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답답하고 심란한 마음에 최근에 읽었던 책을 다시 좀 뒤적였다. 혹시 나처럼 인간 관계나 세상 일 때문에 갑갑한 기분이 드는 분들에게 몸에 좋은 음식처럼 권하려고 써 둔다.
인류가 구석기 시대에서 벗어난 지 길어봤자 2만 년 정도로 추정한다. 그리고 국가라는 거대 사회 조직을 구성하고 이른바 문명이라고 할 만한 현상을 띄기 시작한 것은 길어봐야 1만 년 이내다. 46억 년으로 추정되는 지구의 나이에 비추어 볼 때 현생 인류의 역사는 진화생물학적으로 거의 변한 것이 없는 찰나의 시간이다. 인류가 2만 년 동안 놀라울 정도의 과학 발전과 문명을 이루었지만(사실 짐승과 다른 존재로서의 인류를 2만 년으로 쳐준 것도 후한 대접이다.) 우리는 여전히 들판에서 다른 맹수들과 생존 경쟁을 하던 원시인과 큰 차이 없는 수준의 뇌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문명 속에서 사회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관계나 삶의 문제를 대할 때 늘 원시적인 본성에 먼저 지배당한다. 우리 뇌가 그렇게 생겨먹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충분히 합리적 존재라거나 집단 지성이 반드시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는 기대는 (진화생물학적 시간으로) 조금 더 (한 10만년 쯤이면 될까?) 기다렸다가 해야한다.
물건 하나를 살 때에도 우리 뇌는 무엇이 필요한지, 내 형편에 무엇이 적절한지 합리적으로 계획하기 보다 '사고 싶다, 갖고 싶다'는 감정에 더 강하게 지배당한다. 정재승 교수의 책 "열두 발자국"에서 재미난 내용을 읽었드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 싶다'는 감정에 지배당한 다음에 그것을 사야하는 이유를 '치밀하게, 이성적으로' 구성한다. 그 후 물건을 사고나면 이를 이성적 판단이라고 믿는다. 나중에 저걸 괜히 샀다는 생각이 들어도 '나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인 경향이 크다.' 라는 생각은 좀 처럼 하지 않는다. 말로는 그런 반성을 할 지라도 진짜 반성은 아니다. 또 다시 예쁜 아이폰이 출시되거나 멋진 신차가 발표되거나 신상 명품 가방이 나오면 충동이 일어나고 그때부터 필사적으로 저걸 사야할 이유를 찾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뇌는 이런 감정적 지배 때문에 모든 상황에서 쉽게 편향에 빠진다.
선거에서 투표를 하거나, 어떤 정권이 잘했다 못했다를 따질 때 사람들의 뇌에서 일어나는 인식과 결론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충동구매와 비슷하다. 일차적으로 정치적 판단의 대상에 대한 감정이 어떤 지가 중요하다. 나는 이번 선거를 앞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줄기차게 누가 더 일을 잘해왔는 지를 비교하면 선택은 명백하다고 이야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인물론'이라는 이 전략을 취했다. 그런데 이것은 실수였다. 그것은 '덜' 중요하다. 감정의 이끌림이 '더' 중요했다. 그 사람의 매력을 발견하고 나면 그 다음 그렇게 이끌린 합리적 이유는 각자 스스로가 찾아낸다. 찾지 못하면 만들어낸다. 감정적 판단이 뇌의 편향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재명의 성장기와 정치 인생의 드라마를 부각했으면 어땠을까. 오히려 불행한 가정사와 자수성가 이후에도 형제간의 불행을 안고 살아야 했던 스토리로 정면 돌파해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켜야했지 않았나 싶다. 또는 우리나라에 꼭 팔요한 기능적 존재로 설득하지 말고 친하고 싶고 내 편 하고 샆은 사람으로 소개했어야했다.
감정의 영향 때문에 사람은 본성적으로 큰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 대부분 사람들은 각자 자기 이익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터널에 들어간 사람은 저 앞에 출구만 바라본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사라진다. 심리학에서 이를 '터널시야'라고 부른다. 자기 이익과 자기 고통 앞에서 터널시야를 극복하기는 매우 힘들다. 우리나라가 이번 팬데믹에서 모범적인 방역 성과를 자랑하고 있지만 치밀한 방역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감수해야했던 이들의 불만은 반대쪽 정치세력의 무차별 비이성적 공격과 잘 맞아 떨어졌다.(상대가 비이성적이라는 -내 감정은 그렇게 바라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는 - 무차별 매도가 아니라 그들의 전략을 말한다.) 국가의 선택이 때때로 전체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감정까지 동조하기는 어렵다. 자신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은 아무리 잘해도 공격 당할 구석이 생긴다. 그것은 합리적 비판이 아니라 미움에서 나온다.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결과는 어떤 정치 이념도 이루어 낼 수 없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가 '우리나라 방역은 훌륭했다. 정부의 대책도 옳았고 국민 모두가 배려하고 잘 참아 준 덕분에 이룬 성과다. 대한민국은 위대했다.' 라고 평했지만 전문가의 과학적 판단에 근거한 평가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뇌는 그 사람의 말이 맞는지 과학적으로 검토하기 보다 내 감정과 기분에 맞는 말을 해주는 다른 전문가를 찾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감정 편향은 이성과 의지까지 편향으로 이끈다. 우리 뇌가 그렇게 생겨먹었다.
결론적으로 아래 책들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나와 우리의 뇌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내가 어떤 사고나 말과 행동을 할 때에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뜯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이 뜯어보는 행위는 비판 보다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한다. 20세기 초 독일 국민은 나치를 선거로 뽑았고 21세기 초 미국은 트럼프를 선거로 뽑았다. 인간의 뇌가 진화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5년 전에 그 난리를 치면서 국민의힘당의 전신인 머시기 당을 끌어내렸다. (이름이 기억 안난다. 자유당이었나, 새누리였나?) 그런데 5년 뒤 다시 그들에게 정권을 주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가 참 어렵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집단의 선택이다. 수준이 높다 낮다 따질 수도 없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우주에서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들의 집단적 선택이다.
앞으로 5년이 역사에 어떤 사건으로 기록될 지를 불만에 찬 시선으로 자꾸 우려를 쏟아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몹시 불안하고 자꾸만 저주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합리적, 인과적이라기 보다는 물리학의 브라운 운동이나 카오스 이론과 더 가까운 모양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우리의 이 선택이 설령 멸망으로 나가는 길이라고 해도 이것이 현 인류의 선택이고 능력치다. 그것을 받아들여야한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갈 길이 아주 멀다는 인식이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나아가는 중이다. 운이 좋으면 언젠가 인류에게 놀라운 진화적 '창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 아니면 인류의 뇌가 천천히 조금씩 진화의 은총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끝에 이르러 돌아볼 때 지금의 인류는 아직 지능이 많이 떨어지는 초기 인류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