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로, 자그레브에서 파리로,
*이전에 썼던 글에 살을 붙이고 이리저리 각색해 봤습니다.
유럽 여행을 할 때 한 번을 제외하곤 전부 버스를 타고 나라를 옮겨 다녔다. 한국에는 시외/시내버스만 있지만,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선 시외버스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시외+국제”버스였다. 파리의 시외버스 터미널에는 리옹에 가는 버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에 가는 버스가 나란히 서 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만 시외버스와 ‘국제’ 버스가 한 공간에 있는 장면에 괜히 마음이 설레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는 23시간의 버스 타기에 도전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버스로 국경을 넘은 건 한창 싱가포르에서 백수생활을 하던 때였다. 친구가 ‘당일치기 해외여행’을 하자며 나를 꼬드겼다. 당시만 해도 해외라곤 두 달째 살고 있던 싱가포르가 전부라, ‘해외에 나간다.’는 말은 부담스러웠다. 지갑 사정 때문에 좀 망설였지만 당일치기 해외여행이란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조합은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었다.
다음날 친구와 함께 말레이시아의 가장 남쪽, ‘조호바루(Johor Bahru)로 가는, 시외버스도 아닌 시내버스를 탔다. 가지고 있던 싱가포르 교통카드로 충분했다. 시내버스답게 정거장마다 정차하여 사람들을 태웠고, 싱가포르의 북쪽 국경에 도착하자 모두가 버스에서 내렸다. 여권에 도장 하나를 찍고 다시 타고 왔던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는 건너는 데 채 3분이 걸리지 않은 다리를 건넜다. 휴대폰이 제일 먼저 말레이시아 주파수를 잡으며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레이시아에 도착하고 말레이시아 쪽 출국 심사를 마쳤다. 아침 먹고 출발했는데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지금, 여전히 아침이었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가 존재하고, 시내버스 요금으로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는 것이 그 당시엔 충격이었다. 섬나라는 아니지만 분단으로 인해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대한민국에서 온 내게 버스 타고 해외에 간다는 건 정말 신기하고 짜릿한 일이었다. (예전에 알던 한 분은 조호바루에 놀러 갔다가 그만 싱가포르행 막차를 놓치고 말았다. 마침 싱가포르 북쪽에 살고 있었던 그는 '에이 뭐 어때'하며 걸어서 귀가했다는..... ㅋㅋ) 비록 섬나라인 싱가포르지만 말레이시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덕분에, 버스를 타고 말레이시아의 이곳저곳을 참 열심히 들락날락했다.
육로를 이용할 수 있다면 기차, 버스, 자가용, 자전거를 타거나 심지어 걸어갈 수 있다. 해외에 나가는 게 이렇게 쉬운가? 해외에 나가는 게 이렇게 저렴했던가? 유럽의 젊은이들은 당장 10대만 되어도 이웃 나라에 쉽게 놀러 간다. 버스 한 번에, 혹은 자전거를 타고 쉽게 떠난다. 유럽 여행 중에 텐트를 가지고 자전거 여행하는 사람들도 참 많이 만났다.
이런 경험을 끊임없이 한 아이들의 생각은 쉽게 뻗어간다. 어린 시절의 말랑말랑한 사고로 낯선 문화와 낯선 사람들을 직접 보고 세상을 배운다. 한 번이라도 가 본 나라는 그만큼 친숙하고 뉴스에서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게 된다. 한 나라의 시민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이 되는 순간이다. 해외여행의 문턱이 그만큼 낮아져서 사람들 간의 문화적 격차도 줄어든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 가기 위해선 비행기를 타야만 하는 우리는, 그래서 걸어서 어디든 닿을 수 있는 그 자유가 부럽다.
처음 파리에서 브뤼셀로 이동하면서 탄 버스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창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프랑스 – 안녕히 가십시오.”, “벨기에 – 환영합니다.”가 적힌 표지판을 보겠다고 거의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지만, 이정표는 내가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지나갔다. 버스로 국경을 넘는 것도 모자라 출입국 검사도 없다니, 여행하는 사람에겐 정말 천국 아닌가. 비록 여권에 스탬프가 찍히지 않는 건 좀 아쉽지만.
함부르크에서 나를 재워 주셨던 나달 아저씨는 30년 전 독일에서 고향 시리아로 갈 때 버스를 이용하셨다. 편도로만 3일이 걸리는데(3일이라니...ㅠ), 매번 허리 통증과 불면에 시달렸다고 하셨다. 한 번은 옆 사람이 3일 동안 죽은 듯이 잘 자서 매번 그의 무릎 위를 넘어다니기도 했단다. 탈 때마다 큰 마음을 먹어야 했던 그때를 끔찍하게 표현하시던 아저씨는 버스 여행이라면 학을 떼셨다.
자그레브에서 버스를 탄지 12시간이 지났을 때, 아저씨의 말이 슬슬 이해되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알프스의 만년설을 보며 ‘우와’하는 것도 지겨워서 멍만 때렸다. 이제 도착했겠지 싶었는데 아직도 프랑스의 리옹 밖에 안 됐단다. 버스의 승객도 모두 바뀌었다. 기사님이 꼭 ‘너는 안 내리고 뭐하냐. 혹시 파리까지 가니?’라고 날 쳐다보는 것 같아 민망했다.
23시간 동안 앉아서 네 나라를 거쳤다.(허리야 미안.) 크로아티아에서 출발 후, 2시간 만에 슬로베니아에 다다랐고, 다음날 눈 뜨니 이탈리아의 밀라노였으며, 오후엔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중간에 마음이 동하면 슬로베니아나 밀라노에 그냥 내려도 되겠는걸? 한 번쯤은 하루 종일 차에 앉아 바뀌는 풍경을 내 눈에 담고 싶었다. 속도와 효율성에 밀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잡아보고 싶었다. 한국에서도 육로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다음 주 월요일에 저의 첫 번째 책 여행 에세이 <내 뜻대로 살아볼 용기>가 세상에 나온답니다. ㅠㅠ
표지를 골라주셨던 분들, 항상 브런치 읽어주시는 분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