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는 죽은 자를 이길 수 없다
지난 1월말에 시작된 부고가 연 5주를 이어졌다. 노인들 겨울나기가 힘든데다 내 주위 부모님들 연배도 많으시지만, 근 한 달 사이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돌아가신 건 처음이다. 공교롭게 다섯 분 모두 남자 어르신들로, 90세 근방의 친구 아버지 네 분과 80세 형부 한 분이 세상을 뜨셨다.
무심상한 성정 탓인지, 죽음을 크게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편이다. 누구나 유한한 삶을 살고 있고, 그래서 다행이고, (너무 젊거나 억울한 죽음은 예외!!),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지만 그게 뭐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고, 닥치면 명랑하게 죽고 싶은데, 나한테 그런 운이 오면 좋겠고... 그런 정도가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이다. (쓰고 보니 잘난 척 잘난 척)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 나이와 함께 철도 드는 걸까? 예전과 달라졌다. 최근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은 내 마음에 예고 없이 훅 들어와 일렁이는 물결을 남기고 있다. 아마 평소 그 분들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이야기를 들어온 바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도코다이’ 기질의 당당함으로 평생 자식들을 힘들게 하셨던 후배의 90세 아버지, 치매인 어머니를 무뚝뚝하게 돌보셨던 동료의 ‘츤데레’ 아버지, 요양원 면회를 갈 때마다 말 잘 듣는 순한 양이 되어 가족들을 더 짠하게 만드셨던 친구의 시아버지, 이제 별 걱정도 없는데 조금 더 오래 살고 싶어서 애를 쓰셨던 선배의 형부, (본인만의 방식이라 오히려 가족 갈등을 부추겼지만) 후손들에게 유산을 잘 물려주려고 궁리하셨던 친구의 아버지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얼마 전까지 세상을 느끼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8, 90년 세월을 쌓아온 인생. 불필요한 불안과 걱정, 부질없는 만족과 기쁨에 몸을 떨며 필경 자기 자신보다 남의 눈을 더 의식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왔을 대한민국의 늙은 남자들. 말년에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거나 혹은 고통에 지쳐 빨리 죽고 싶었을지도 모를 그 각각의 존재들. 그들이 더 이상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구나! 각자가 일궈온 한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거구나! 부재(不在)라는 단어가 크나큰 무게로 다가왔다. .
정말 오랜만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도 났다. 벌써 40년이나 되었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겨우 고등학교를 마치고 말단 공무원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한 아버지. 자기 주장 확실한 아내와 (아마도) 데면데면 살았을 아버지. 오십이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자신의 남은 생과 동갑의 아내, 어린 네 자식을 두고 아버지는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아버지는 그때 당신이 그렇게 일찍 돌아가신다는 걸 알고 계셨을까. 어린 자식들과 극강의 T인 아내는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고통스럽게 허둥대고 있었을 터이니 아버지는 혼자서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까.
늘 바쁘기도 하셨고, 평소 무뚝뚝한 부녀였던 탓인지 아버지에 대해 특별한 추억은 별로 없다. 아버지와 나는 외모가 닮은 편인데, 대체로 모든 게 길쭉하다. 키도 얼굴도 손발도 기름하다. 나이가 들수록 내 얼굴에서 아버지를 발견한다. 별 대단할 건 없지만 당신의 DNA를 남겨놓으신 걸 뿌듯해하시려나.
주위를 둘러보면 대체로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엄마들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독립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자식들 말은 귓등으로 듣는다. 혼자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가장 노릇을 하면서 자연스레 체득된 것이리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에 빠지는 대신 너무 빨리 자식들과 살아낼 궁리에 들어간 엄마를 보면서 우리 4남매는 상처를 받기도 했다. 충분히 애도하지 않는 엄마가 낯설었지만, 슬퍼하기만 하고 무기력에 빠져 있기를 바란 것도 아니다. 아마도 엄마는 눈을 크게 뜨고 팔을 걷어붙이며 임전무퇴의 자세를 취했으리라.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이었던 터라 우리는 보훈가족이 되었다. 대학 등록금이며 아르바이트 자리 등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무엇보다 조금씩 꾸준히 오른 연금은 엄마의 노후를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해주었고, 덩달아 가족 모두에게 낙수효과를 내리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그리 오래되었건만 우리는 여전히 아버지의 자장 안에 있는 셈이다.
뒤늦게 엄마를 경험하며 이모저모 못마땅해하는 중인 나는 이제와 아버지를 소환하며 엄마를 은근히 비난하곤 한다. (아버지 직장이 엄청 멀었다는 이야기 끝에) “그렇게 먼 줄 알았으면 가까이 이사 좀 가지 그랬어!” (몸에 좋은 거 그렇게 밝히더니 일찍 가더라는 말 끝에) “그래서 뭐 몸에 좋은 거 많이 해드리긴 했어?” (아버지 직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마침 상사한테 단체로 야단맞는 장면을 보셨다는 회상 끝에) “그렇게 스트레스 받는 줄 알았으면 맘 좀 편하게 해주지 그랬어.” 따위 등이다.
우리 형제들이 오늘까지 비교적 무탈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데에는 엄마의 극강의 현실주의에 힘 입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와 감성과 따뜻함까지 요구하다니, 못나고 비겁하다. (짐작하건대) 살아 생전 엄마한테 큰소리 못 쳤던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좀 좋아하셨으려나.
돌이켜 보니 여태껏 아버지를 온전한 마음으로 추억하고 내면의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해마다 몇 차례씩 묘소를 방문하고 있지만 늘 누군가와 동행했거나, 절을 하거나 꽃을 꽂는 형식적인 행동을 했을 뿐 아버지와 직접적으로 대면한 기억이 없는 것이다. 나야말로 엄마보다 더 심한 현실주의자다.
올 봄에는 꼭 조용히 혼자 묘소 앞에 앉아 아버지를 추억해야겠다. 아버지가 두고 가신 우리 가족은 모두 잘 살고 있다고, 엄마도 아직 괜찮으시다고, 어딘가에서 편안히 계시라고, 그리고 감사하다고, 나직이 입 밖에 내어 말씀드려야겠다. 어쩌면 조금 울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