는 면의 차원이고, 3차원은 2차원의 면에 직교하는 하나의 축을 더하여 만들어진 입체의 차원이다. 1차원의 세계에서 직선은 무한히 뻗어 있을 수 있으나 2차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직선은 극한값에 불과하다. 직선이 무한히 모여야 2차원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 2차원의 세계에서 그 면은 무한하게 펼쳐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무한하게 펼쳐진 평면이 또다시 무한히 모여야 3차원의 세계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상상할 수는 없지만 4차원은 3차원의 공간이 무한히 모인 공간일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3차원에 갇힌 인간이 그 이상의 차원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느님의 강생이라는 교리는 차원적 계산으로 미루어 볼 때 비과학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게 된다. 성공회 신부였던 애벗의 의도가 여기 있으리라는 생각은 과한 것이 아닐 것이다.


 세계를 3차원에 국한하더라도 문제는 남아있다. 인간은 빛이 도달할 수 없는 반경 460억 광년 밖의 우주를 영원히 인식할 수 없다. 우주의 팽창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에 460억광년 밖의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지구에 알려질 수 없다. 물론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크기를 계산해 내겠지만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과학에서 시간은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흔히 신의 시간은 논리적으로 영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원은 끝이 없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시간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영원하다는 말은 아무리 무한하여도 1차원적 시간의 흐름에 종속되는 표현이다. 빅뱅이 거의 확실하므로 시간의 영원성은 반직선이다. 다시 말해 시간은 시작점이 있다. 시간의 영원은 한쪽으로만 무한하다. 최근 유행하는 다중우주의 경우 시간의 분할과 세계의 분할을 상상한다. 그러나 어떤 다중우주에서도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배하거나 시간의 방향이 반대방향으로 향하지 못한다. 엔트로피는 오직 증가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영원성은 무한하나 한계도 명확하다. 여기서 빅뱅의 이전이라는 비논리적 문제에 가로막힌다. 시간의 시작이 빅뱅이었으니 빅뱅의 '이전'이라는 표현은 불가능하다. 신은 논리적으로 시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야한다. 궁극의 시간 극복은 영원이 아니라 '시간의 없음'이다. 그러나 이 역시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차원이다. 시간의 없음에 대해 인간의 이성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4-2 종교는 신을 정확히 정의하고 있는가?

 도킨스의 비판은 크게 과학적 근거와 신의 정의(定義)에 대한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각 종교가 믿는 신은 어떤 존재인가? 신의 존재와 속성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인간이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인간적 편견에 파묻힌다. 인간이 편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심리학적, 신경과학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형성해 온 신에 대한 이해도 - 설령 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 실제의 신과 전혀 상관없는 이상한 결론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이 책의 1부에 있는 내용이다.


 '당신들은 자신이 믿는 신이 어떤 신인지 분명하게 정의하지를 못한다. 상징과 은유 때문에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모순 투성이의 성경과 교회가 걸어온 역사를 비판하면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간다. "우리가 믿는 신은 그런 신이 아니야."라면서 말이다. 인간 개인과 집단이 만들 가능성이 있는 모든 편향과 오류를 교리와 성경에 있어서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면서 도킨스는 자신이 믿지 않는 신을 분명하게 규정한다. '우주를 설계할 만한 과학적, 수학적 지능이 있고 세상 모든 존재의 생각과 기도를 들을 여력이 있으며, 그 존재들의 선행과 죄에 일일이 신경 쓰고, 사후에 상을 내리거나 처벌하는 존재를 믿지 않는다. 당신들이 믿는 신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싸울 까닭이 없다. 하지만 당신들이 믿는 신이 그런 신이 아니라면 교회는 왜 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혼돈의 우주를 창조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의 신은 지구의 유일신교에 없기 때문이다.'


 정말 도킨스의 생각대로 성경과 성전(聖傳, Tradition)은 오류의 누적이 만든 엉터리 말뭉치일까? 나도 도킨스의 지적에 대답할 배움은 있으나 그가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할 능력은 못된다. 그런 식의 답변은 서로 존중을 유지하기 어렵고 도킨스의 표현대로 '싸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명백하게 말하지만 나는 도킨스를(무신론자들을) 개종시킬 생각이 없다. (도킨스는 사람들을 무신론으로 개종시키려 하지만)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식을 선호한다. 그 방식은 싸움이나 토론이 아니라 대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책인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에서 더 지혜롭게 수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내 사랑하는 벗 안토니오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공동체도 그렇고 구성원 개인들도 그렇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도 구성원들도 서로 기도로 연결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을 향해 올바르게 나아갈 수가 없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진리가 올바르게 피어나고 교회가 올바르게 살아가길 바란다면, 교회의 완벽함을 요구하고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알면서도 자꾸 잊어버리는 내용이다. 도킨스의 말처럼 인간이 불완전하므로 교회도 불완전하다. 그러나 교회가 틀린다고 해서 진리가 불완전해 지지는 않는다. 인간은 틀릴 수 있지만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성격이 물리학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그것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조금씩 조금씩 드러난다. 인류는 능력이 닿는 만큼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 2만 년 전의 인류와 2천 년 전의 인류와 현재의 인류는 유전적으로 거의 같지만 또한 다르다.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정도는 시대별, 지역별, 개인별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우연히 점점 더 많은 것이 주어졌고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상향식'으로 말이다. 도킨스의 말대로 종교는 자주 틀렸다. 앞으로도 틀릴 것이다. 어쩌면 중요한 교리를 오류였다고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의 선포에 따라 신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종교가 틀렸다고 신도 틀린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우주 상수를 사용했다고 해서 우주가 그대로 멈춰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아무리 늑장을 부리고 충분히 깨어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리고 교회 구성원이 많은 오류와 죄를 범해왔고 앞으로도 범할지 몰라도, 예수의 삶을 살고 증거하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떤 방향도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도킨스는 하느님의 아들이 상대성원리를 가르쳐 주었다면 얼마나 훌륭한 역사가 이어졌겠느냐고 비아냥 거리지만 과학적 지식이 우리에게 어떤 위로와 구원을 열어주지는 않는다. 신앙의 목적은 세상에 대한 과학적 깨달음이 아니다. 빅뱅이론의 결정적 단초가 된 우주 팽창을 최초로 발견한 조르주 르메트르는 우주의 역사를 아는 것은 대단한 지식이지만 구원이 반드시 과학을 필요로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만물이 원자로 되어있고 상대성원리와 양자역학이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이지만 그 과학적 진리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일에 본질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도킨스는 마지막 챕터에서 신이 없어도 과학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학적으로 찰나에 불과한 우리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한없는 하찮음이건만 과학에서 어떤 용기를 얻을 수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4-3 과학적으로 완전한 창조는 무엇일까?

 도킨스가 말한 '상향식 진화'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다. 세상을 완벽한 계산으로 설계한 후 꼼꼼하게 완성한 창조주는 없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상향식으로 진화하게 만든 창조주라면 또 어떤가? 이런 과학적 세밀함에서 종교가 틀려도 하등 문제될 것은 없다. 상향식 창조의 시뮬레이션은 인간도 재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도킨스가 잘 정리해 주었다. 이러한 진화의 역사 때문에 모든 생명체는 놀라운 조화로움의 이면에 비효율적인 생물학적 시스템으로 가득차있다고 설명한다.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어리석은 창조가 있을리 없다고 말한다.


 진화는 방향성이 없다. 반드시 더 뛰어난 능력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능력이 세대를 지나면서 알맞게 발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미래에 인류가 계속 존재한다면 지능이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는 있는데, 인간만 유전자가 더 뛰어난 방향으로 진보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진화의 방식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유전자 편집이 이미 수십 년의 역사를 거쳐오고 있고 결정적으로 2012년에 제니퍼 다우드나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가 크리스퍼라는 정밀한 유전자 가위를 인위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발명하면서 미래의 인류는 더 뛰어난 지력과 신체능력 유전자를 스스로에게 장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인류가 신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는 우려 섞인 평가가 학계와 세상을 긴장시키고 있지만 결국 인류는 이 새로운 경계를 넘어갈 것이다. 누가 먼저 시작하느냐의 문제일뿐이다. 신의 불완전한 창조를 인간의 과학이 완전함으로 재창조하게 되었다고 평가 할 수 있을까? 유전자 편집의 윤리논쟁에서 찬성하는 의견은 진화가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져 왔는지를 지적한다.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특정한 병에 취약한 형질을 랜덤으로 유전하고 약한 육체와 떨어지는 지능을 후손에게 전파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생식 방법으로는 랜덤 선택을 막을 길이 없다. 랜덤 유전 시스템 자체는 한 사람의 인생을 복권처럼 결정하게 하는 잔인한 시스템이다. 유전자 편집은 좋은 유전자만 선택해서 후손을 만들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이다. 이제 인류는 완전한 유전자를 장착하고 신에게 도전하게 될까?

 

 유전자 편집의 기술은 두 가지 큰 우려를 가지고 있다. 첫째, 유전자 편집이 자본주의를 만날 때 빈익빈 부익부의 불평등이 영구히 고착화 될 것이다. 값비싸고 뛰어난 유전자를 장착할 수 있는 부유층은 계속해서 더 뛰어난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만일 인류의 유전자 편집이 보편화 된다면 선호하는 유전자들만 남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가 다양성을 상실하고 모두 같아진다는 의미다. 인류가 생각할 수 있는 완전함이란 결국 그런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처럼 유전자적 상류계층이 명확해지고 누구나 자기 후손에게는 불완전한 유전자를 배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특정한 병에 취약하거나 더 키가 작거나 지나치게 크거나 시력이 떨어지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유전자를 그냥 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누구나 같은 키에, 누구나 가장 아름다운 외모에, 누구나 같은 근육에, 누구나 같은 지능으로 수렴한다. 우리는 이렇게 가장 완벽한 인조인간을 후손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신이 창조한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유전시스템을 비웃을 완전한 창조 말이다. 이제 다시 생각해보자. 완전한 창조란 무엇일까?


5. 신 존재와 인간다운 삶의 관계에 대하여

 신 존재의 여부를 넘어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정확히 말하자면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를 실제로 만났는지 만나지 못했는지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예수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중요했던 역사적 존재인지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교회가 그의 이미지를 만들었든 내가 그의 이미지를 더 깊이 상상했든 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그를 본다. 종교의 수많은 잘못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름다움은 훼손될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어떤 상상에도 갇히지 않고 종교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있는 자 바로 그(탈출기 3,14)"이기 때문이다. 나는 특별히 가톨릭 교회에 의탁하고 있지만 여러 교리의 논리 분별에 앞서 '서로 사랑하라.'고 한 예수의 가장 중요한 명령에 우선적으로 엎드린다. 그에게서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생명의 의미를 찾는다. 나는 기계처럼 팽창하는 우주와 오직 유전자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일생을 살다 소멸하는 모든 생명체들도 찰나의 시간을 초월한 존재적 의미를 가지기를 소망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과 생각의 발현 양식도 유전자들이 자기 복제를 목표로 하는 생물학적 '센트럴 도그마(central dogma)의 부수적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명체, 특히 인간의 복잡한 의식 자체가 센트럴 도그마를 넘어선 또다른 궁극적 목적인지는 자연과학의 주제가 아닐 뿐더러 의식 발현을 '설계'한 누군가가 나타나 설명해 주지 않는 이상 결코 밝혀지지도 않을 것이다. 


 나에게 도킨스의 무신론은 오히려 신 존재에 대한 과학적 검증 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신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하는 토론은 과학이 다룰 수 있는 문제도 아니거니와 토론할 꺼리도 아니다. 과학은 신이 존재하는지 증명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지도 못한다. 그저 모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과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생각해야한다. 우주를 넘어선 우주와, 시간을 넘어선 시간 없음의 가능성, 과학적으로 완전한 창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 종교가 논리와 과학의 관점에서 철저히 무오류 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모두 담을 수 없는 신의 범위에 대해 추론하고 인간의 의미와 과학의 한계를 생각한다. 내 질문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과학적 근거를 적극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신앙인으로서의 우주와 인간에 대한 의미를 검증하는 일이다. 세상과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인간의 노력은 도킨스에게도 중요한 일이다. 도킨스는 신이 없어도 인간다움을 고민하는 다른 방향에서의 희망을 찾자고 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 자체가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이냐는 생각의 가장 중요한 근거다. 신이 없음을 인정하고 과학에서 희망을 찾자는 이 책의 결론은 대체 이 사람이 왜 많은 노력을 들여서 이렇게까지 하는지 오히려 의아하게 한다. 신 없음의 과학적 증명이 인간다움과 삶의 의미에 어떤 희망을 주는지 나는 모르겠다. 차라리 중요한 것은 신 존재 증명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이다. 인간의 편향과 심리학적 오류는 종교를 대하는 태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사상과 이념이 인간의 해석과 태도에 좌우되고, 사상의 본질과 상관없이 사상을 취하는 인간의 태도 때문에 타자들은 괴롭힘을 당한다. 종교가 항상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믿음에 대한 집단지성의 기능도 한다. 잘못된 신념으로 죄를 신앙으로 포장해 온 이들은 말 그대로 그들의 잘못이지 종교적 집단지성 그 자체가 모조리 틀렸다거나 신이 잘못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세상에는 아주 착한 사람들도 있고 나쁜 사람들도 있고 똑똑한 사람들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다. 종교는 구원하는 주체가 아니라 불완전한 구성원들이 불완전하게 이끌어가는 구원의 대상이다. 인류는 예수의 핵심 메시지가 "원수 조차도 사랑하라."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인류가 '사랑'이라는 궁극의 인간다움에서 얼마나 가까워지거나 극단적으로 멀어질 수 있는지도 이해한다. 무신론의 입장에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예수가 실제로 기적을 일으켰는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했는지, 마호메트가 승천했는지... 이런 것들은 믿는 사람들에게 맡겨도 된다. 무신론자라면 '사랑하라'는 메시지만 이해하면 충분하다. 그렇다면 서로가 가는 길이 다르지 않다.



#무신론 #리처드도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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