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수유예 Sep 08. 2024

엄마가 내게로 왔다.

프롤로그 

나의 친애하는 귀인

  사십 대 말, 인생후반기에 귀인이 나타날 거라며 진지한 표정으로 내 손금을 봐주던 지인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버리진 못했다. 스스로 선택한 비혼 인생에 만족하지만 언젠간 내 삶을 한번 휘저어 상승시켜 줄 힘을 지닌 존재, 아니면 어떤 계기 같은 것이 찾아와 내 생활에도 새로운 바람이 일 것이라 고대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인의 말을 흘려보내기는커녕 예언이 어서 실현되기를 바라면서 살아온 셈이다.

  인생후반기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오십 대 중반을 넘어서도 나를 고양시켜 줄 이가 나타나거나 압도되는 어떤 순간이 도래한 적이 없으니 지인의 말은 그저 재미 삼아 던진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밀려오는 서운함의 정체를 이름 짓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만 속절없어할 때, 엄마가 내게로 왔다.


  코로나 팬데믹 발생 6개월 전, 엄마는 홀로 살던 대구의 전셋집을 정리하고 내가 사는 인천으로 이삿짐을 옮겼다. 혼자만의 고즈넉한 생활을 이어가던 나는 작은방 하나에 가득 찬 엄마의 짐을 보며 서글픔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꼈다. 팔십 년 넘게 살아온 인생의 물리적 총량이 고작 작은 방 하나 채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픔이 밀려왔고,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던 내 생활패턴을 어쩌면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으로 가슴이 막혔던 것이다.

  사실 인천으로 이사 오기 전에도 엄마는 대구보다는 안동 여동생 네에서 살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대구 집은 어쩌다 들르는 곳 정도였다. 맞벌이를 하는 여동생 부부를 위해 손녀 손자를 돌봐줄 사람이 엄마밖에 없었으므로 조카가 태어난 후부터 코로나 팬데믹 전까지, 아니 팬데믹 동안에도 이삿짐만 인천에 맡겨둔 채 안동 여동생 집에서 생활했다. 


  본격적으로 엄마와 내가 같이 살기 시작한 것은 2022년 여름방학부터였다. 중학생이 된 조카에게 공부방이 필요한 데다 엄마가 골다공증을 치료하기 위해 다니는 병원이 김포공항 근처에 있어 인천에서 사는 것이 여러 모로 편리했기 때문이다.

  늙어가는 딸과 늙어버린 엄마의 갑작스러운 동거. 다른 점이 너무 많고 인생을 바라보는 각자의 고집도 만만찮은 두 여자가 무사히 공존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노력, 그중에서도 관찰과 경청이 특히 필요했다. 주변에서 보아온 모녀간의 한집살이에서 발생하는 여러 유형의 불협화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나는 엄마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움직임을 세심하게 살폈다. 엄마도 인천 생활에 적응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낯선 면모 몇몇을 알게 되었는데 가장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 치매였다.


  엄마의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 다만 미미한 증상을 내가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2021년 여름, 엄마가 인천에 잠시 올라와 머물 동안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엄마는 자주 젊은 시절에 대해 들려주곤 했는데 워낙 여러 번 들어온 터라 나는 이미 스토리를 시간 순으로 꿰고 있었다. 그런데 2021년 여름부터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아귀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나는 단순히 기억의 혼동이라고만 생각했고, 이야기의 선후를 바로잡아주면 엄마는 웃으면서 그랬던가? 하고 넘어가곤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엄마에게 ‘치매’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나의 언어 활용영역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다. 자라면서 지켜봐 온 엄마는 결코 그 단어가 침투하거나 혹은 그 단어에 휘둘리거나 하지 않을 만큼 사고와 행동의 선이 명확했고 명민했고 냉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엄마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지난날에 대한 기억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다. 병원에서 초기 치매 판정을 받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 자신은 치매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배설하듯 막무가내로 쏟아 놓고도 후회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이 없다.

  이런 엄마를 바라보며 엄마의 증상을 조금이라도 빨리 인지하고 서둘러 대처했더라면 괜찮았을까? 팔십 세가 넘으면서 상실되고 있던 청력에 더 관심을 갖고 조기에 치료했더라면 치매는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는 자책하곤 한다.

  그리고 문득 현재 내 나이 때의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어떤 마음으로 고된 삶을 견뎌 왔던가를 기억해 내려 애써 보기도 하는데, 그 당시 내가 이십 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장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엄마의 서사가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결심했다. “엄마의 오십 대에 대한 기억은 복원할 수 없지만 인생 말년의 서사가 쓸쓸하지 않도록 만들고 채워주자. 더 자세히 보고 관심을 갖고 호응해 주자. 지나간 시절에 대한 서사 중 복구할 수 있는 것들은 기록으로 복구하자. 설사 이 기록이 흔하디 흔한 인생 잡기가 되더라도 일단 쓰자. 내가 현재의 엄마 나이가 되어 외로이 늙어가며 옛 생각에 잠길 때, 분명 엄마를 가장 많이 추억할 테니 지금 바로 엄마의 이야기를 써 두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려주자.”

  오빠가 응원하고 동생이 박수를 보내왔다. 솔직히 하루하루 바삐 돌아가는 교직생활을 이어가며 언제까지 이 결심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나의 문장은 얼마나 미성숙하고 빈곤한가.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사람들 앞에 나서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뒤에 숨어 있기’ 근성은 또 어찌할 것인가?


  많은 이유들이 지금도 나를 주저하게 하지만 용기를 내기로 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걸어온 엄마가 들려준 마음의 이야기와 엄마와 내가 서로를 살아내는 모습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내보이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글을 쓰기 전의 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니, 그것은 온전히 엄마가 내게로 온 덕분이리라.


  인생후반기에 귀인이 나타난다던 지인의 예언은 빈말이 아니었다. 무미건조하던 생활에 ‘치매’라는 바람을 몰고 와 나를 글쓰기로 고양시켜 준 나의 친애하는 귀인, 엄마.

  비로소 내게로 온 엄마를 이제 말하려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