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나오는 통계 가운데 독서량 관련 자료는 항상 관심사였다. 자세한 데이터는 모르겠지만 통계에서 한국인의 평균 연간 독서량이 6권 내외라고 한다. 아무리 바쁜 시기에도 적어도 한 달에 한 권 이상은 꾸준히 읽은 내 뇌는 통계상 평균 이상의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나 보다. 10~20대에는 학창 시절과 군 시절이 끼어있어 1년에 적어도 40~60권 이상은 읽었더랬다. 30대가 되어 책과 점점 멀어졌던 것 같다. 사실 멀어졌다기보다는 속도가 느려졌다. 직업과 육아가 잡아먹는 시간이 너무 많다 보니 읽고 싶은 책을 책상에 두고도 먼지가 쌓이도록 마무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책 욕심은 있어서 책꽂이에 읽으려고 산 책은 계속 늘었다. 결혼 후 몇 번의 이사를 할 적마다 이삿짐센터 사장님들은 책이 많아서 이사비 할인이 어렵다고 했다. "책이 정말 많으시네요. 어디 교수님이세요?" 그렇게 불릴만한 전문 서적들은 별로 없었지만 책 양만 보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책을 버리거나 중고로 파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도 한 몫했다. 비교적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이삿짐센터 사장님이야 짐이 많다고 해야 비용을 많이 청구할 수 있으니까 믿을만한 소리가 아닐 것이다. 아무튼 나는 독서량과는 상관없이 책을 좋아하기는 한다. 그리고 책 사는 것은 일종의 수집 취미인 것 같기도 하다.
올해 초 오디오북 구독 서비스인 윌라를 알게 되었다. 윌라는 책을 읽어주는 서비스이다. 이동 중에도 책을 읽을 수 있다. 조금 어려운 책은 1.2배속, 소설이나 읽기 편안한 책은 1.4배속으로 듣는다. 나는 출퇴근 시간이 40~60분 정도 걸린다. 이 시간이 윌라를 이용하기에 가장 멋진 시간이다. 운전을 하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윌라에 책이 별로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윌라에 있는 책 중에 읽고 싶은 책을 다 듣고 죽을 수 있을지 고민이다.(내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찜 해둔 책이 여전히 넘쳐난다는 뜻이다.) 아무튼 윌라 덕분에 올해는 긴 출퇴근 시간을 이용하여 평소보다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오디오북의 장점은 장소와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운전을 많이 하는 사람이나 단순작업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자전거를 타거나 운동을 하면서도 독서가 가능하다. 단점1. 생각이 필요한 지점에서 생각할 여유를 가지기 어렵다. 이 점은 되감기 하거나 차를 잠시 멈추고 생각하면 된다. 단점2. 좋은 문장을 적어두고 싶을 때 기록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메모하거나 밑줄을 칠 수 없다. 특히 운전 중에 그런 문장을 만났는데 미처 기록하지 못하고 지나가 버리면 나중에 꼭 가보고 싶었던 식당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에서 사라진 것처럼 애가 탄다. 노트나 메모 기능의 개발이 시급하다. 단점3. 책 수집 취미의 욕구를 채울 수 없다. 나에겐 가장 큰 단점이다.
책을 단순히 많이 읽는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윌라를 이용해서 다독이 가능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사가 되었다. 원래 남이 하는 것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도 내가 하기 시작하면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어 보이기 마련이다. 예전에는 일정 기간에 얼마나 많은 책을 읽겠다는 목표는 독서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독서가 느린 편인데, 일반적으로 독서가 느리면 독해력에 문제가 있거나 어휘력이 부족하다. 나도 그런 경우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개인적인 취향이다. 어떤 내용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면 일종의 '아하! 포인트'가 만들어지는데 그 포인트에서 기존의 다른 지식들을 가지고 있던 뉴런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시작한다. 내 뇌는 그 포인트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지식이 기존의 지식들과 어울려 신고식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하! 예전에 배웠던 그것이 이것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였구나!'라는 느낌? 이런 성격 또는 스타일 때문에 다독은 애초에 쉽지 않은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윌라는 그런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열심히 쉬지 않고 읽어준다. 정리는 나중에 하고 가득 찬 트럭에서 일단 짐부터 쉬지 않고 내려야 한다. 그런 시간이 조금씩 쌓이고 나서 보니 다독의 방식이 훨씬 나은 습관인 것 같다. 종이책이나 전자책을 읽을 때에도 이제는 머물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읽는 속도가 빨라질 뿐 아니라 나중에 정리할 때에도 훨씬 풍성한 내용으로 생각이 뻗는다. 가끔 책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관심사이거나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중반 이후가 넘어가도록 재미가 나타나지 않으면 빨리 끝내고 다음에 읽으려고 했던 책으로 넘어가고 싶다. 그러나 예전처럼 꼼꼼하게 읽어야 할 때는 그런 재미없는 책도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내야 직성이 풀렸다. 누구나 알겠지만 그런 책은 꼼꼼하게 읽어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다. 책 읽는 것이 즐거워야 하는데 지쳐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는 내용이 아니라 글자를 읽더라도 빨리 '보고' 넘어가는 게 좋아 보인다. 그냥 멈추고 덮어버리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그렇게 스쳐지난 책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떠오르기도 한다. 아니면 내 독해력이 낮아서 이해가 안 되던 것이 비슷한 분야의 다른 책을 조금 더 읽다 보면 이해와 재미를 함께 발견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인가 하면, 윌라 덕분에 올해 독서량이 결국 100권을 돌파할 것 같다는 자랑질이다. 윌라에서 특별히 좋았던 책은 여러 번 더 듣거나 텍스트 책으로 한 번 더 읽기도 했으니 굳이 권 수로 따지면 이미 100권을 넘었다. 책의 두께가 제각각인데 권수가 뭐 그리 중요한가 싶지만 이 숫자가 묘한 성취감을 준다. 올해 내가 어떻게 살았나 돌아보게 되는 연말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독서 리스트를 만들어서 정리해보니 뿌듯함이 배가 된다. 다만, 최근에 읽은 책 중에는 어떻게든 100이라는 숫자를 넘어서기 위해 욱여넣은 얇은 책도 눈에 띈다. 숫자를 체크하고 나타난 부작용이다. 그래도 뭐 괜찮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언젠가, 어디선가 피와 살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리라.
사실 브런치에도 여러 가지로 시도를 했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을 쓰고 싶었다. 다독가로 유명한 심리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책 '내가 책을 읽는 이유'가 자극제가 되었다.(윌라에 있음) "글을 쓰면 책 읽는 자세가 달라진다." 독자가 작가의 사유에 자극을 받아 독자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단순히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는 수동성을 넘어서는 사유의 '태도'다. 즉, 앎이 태도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래서 쓰려고 노력했으나 역시 또 시간이 문제였다. 쓰는 시간은 읽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을 직관적으로 이해했고 나는 '독서상대성이론'을 주관적으로 느낀다. 쓰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마냥 그러고 있을 수만 없어서 '오늘 새로 읽기 시작한 책을 먼저 다 읽고 쓰자.' 라고 하면서 슬쩍 미룬다. 그렇게 해서 생긴 띄엄띄엄한 글이 서랍 속에 한 무더기다. 다독에 집중할 것인가 사유에 집중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어쩌면 내 스스로 '이런 글은 일기지. 다른 누가 읽을만한 가치가 없어.'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독을 시작하더니 참 겸손하기도 하구나!) 덕분에 발행하지 않은 글이 여러 개 쌓이고 말았다. 아마도 영영 마무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는 문장은 아니고 다른 글을 쓸 때 언젠가 꼭 쓰일 것이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가 '책은 빡세게 읽는 겁니다.'라며 독서하지 않는 이 세대를 질타하는 유튜브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앞 문단의 '독서상대성이론'이라는 노벨 개그상급의 농담을 알아들으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시간을 다루었다는 최소 교양 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웃기려고 말했으나 반응하는 친구가 하나밖에 없었다. 하긴 아재 개그를 들은 아재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웃지 않는다. 웃으면 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책을 베개로 사용한다는 다른 친구의 말은 나의 저 특허내고 싶은 용어보다 반응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최재천 교수님이 와서 친구들을 혼쭐을 좀 내주면 좋겠다.
아무리 책을 읽어야 한다고 읽는 사람들이 호소해도 안 읽는 사람들은 안 읽는다. 책이 수면제라느니 베개라느니 하는 자학개그를 하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왜 무식을 자랑하느냐며 정색하고 나무란다. 그치만 어안이 벙벙한 듯 나를 바라보면 괜히 말했다 싶다. 최재천 교수의 질책은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질책이지만 안 읽는 사람들에게는 외계인의 삶이거나 꼰대의 잔소리다. 안타깝지만 스스로 '아하! 포인트'를 만들지 않으면 나아가기 어려운 길이 독서다. 그래서 독서의 빈부격차는 경제적 빈부격차보다 더 커지고 있다. 이것은 인류의 지능이 진화하는 방향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많지만 여기에 길게 쓰지는 않겠다. (글이 길다고 뭐라고 하는 얘기를 여러 번들었기 때문에 조심하는 중이다. 여러 사람이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아내가 여러 번 얘기했다. 내 글에 거의 댓글이 달리지 않는데 아내의 진단으로는 너무 재미없는 글을 너무 길게 쓰기 때문에 아무도 끝까지 읽지 않는 거란다. 거의 유일한 애독자로 추정되는 아내의 충고를 무시할 수 없다... 라고 했지만 이 글도 길어서 혼날 것 같다.)
조용한 카페에 앉아 카페라떼 한 잔을 앞에 두고 책을 읽을 때면 공부를 이렇게 해야 즐겁겠구나 싶다. 미래의 꿈이 하나 생겼는데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언젠가 조용한 곳에 작은 카페를 하나 차려야겠다. 조용한 곳에서 카페를 차리면 망하겠지. 그래서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이다. 손님들이 너무 많이 와서 독서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
진짜 꿈은 이것이다. 연간 정독하는 독서량 100권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 100권이라고 해봤자 10년에 1천 권. 앞으로 내가 40년을 읽는다고 하면 겨우 4천 권이다. 사실 다독의 세계에서 연간 100권은 정말 게으른 축에 속한다. 다독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만일 연간 200권을 읽어내면 40년 동안 8천 권이다. '빡세게' 읽어야 만 권을 읽어낼까 말까 하다. 생존에 쫓겨서 일 년에 10권을 겨우 읽는다면 40년 동안 겨우 400권의 책을 읽게 된다. 세상에 그 많은 지식의 보고를 평생 노력해도 이 정도밖에 읽을 수 없다니. 독서량이 급감했던 30대의 시간이 아깝다. 20대에는 그 두 배로 읽었어야 했는데 참으로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