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방 안에 남아 전원이 꺼진 랩탑을...
논문이 끝났다! 7월 3일에 최종 디펜스를 했으니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 사이 교수님들의 코멘트를 바탕으로 수정을 하고, 지난한 관료주의 행정절차에 따라 최종본을 제출했다. 논문 서식 편집에서 뭔가를 틀려서 두 번을 반려당했고...지금은 교수님들 사인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마지막 단계에 와있다. 서페셜한 협동과정이라 다섯 개 학과를 돌면서 학장 사인을 받아야 하는 나의 숙명... 그리고 학회지 게재가 졸업 요건이라 졸업장 받으려면 또 멀었지만 아무튼 논문은 끝난 것이 맞다. 정말 맞다.
노션에 기록해 온 논문 일정을 보니 작년 7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자료를 읽으며 컨셉노트 작성을 시작했다. 정확히 1년이 걸린 것이다. 최종 제출을 하고 나자 갑자기 할 일과 불안이 사라지고 시간이 넘쳐난다. 책상에만 앉으면 계속해서 뭔가를 먹고 싶었던 갈망도, 반드시 커피를 한 잔 마셔야만 뭐든 쓸 수 있을 것 같았던 절실함도 없어졌다. 그렇게 격렬하게 늘어져있다가 돈 벌러 어디 잠시 짧은 출장을 다녀왔는데 그거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좀 받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한숨 돌린다. 역시 돈 벌기 쉽지 않았다 후...
논문을 쓰는 동안 매일 아침 '오늘도 망했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약간의(?) 완벽주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목표한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이미 하루를 망쳤다는 패배감이 엄습했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는 목표를 세우고는, 주 5일을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눈 뜨자마자 '아 오늘도 글렀네'라는 생각을 반복했다. (아니 그럼 알람을 좀 더 늦은 시간으로 맞추면 될 것을...) 늦게 일어났으면 재빨리 준비해서 책상에 앉으면 되는데 '이왕 오늘은 글렀으니 어쩔 수 없고 내일부터 제대로 할까' 싶은 유혹이 찾아왔다. 다행히도 그때마다 '으아아아 그래도 하자'는 생각으로 책가방을 메고 어디로든 나갔다. "그래도 해야지"라고 조용한 집 안에서 혼잣말을 탄식하듯 내뱉으며, "그래도 나가자!"는 주문을 외우며 얼굴에 선크림을 마구 발랐다(내 피부는 소중해). 도서관으로 카페로 코워킹스페이스로, 미적거리다 오후 2시가 넘어 나갔다가 5시에 카페가 문을 닫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유튜브만 보다가 자는 날도 많았다.
텅 빈 화면에 깜박이는 커서를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지만 챕터를 나누고 서브 섹션을 잘게 쪼개서 매일매일 그날의 할당량을 쓴다고 생각하니 막막함이 덜했다. 서브 섹션은 다시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지고, 단락은 문장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결국 이러나저러나 문장을 쓰면 됐다. 문장을 쓰면 단락이 되고 단락이 모이면 서브 섹션이, 서브섹션이 모이면 챕터가, 챕터가 모이니 논문이 되었다. 참으로 단순하지만 명료한 진리였다. 대학원 생활은 무수히 많은 불확실성과 불안을 감내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결승점에 대한 생각은 미뤄두고 매일 오늘의 문장을 쓰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았다.
졸업을 제때 못할 것 같은 불안함에 마음 졸였던 때도 있었다. 우리 과에서는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한데(제때 졸업한 학생이 아직까지 0명임), 나는 이걸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이건 나의 성장 환경과도 연관이 있는데, 그게 에.. 얘기하자면 너무 딥해지니까 생략하겠다. 아무튼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박사도 아니고 석사 졸업을 연장한다? 완전 한심한 모지리 패배자 그 자체인 것이다... 아무도 나를 비난하거나 질책하거나 다그치지 않았지만 나 혼자 내가 세운 기준에 미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사실 그건 불안을 넘어서 거의 공포에 가까웠던 것 같다. 학과 사무실에 제때 졸업하려면 언제까지 뭘 마쳐야 하냐는 걸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매번 답변이 달라서 마지막에는 마음을 내려놓고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고작 한 학기 더 다닌다고 해서 내 인생이나 지구에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것도 인정하게 됐다. 결론적으로는 학기 연장만은 피했으니 럭키비키인가..? 늘 평온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불안이에게 컨트롤타워를 빼앗기지 않고 내 삶의 동반자로 때로는 원동력 삼아 잘 다스리며 논문을 마친 것이 뿌듯하다.
학위 논문 한 편을 썼다고 해서 내가 대단한 학자가 된 것도 아니고 내 지식이 대단히 업그레이드된 것도 아니지만, 이 시간에서 내가 얻은 게 있다면 "그래도 해야지"와 "뭐라도 써야지"라는 태도일 것이다. 이건 논문이 아니라 삶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완벽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고 패배감이 찾아와도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하는 것. 크고 거대한 일도 단어와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쓰듯 하나씩 하면 된다는 것. 그리고 하나 더하자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학교의 행정절차와 외국인 유학생의 한계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수용함으로써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니까. 또 이렇게 하나 배운다. (연구비 예산 결과보고서 낸 지 4개월 지났는데 아직도 환불 안된 학교 행정도 받아들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