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와 태국의 지진
브런치 포스팅은 여전히 작년 페낭 여행기에 멈춰 있지만 사실 한국에 돌아온 지 6개월이 넘었다. 태국에서도 기록하지 않던 태국 이야기를 한국에 와서 정리할 리가.. 타고난 게으름으로 또 이곳을 방치해 두면서도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마 전 발생한 태국과 미얀마의 지진에 마음이 무거워 뭐라도 적어보려 한다.
지진이 난 직후에 태국에 있는 친구들, 그러니까 태국에 있는 미얀마 국적의 친구들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부랴부랴 뉴스를 찾아봤다. 영상 속 폭삭 내려앉는 태국의 고층 빌딩을 보며 나는 말을 잃었다. 태국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의 상당수가 미얀마인인 것을 안다. 지진 발생 당일, 뉴스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된 태국의 영상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파괴적이고 스펙터클 했다. 성냥개비탑처럼 무너지는 고층빌딩,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리는 고급 콘도 인피니티풀의 물. 전기도 인터넷 접근성도 불안정한 미얀마 만달레이의 상황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해외 언론과 국내 언론들이 현장 취재를 하기 시작했지만, 군부가 통치하는 미얀마에서 제대로 된 구조나 사상자 현황 파악은 요원해 보였다.
내 연민은 고장 난 나침반처럼 먼 나라의 일에 반응한다. 내가 하는 일 때문에 이런 소식에 마음을 쏟는 것인지, 내가 이런 소식에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여태껏 이 일에 몸 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기엔 같이 일했던 미얀마 파트너 기관 사람들의 이야기가, 태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미얀마 친구들의 삶이 너무나 가깝다.
2021년 2월 1일,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날을 선명히 기억한다. 같은 팀의 미얀마 담당자가 오전부터 은행 외화 송금 담당자와 통화하느라 분주했다.
“오늘 예산 송금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거 갈 수 있어요?”
은행에서는 쿠데타가 난 국가로의 달러 송금을 거절했다. 당연한 조치였다. 보낸다고 한들 중계 은행에서 막힐 수 있었다. 몇 달 뒤, 나는 전임자로부터 미얀마 프로젝트를 넘겨받았다. 쿠데타 이후 파트너기관에서 보내온 사업 보고서를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현지 스텝들은 말 그대로 총성을 들으며 사업장으로, 오피스로 출근하고 있었다. 긴급교육지원을 위한 신규 프로젝트 제안서에 서술된 ‘상황 분석’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쥐고 있던 빨간펜을 내려놓고 제안서의 완결성과 논리구조를 “검토”하는 일을 멈췄다.
태국에 있는 동안 미얀마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며 코비드와 쿠데타를 통과한 이들의 일상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들었다. 학교에서는 본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활발히 했던 미얀마 유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지난해 초에는 군부가 강제징집을 위한 병역법 시행을 발표하면서 해외체류 중인 친구들 또한 징집 대상이 될까 두려워했다. 미얀마에 두고 온 동생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해외로 빼낼 방법을 궁리하기도 했다. 쿠데타 이후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다. 군부는 학교와 병원을 가리지 않고 공습했고, 아동이 끔찍하게 살해됐다. 그런 미얀마에 이제는 지진이라니. 상황이 이지경이 되자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한다’고 호소하는 군부를 반겨야 할지 역겨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류애와 위선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서성이던 내 참담함은 “서로의 삶이 한 자락이라도 섞이면 이해하고 공감할 여지는 꼭 생긴다”(은유, 2019)는 문장으로 이해받는다. 함께 지내고 일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가본 적 없는 어느 나라의 비극, 실체 없는 타인의 고통, 재난영화처럼 스펙터클 하게 보도되는 지진의 참상이 고유한 개인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어떤 공감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내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안온한 내 일상 가운데 생사를 헤매는 이들의 안위를 바라는 마음은 미약하고 무력하기 그지없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