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에서 위안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년 말 메마른 정신과 허약한(보기완 다르게) 몸으로 마지막(?) 회사를 퇴사하고, 올 초 정신 못 차리고 살았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의 심리상태를 정리당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동네의 독립서점 주인분의 심리상담 클래스를 신청했다. 그 시간 동안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나와 차리고 싶어 하는 나 사이에서 한 줄기 해답 같은 말이 들렸다.
"매버지 님은 정리가 중요하신 분이군요."
정리? 집 정리는 잘 안 하는 편인데... 그 정리 말고 내 생각과 감정의 정리였다. 어떻게 하면 잘 정리를 할 수 있을까?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때가 되면 그냥 본인의 생각을 적거나, 일기를 쓰거나 등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라는 말을 듣고 난 생각했다. 옳거니, 이거라면 해볼 만하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글보다는 누군가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사업을 기획하기 위한 글만 써 왔다. 그 과정에서 철저히 나보다는 남의 입장에 주로 맞춰진 채 살았는데 퇴사 후 이왕 여유가 생겨서 나를 위한 글이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초등학교 때 무지성으로 과학자, 중학교에 들어서 영화감독, 그리고 고등학교 때 작가라는 과감한 꿈의 변천을 해 왔던 나이다. 그래도 이때는 나 자신에게 솔직한 편이어서 해보고 싶은 일은 해보고 싶다 말도 하고 관련된 일을 과감하게 실천했다. 특히, 고등학교 때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한 동서양의 작가들에게 매료되어 밤새도 부족해 수업시간 동안에도 소설을 읽고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과 쉬는 시간이면 열띤 토론을 했다. 주인공의 심리와 생각, 그에 대한 내 감정들. 어쩌면 그 시절 나와 그 시간을 함께 해 준 친구들이 있어서 책과 글이라는 것이 여전히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닐지.
결국 세상과 부모님의 비위에 맞춘 경영학도의 길을 걷고 성실한 회사원으로 꽤 오랜 시간 나를 위한 독서, 글쓰기는 잊고 바쁘게 살았다. 그 시간이 마냥 기쁘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기에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 차에 내가 아는 유일한 월드 베스트 실전 압축 에세이스트 '김바롬'님의 추천으로 경기콘텐츠코리아랩이 주관하는 판교 크리에터스클럽 커뮤니티(PCC) '오직 나만 쓸 수 있는 에세이'에 참가하게 되었다. 일단 쓰고 보는 이 모임을 통해 나는 매주 2편의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7월부터 시작해 어느덧 26개의 글을 작성하였다. 작심삼일을 자주 하자는 모토로 살아온 내게 이러한 꾸준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고 있다.
글을 쓰는 만큼 남들의 글을 읽고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이다. 커뮤니티 멤버들의 저마다의 경험과 이야기로 매주 감탄을 자아내는 글이 업데이트된다. 때에 따라서 너무 바빠 혹은 힘들어 글을 쓰는 일을 놓치거나 멈추기도 하지만 난 이러한 커뮤니티에 참여하려는 사실만으로도 인정이 된다. 글 좀 못 쓰고 안 쓰면 어떤가. 읽고 생각을 나누는 일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한 과정 중 쓰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그냥 노트 펴고 손글씨를 적거나,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마무리를 못해도 그건 또 하나의 진보다. 만약 그 글을 마무리하고 혼자 감상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까지 온다면 그건 혁명이다. 그리고 누군가 내 글에 대한 감상평을 하거나 내가 누군가의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부끄러움, 고마움, 질투심, 뿌듯함 등은 고마운 보너스다. 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 시간을 내어 내 글을 읽어주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은 정말 기적 아닌가?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정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욕심이 조금 붙었다. 내가 쓰는 글을 통해 나와 같은 고민을 하거나 생각을 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도 글을 쓸 테지만 쓰면서도 이게 맞나 하겠지만 조금씩 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내 깊은 마음에 다가가는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이렇게 그냥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