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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 정 Sep 29. 2015

08. 옆집보다 멀고 남보다 가까운

가족이란 이름의 '친척'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만나야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론 남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함께한 시간으로 어우러져 꽤나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 게 좋을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들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꺼내기 어려운 많은 상처들이 그곳에 남아있고 나는 표정마저 어두워져 가슴이 아리기도 한다.


오늘의 글은 유난히 조심스럽다. 쓰다 지우다를 반복하고, 손떨림도 더 격해진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집이든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친가는 아주 전형적인 가부장제였다. 남자의 말이 옳고 아들이 귀중하며 제사에 온 힘을 쏟았던 집안. 그래서 더더욱이나 여자들은 부엌떼기와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자는 시간 외에 앉아있는 시간을 본 적이 없으며 형제지간에도 둘러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TV를 보며 보냈다. 나는 그런 집안이 답답했고 엄마를 도와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 집안에서 부엌떼기로 남기가 싫어 늘 바깥으로 배회했다. 아들이 아니지만 그 집안의 아들들과 행동을 함께 했으며 그래서 더 거칠고 남성다운 면을 많이 보였던 것 같다. 그런 시간들이 흐르는 중, 우리 집은 심하게 엄마와 아빠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명절엔 엄마 자리가 늘 비워져있었고 나는 그 자리를 억지로 채워서 명절에 어떤 순간도 빠진 적이 거의 없었다. 


짐을 한가득 들고 내려가면 어느 하나 반기는 이보단 더 오지 못한 우리 가족 구성원을 찾으며 나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익숙해진 시선에 짐을 내려놓고 얼른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필요할 때만, 우리 이야기가 궁금할 때만 그들은 나를 찾아와서 안부를 묻는 척 캐물었다. 그 어린 시절에도 그런 게 느껴졌던 순간들이 너무 싫었다. 나는 애써 정해진 대답들로 무마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도 꾹꾹 참은 화가 터져나왔던 모양이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명절날 아침 밥상에서 느닷없이 '엄마'의 이야기를 얘기하곤 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확하게 들여다보지 못했으면서 그들은 추측으로 엄마를 비하하는 듯 말했다. 어느 쪽도 잘했다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였지만 분명한 건, 나는 완전한 '아빠'집안의 사람도 아니었고 완전한 '엄마'집안의 사람도 아니었다. 분명한 건, 내가 두 곳에 교집합으로 속해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모두 둘러있는 자리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나는 밥을 구겨넣는 건지, 그냥 물고 있는 건지 눈물과 함께 삼켜내며 참아내다 터져버렸다. 어떤 사람도 그 발언을 중지할 수 없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화가 났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숟가락만 '쨍'하고 내려놓은 채 밥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속에 있던 걸 다 게워냈다. 찍 소리 내지 않던 내 모습에 모두가 당황한 듯 나를 달래보려 했지만 미동도 없었다. 땡볕에 얼굴을 무릎으로 파묻어버렸다. 


이들에게 속하고 싶지 않아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명절을 애써 웃으며 보내고 있지만 나만 기억하고 있는 지옥같은 시간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했던 수없이도 많은 칼날없는 문장으로 받은 상처를,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내 몸에 조금씩 손을 대어 낸 흉터 없는 몸의 상처를, 누군가가 밉다는 행동으로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나를 반기지 않았던 침묵의 상처를. 그들은 그 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어른'이 되었다는 이름으로 그 때 '그들'의 모습을 행동을 용서할 수 있는 걸까. 



옆집보다 멀고

남보다는 가까운

그들과 나의 오랜 시간, 쳇바퀴 같은 시간.



이제는 원망보다 덮어두는 것이 익숙한 시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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