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떠난 나홀로 유럽 여행
25살에 나홀로 첫 유럽여행을 했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앞둔 여름방학 때였다.
사실 꼭 가고 싶어서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한 학기 인턴을 해서 번 돈으로 졸업 전에 뭘 할까 하다가, 다들 그렇게 좋다고 하는 유럽여행을 다녀와보긴 해야 할 것 같아서 가봤다. 다른 사람들은 2-3일마다 나라를 옮겨다니며 여행을 하던데, 나는 여행 중에 캐리어 끌고 이동하는 데에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이고 싶지 않아 나라도 딱 두 군데만 갔다. 덴마크와 독일. 그 나라들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치안이 괜찮다는 곳으로 골랐다.
그래도 숙소만은 다양하게 잡았다. 혼자 가는 여행이니만큼 현지인과 접촉이 있으면 더 특별한 여행이 될 것 같아 에어비앤비에서 호스트와 한 집에 머물며 방 하나만 빌려쓰는 방식으로 예약을 했다. 중간에 한국 음식이 그리워질 수도 있으니 한국 민박집도 4일 정도. 총 12박의 여행이었다. 비행기와 숙소만 딱 정해놓고는 다른 것은 거의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날아갔다. (심지어 대중교통 타는 법도 알아보지 않았다. 왜 그랬지?)
혼자 가긴 했지만 사실 혼자 여행하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다. 나는 매일 유랑 카페에서 동행을 구하는 사람들과 접촉하여 나처럼 여행 중인 한국인들과 함께 했다. 그 중에는 영 재미가 없던 사람도 있었고, 꽤 친해져서 며칠씩 함께 여행을 다닌 사람도 있었다. 지루한 시간도 있었고 제법 재미있던 날도 있었다. 판타지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어두운 숲 속의 예쁜 펍에서 오늘 처음 만난 여러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던 밤은 노잼, 어느 교회 앞 잔디밭에 앉아 어제 알게 된 난 남자동생 두 명과 맥도날드 햄버거와 오렌지주스를 탄 보드카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한낮은 유잼. 덴마크에서 2-3일 정도를 함께 재미있게 보냈던 한 살 어린 여자애와는 한국에 와서도 한 번 보았다.
그렇지만 모두 거기까지였다.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사진도 찍고 일기도 적었지만, 딱히 다시 추억하거나 그리워한 적은 없었다. 사실 그 당시에도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디를 보아도 분위기 있고 멋진 건물들과 거리의 풍경에 '와, 내가 정말 유럽에 있구나' 하고 감탄했지만 그런 감흥도 이삼일이 지나니 사라졌다. 일주일쯤 지나니 그 자리엔 '사람 사는 것 다 똑같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섰다. 새로운 동행을 만나면 어느 정도 친해지기까지는 어색한 대화가 무의미하고 지루했다. 관광객답게 열심히 박물관과 명소들을 탐방하고 다녔지만 그저 그랬다. 매번 사먹는 식사는 엄청 비싼 데 비해 그 정도의 값어치는 없었고, 집을 같이 쓰는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모두 친절했지만 영어로 말하기가 불편해서 피해다녔다.
하루는 관광에 지쳐서 베를린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보기도 했는데 내가 여기서 하루에 10만원 넘게 쓰면서 뭘 하고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들었다. 비싼 여행이니만큼 매일 어딘가를 쏘다니고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드는 게 즐겁지 않았다. 매일 서울에서는 별 목적 없이 카페에 나가 소일거리만 해도 충분히 즐거운데. 유랑 카페를 통해 하루 같이 놀았던 사람 중에서는 독일에서 살아보고 싶어 두 달을 머물기로 하고 지내는 중이라던 여자애도 있었다. 아마도 타지에 친구가 별로 없다보니 이렇게 한국 여행객들과 하루저녁이라도 놀려고 나온 것이겠지. 그 때 그 여자애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한 생각은, 멋지거나 부럽다가 아니라 '난 그래도 다음주면 돌아가는데 이곳에 두 달이나 머물러야 한다니 그 때까지 뭐하고 살아?'였다. 그만큼 나는 그곳에서 억지로 하루하루 이벤트를 만들며 보내는 게 꽤나 지겨웠던 것이다.
박물관과 성을 보는 데 지쳐 동물원도 가고 플리마켓도 가고, 귀국 전 마지막날에는 정말 할 게 없어 베를린을 떠나 드레스덴 당일치기 여행까지 혼자 다녀왔다. 드레스덴은 참 예뻤지만 고속버스로 편도 3시간이 걸리는 길이었기에 당일치기는 지금 생각해도 무리한 계획이었다. 심지어 낯선 시스템 탓에 승차위치를 못 찾아서 저녁에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아침에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그 날 못 돌아가는 줄 알고 발을 동동 구르며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멀리 한국에 있는 (전)남자친구는 대강 걱정해주는 척 하다 홀랑 잠들어버리기까지. 간신히 그 다음 버스를 잡아 타고 베를린으로 향하면서 남자친구에 대한 깊은 원망에 울면서 돌아온 게 기억난다. (원래 서운한 게 많던 때였다..)
그렇게 유럽여행을 마무리하고 나니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되니 어찌나 신나던지. 귀국길에 유럽여행이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아마 덴마크와 독일이라는, 여행하기에 특별히 재밌지도 않는 국가 두 군데만 갔던 것이 잘못된 선택이긴 했을 거다. 그리고 혼자 가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도 생각보다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유럽 여행 어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마다 별로 재미없었다고 하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다들 신기해했다. 하지만 나야말로 신기하다. 유럽의 예쁜 건물과 거리가 좋아보이는 것도 이삼일이면 무뎌지고, 나머지는 특별할 것도 없는데 도대체 다들 유럽여행의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황홀한 시간처럼 추억하고 시간과 자금의 여유만 생겼다 하면 다시 또 달려나가는 걸까?
그래도 남들 다 가보는 유럽여행을 나도 다녀와보았다는 점에서 만족했다. 대학 시절에 꼭 한 번은 가보아야 한다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유럽여행, 만약 한 번도 안 가봤더라면 뭔가 중요한 걸 놓친 건 아닌가 하는 찝찝함으로 남았을 것 같다. 하지만 나도 가보았고, 나에겐 맞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는 점이 내 유럽여행의 소득이었다. 큰 돈 들여 다녀온 여행을 그다지 즐기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자주 가지도 못할 유럽여행을 또 가고 싶어서 안달할 일은 없으니 잘 됐다. 어떤 직장인 언니는 한 해 동안 돈과 휴가를 아껴서 일주일 남짓 유럽 여행 다녀오는 걸 인생의 낙으로 삼는다던데, 나는 그럴 돈으로 더 자주 국내여행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 해외 여행 가느라 재산을 탕진할 일도 없다는 것도 좋은 점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처음 해본 장거리 여행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더라.
그래, 그 땐 유럽 같은 건 누가 보내줘도 안 갈 줄 알았다.
그러던 내가 스웨덴이라는, 유럽국가 중에서도 여행지로 인기 있는 편은 아닌 한적한 나라에 이렇게 드나들고 있다. 심지어 아무도 해외 여행은 꿈도 못 꾸는 코로나 시기에 무려 3개월이나 스웨덴에서 지내다 오기까지. 낯설 뿐 아니라 내 취향도 아닌 북유럽 나라 스웨덴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첫 유럽여행 후 2년이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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