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공정한 도시를 꿈꾼다
나는 대학원에서 다양한 국가에서 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도시계획 및 개발’을 강의하고 있다. 학생들 대부분은 개발도상국의 공공 부문에서 일하는 공무원들로,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주를 동시에 이룩한 한국의 경험을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
내 강의의 마지막 주제는 항상 ‘공정한 도시’이다. 수잔 페인스타인(Susan Fainstein)이 쓴 ‘정의로운 도시(The Just City)’가 주요 참고자료이다. 지난 12월 3일 강의에서는 ‘공정한 사회와 도시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현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학생들과 2016년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시위를 통해 나타난 한국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해 깊이 논의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한국에서는 갑작스럽게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몇 시간 만에 취소되기는 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여전히 대통령의 비민주적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고 탄핵을 요구하고 있다.
공정한 도시를 실현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시민사회는 자율성과 권리를 기반으로 형성된 공동체로 정부와 시장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핵심주체다. 정부를 감시하고 책임 있는 행정을 요구하며 공정한 정책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의 지속적이고 활발한 활동은 민주주의 강화와 도시의 정의로운 발전에 필수적이다.
페인스타인의 책, ‘The Just City’는 ‘정의로운 도시’로 번역되지만, 나는 이 개념을 ‘공정한 도시’로 이해하고 싶다. ‘공정(Fairness)’과 ‘정의(Justice)’는 어떻게 다를까? ‘공정’은 개개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정의’는 사회전체가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하는 큰 틀의 개념이다. 공정은 정의를 이루는 과정이자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의 저자,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를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로 설명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정한 절차를 통해 적절한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또한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책에서 정의로운 사회는 시민이 공동선을 추구하고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두 철학자의 생각은 도시계획에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야말로 정의와 공정을 실험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페인스타인은 롤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정의로운 도시’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도시 정책과 계획이 공정성과 형평성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과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정의로운 도시는 신자유주의가 약화시킨 공공성을 회복하고, 도시 공간에서의 평등을 추구하는 곳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공평성(Equity)’, ‘민주주의(Democracy)’, ‘다양성(Diversity)’이라는 세 가지 핵심가치를 제시했다. 이들은 경쟁과 불평등이 강조되는 신자유주의적 도시계획 모델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샌델도 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비슷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시장의 가치가 도덕적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해서는 안되며, 공동체적 가치와 시민의 권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철학은 도시정책과 개발이 소외된 계층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정한 도시’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결국, 공정한 도시는 ‘함께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샌델의 질문에 대해, 도시라는 공간 안에서 실천적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가 매력적이라는 것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고 싶고, 일하고 싶고, 방문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멋지고 웅장한 건축물이나 화려한 도시공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곳에서 공정하고 조화로운 삶을 기대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공정한 도시는 모든 계층이 도시발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도시다. 경제적 약자와 소외계층이 배제되지 않고, 도시의 공간이 모든 시민에게 공평하고 포용적인 곳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도시공간은 종종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재편된다. 이는 기존 주민을 소외시키고, 도시의 공간을 특정계층만을 위한 장소로 전환시킨다.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도시공간이 경제적 자본의 산물이 아니라, 도시주민 모두가 평등하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사회적 권리인 ‘도시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the City)’ 개념을 주장했다. 그는 도시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집합적 경험의 장으로서, 모든 구성원이 이를 형성하고 소유할 권리, 즉 도시공간의 재생산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도시 재개발, 공공 공간의 활용, 교통정책 등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페인스타인은 르페브르의 이론을 구체적인 도시정책에 적용시켜 정의로운 도시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지침을 제시하며,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가 강조한 다양성과 포용성을 옹호했다.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에서 도시가 갖추어야 하는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도시는 모두를 위한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모두가 함께 만들어갈 때에만 가능하다 Cities have the capability of providing something for everybody, only because, and only when, they are created by everybody”.
공정한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며 서로 교류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은 도시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매력을 높이는 원동력이 된다. 다양성은 페인스타인이 강조한 정의로운 도시를 이루는 핵심가치 가운데 하나이다. 그녀는 도시공간이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다양한 집단이 공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이콥스가 그토록 보존하고 싶었던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가치는 사회적 다양성과 포용성이었다. 도시를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장의 원동력(growth machine)으로만 인식한 로버트 모세(Robert Moses)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가치로 보이지 않았다.
공정한 도시는 안정적이고 공정한 환경을 중요시 여기는 기업과 투자자, 인재들에게 매력적이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도시는 필연적으로 빈부 격차와 갈등이 나타나고 결국은 생산성을 떨어뜨리게 된다. 만약 도시가 일부 계층만을 위한 장소로 발전한다면, 필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계층(의료, 교육, 경찰, 소방관 등)의 정착이 어려워지고, 도시의 기능이 약화된다. 이는 도시를 방문하거나 도시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주고, 기업이나 투자자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마크 퍼셀(Mark Purcell)은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 개념을 확장하여 신자유주의 하에서 도시와 민주주의의 대안적 미래를 논의했다. 그의 저서, ‘Recapturing Democracy: Neoliberalization and the Struggle for Alternative Urban Futures민주주의 되찾기: 신자유주의화와 대안적 도시 미래를 위한 투쟁(미번역본)’에서 그는 공정한 도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에 대한) 비전은 단지 특정 공간을 사용자 중심으로 설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점유의 권리(The right to appropriation)’는 기존 도시공간에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필요를 최우선적으로 충족시키는 도시를 누릴 권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다 확장된 의미에서 살펴보면, 노동자들이 짧은 출퇴근 시간과 편안한 저렴 주택에서 살아갈 수 있는 도시,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근처에서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공원이 있는 도시, 고품질이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의 식품을 제공하는 식료품점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도시를 의미한다. 이러한 도시는 인종적, 계층적 분리가 없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지 않는다. 점유의 권리는 단순히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권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존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공간을 창출해야 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Lefebvre’s vision isn’t only for a more user-centered design of concrete space… The right to appropriation can be conceived not just as the right to be physically present in existing urban space, but the right to a city that fully meets, above all other considerations, the needs of inhabitants… Appropriation in that larger sense would mean a right to a city where workers could make a short commute to work… and come home to affordable comfortable housing. It would allow child-care-givers to choose from several nearby parks… It would mean shoppers visiting a nearby grocery store that offered high-quality, reasonably priced food. It would mean a city without racial and class segregation that reinforced social inequalities. Certainly appropriation demands the right to be present in space, but it also requires the production of spaces that actively foster a dignified and meaningful life.
매력적인 도시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아니라, 공정함을 바탕으로 누구나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도시이다. 공정한 도시가 매력적인 이유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도시 성장의 혜택을 공평하게 누리며, 다양한 사람과 자본이 모일 수 있는 포용적인 환경을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혼란의 시기다. 한국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주를 동시에 이룩했지만, 2024년 12월 현재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긴 터널을 걷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공정한 도시를 꿈꾼다. 한밤중 갑작스럽게 선포된 계엄령에도 촛불을 들고 일어선 시민사회가 있는 한, 한국의 미래는 여전히 밝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