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학기 석사생의 정신 상태
1편에 이어 2편을 제법 금방 들고 왔다. 에헴. 갑자기 브런치 포스팅을 한다는 건 사실 회피 스킬을 쓰고 있다는 것... 이번주에 논문 챕터 5를 끝장내겠다는 목표로 달리는 중인데 이럴 때일수록 딴짓이 하고 싶어 진다. 후후. 지난번에는 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으니 이번엔 대학원생 라이프에 대해 써보겠다.
작년 초에서 이맘때쯤이었나. 한창 노션 플래너로 매일 할 일을 정리하고, 식단과 운동량, 그날 쓴 돈까지 정리하는데 열을 올렸던 적이 있다. 사실 나는 계획을 촘촘히 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고, 살면서 업무가 아닌 생활을 이런 식으로 계획하고 기록한 적은 없었다. 갑자기 내가 MBTI P에서 J가 된 걸까? 갑자기 갓생러가 되고 싶었던 걸까?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불안해서 나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에는 아, 내가 계획을 세우고 성취함으로써 자기 효능감을 느끼고 싶었구나, 정도로만 자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어떤 인스타 툰을 보다가 사실 그보다는 불안이 더 컸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인스타툰: https://www.instagram.com/p/C4uUIeeL_iy/?igsh=NzdjZTJlbDQ0azJw) 불안과 통제는 한쌍이니까, 누군가는 타인을, 또 어떤 이는 자신을 통제하면서 불안을 해소한다. 대부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사랑이나 관심으로, 혹은 자기 관리와 계획으로 착각하지만.
작년 초의 내 불안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수업이나 생활에서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입학 초기에 1차 혼란기를 보내고 '좋은 면만 보자'라고 생각을 바꿨는데, 오히려 내 선택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감정이 크다 보니 '태국에서의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나?'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공부를 하든 놀러를 더 다니든 뭐라도 더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함을 누르려 생활의 작은 부분마다 기준을 정함으로써 통제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면 '잘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 행위가 전부 부정적인 측면만 있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감정 일기와 '오늘의 기쁨과 만족'(내가 지었다 ㅎㅎ)에 대해서도 매일 짧게 기록했는데, 지나고 나니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작고 사소한 것들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보였다. 주로 날씨, 햇볕, 어떤 노래, 화려한 색깔의 꽃, 초록초록 연두연두 나무, 마트 또는 시장 구경, 아이스라테(처돌이) 같은 것들이었다. (매일같이 날씨와 햇볕 바람 같은 얘기들이 반복됨...) 그리고 내 감정은 때때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적정 수준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더 다행히도 나는 뭐 하나 꾸준히 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계획과 기록에 집착하는 수준까지 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흐지부지 되었다(?). 논문 학기에 접어들면서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서 재미와 효능감을 다시 찾았고, 자연스럽게 불안 수준도 낮아졌다. 특히 올해 초에 방콕 시내로 이사를 하고 난 뒤로는 뻔질나게 방콕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멘탈이 훨씬 좋아졌다(?). 요즘은 기한 내에 논문을 써내야 하기 때문에 일정관리를 하고는 있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타이트한 수준을 찾은 것 같다.
늘 아침형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한 번도 그랬던 적은 없었다. 이쯤 되면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당당히 무시해야 하는데, 하루가 일찍 시작되는 더운 나라에 살면서도 해가 중천에 떠서야 뭔가를 시작하는 게 또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유명한 노점상이나 노포들 중에는 새벽 5시 반에 문을 열어 12시면 문을 닫는 가게들도 많은데, 나는 아마 여기 평생을 살아도 못 가볼 가게들이 아닌가... 아무튼 남반구 나라들은 대부분 출근 시간이 한국보다 이른 8 시인 경우가 많다 보니, 워라밸이 좋다면 보통 4시 반~5시에 하루 일과가 끝나기도 한다.
나도 상상 속에서는 언제나 8시에 일어나 9시부터 4~5시 정도까지 공부하고 그 후로는 편히 쉬는 생활을 꿈꾼다. 혹은 더 일찍 일어나 아침의 고요함과 아직은 시원한 공기 같은 것을 느끼며 스트레칭을 하는... 그런... 일은 그러나 일어나지 않았다.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가면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는데 나는 여행에서도 늘 10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러니 여기 살면서도 잠자리가 낯설어 선잠을 잤을 때 빼고는 9시 전에 일어난 적이 없었다.
도서관이나 코워킹 스페이스로 출퇴근을 하면서 하루가 늦게 시작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또 많아졌는데, 9시쯤 일어나 스트레칭하고 씻고 도시락을 싸서 나가려고 하면 이미 11시가 넘어서 햇볕이 정말 뜨겁기 때문이다. 10시만 돼도 이미 37도에 육박하는 땡볕이라 집 바로 앞 전철역이나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숨이 턱턱 막힌다. 아! 일찍 나올걸. 아!! 일찍 일어날걸. 이 더운 나라에서 왜 이렇게 나는 하루를 늦게 시작하는 걸까.. 더우니까 집에서 할까...? 아니다, 그래도 가자, 그래도 나가자!라는 무한 루프를 거의 매일 반복하곤 했다.
1-2주 전쯤부터는 드디어 '얼리버드'에 대한 집착을 버렸는데, 도서관에 도착하는 시간에 관계없이 결국 내가 하루에 정말 집중할 수 있는 순 시간은 최대 6시간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이 6시간이든 8시간이든 내가 써낸 분량이나 퀄리티는 비슷한 수준이었고, 그 말인즉슨 6시간을 넘어가면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최종 디펜스가 코 앞에 닥친 상황이라면 초인적인 힘으로 뭐라도 써내겠지만, 지금은 그럴 타이밍은 아니라서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매일 꾸준하게 정해진 분량을 써내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내 신체와 뇌는 아침에 성능이 썩 좋지 않은 편이니, 무리해서 일찍 일어나는 것에 집착하거나, 혹은 그러지 못하는 나를 탓하기보다는 내 생체리듬에 맞게 아침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고, 건강하게 먹고, 아이스커피 한 잔과 함께 오후 시간 집중력의 질을 높이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 하루에 작성해야 하는 목표 분량을 살-짝 높은 수준으로 정해두었더니 딴짓하는 시간도 줄고 효율도 좋아졌다.
내가 다니는 학과는 4학기 과정으로 처음 1년(2학기) 동안 모든 코스워크를 끝내고 2년 차 1년은 논문만 쓰는 것을 기본으로 설계되어 있다. 첫 학기 수강신청을 할 때 일단 나에게 과목 선택권이 없다는 것에 놀랐고, 한 과목에 2학점 씩이라 한 학기에 여섯 과목씩, 2학기 동안 총 열 두 과목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고등학생인가..?) 태국의 시스템이 그런 것은 아니고 이 학과만 그랬다. 처음에 풀타임 학생을 대상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파트타임이나 학점이수를 위한 micro credit 수업을 만들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주 타겟층을 전업 학생으로 변경한 것 같다. 그리고 초대 학장이 의대 출신이라 (이 학교는 의대로 시작해 종합대학이 된 학교로 의대 파워가 세다) 마치 의대생들처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과목을 듣게 하고 싶었다는 비화도 들었다. 1학기의 혼란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허덕이며 2학기까지 마치고 나자 내게 남은 5천 단어 분량 에세이 10개... (그래도 2과목은 기말 발표로 대체)
논문 학기에 접어들자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행정 절차 때문에 자주 화가 났다. 대학교라는 조직의 특성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태국의 관료주의가 더해지면서 뭐 하나 내가 마음먹은 대로 쉽게 진행되는 법이 없었다. 우선 논문 프로포절 심사부터 지도교수 위원회 임명, 윤리위원회 심사, 논문 제목 확정, 최종 논문 디펜스 일정 신청, 최종 심사 위원회 구성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신청과 승인에 소요되는 시간이 길었다. 오래 걸릴 뿐 아니라 기본 적으로 반드시 3주 전에는 제출하지 않으면 아예 반려를 당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뭔가 새로운 기준이나 절차가 툭툭 튀어나왔다. 지침이라는 것을 어디다 숨겨놓고 자기들만 공유하는 것처럼, 갑자기 사실은 A가 아니라 B였다고 2주 후에 말해준다던가, B라고 해서 수정해서 제출했더니 사실 C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니 반려라고 했다 (3주가 이미 지났는데...). 이런 식으로 스무고개처럼 지침을 알아내고 전진과 후진이 반복되다 보니, 자주 화가 나고 매우 진이 빠졌다. 회사였다면 본부장님 방에 쫓아가서 죄송한데 급해서 그러니 빨리 결재 부탁드린다고 읍소했을 텐데, 그러면 회사 일이니 조금 핀잔을 듣더라도 다들 협조해 줄 텐데, 여기서 나는 그저 (태국 말도 못 하는) 학생 1이니까, 나만 발 동동 거리고 뭔가가 삐끗해도 결국 내 사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대학은 권위적인 면이 강해서, 학생 친화적이라기보다는 '넌 학생! 난 대학!'이런 느낌으로 학교 행정을 운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찌어찌 논문 프로포절을 통과한 뒤에도 현장조사 예산 신청/승인 과정이 또 지난했고, 돌아와서 환급받는 과정은 2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이제는 마음을 많이 내려놨... 는데도 쓰다가 다시 열이 올라오는 걸 보니 아직 적응 못한 것 같다.
얼마 전에 팟캐스트를 듣다가 인도에서 박사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디언 타임에 맞춰 논문 심사와 학위 수여가 진행되기 때문에 최종본 제출 후에도 실제로 학위를 받기까지는 길면 몇 년까지도 걸린다고 했다. 그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것 들으며 아아 선생님 무한한 존경을... 태국 정도면 사실 슈퍼 패스트인데 내가 너무 한국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무릎을 탁! 쳤다. 이제 최종 논문 디펜스 신청과 E-논문 제출과 졸업 신청 뭐 등등 한 5개 정도의 승인 절차가 또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음에는 조금 덜 빡치면서 할 수 있기를..
덧붙여, 내 맘 같지 않은 행정절차와 관료주의에 화가 마이 났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 태국 문화에서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마구 표출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근데 사실 이건 만국 공통 아닐까...?) 화를 내봤자 나에게 더 불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럴 때면 속이 타들어가지만 항상 "오케이 카, 땡큐 카^ ^"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컵쿤카도 물론 많이 쓰지만 오케이 카 땡큐 카 같은 태국식 영어가 이제 익숙해졌다 ㅎㅎㅎ 내 넋두리 읽어주신 분들 땡큐 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