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거리는 사이 6단계가 끝났다. 불어를 배우다 보면 왜 진시황 같은 전제군주나 독재자들이 대륙을 통일하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썼는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창업자가 왜 모든 체계를 통일하고 일체화하려고 했는지 그 심경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황제가 중원을 통일하자마자 처음 한 행동이 도량형과 언어를 통일한 것이었는데.. 분서갱유 같은 노빠꾸 행위를 저지르긴 했어도 일련의 행동을 보면 지도자로서는 참 화끈하고 군더더기나 무규칙을 싫어하는 시원한 성격이었을 것 같다.
아마 시황제 생전의 중원은 현대의 중국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국경이 맞닿아 있지만 제각기 제도와 언어, 문물, 풍습, 문화가 모두 다른, 현재의 유럽연합 같은 국가 형태였을 지도. 그런 독재자들 눈에 불어 같은 무규칙의 언어를 봤으면 용납할 수 있었을지 잠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6단계는 좀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표현 활용에 대해 배웠는데 형용사/부사/동사의 비교급과 형용사의 최상급 표현은 전에 배웠던 내용에 비하면 넘사벽 수준으로 어렵진 않았지만 여전히 몹시도 헷갈렸다.
비교급을 쓰겠다면 그냥 좀 얌전하게 썼으면 좋겠다. 무슨 plus가 형용사 비교급에서만 쓰이는 것뿐만 아니라 형용사랑 결합해서 최상급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대목에서 좀 낯설게 느껴졌다. mieux, meilleur는 별개로 쓸 수 있다고 치자. 영어에서도 better라는 독자적 표현이 있듯이 그런데 무슨 변칙이 이렇게 많은지.
8월 Rotterdam을 재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들. 오래간만에 수목원 숲 속을 걷는 기분이라 힐링되고 좋았다.
plus도 s가 발음이 되지 않다가 동사의 비교급 활용에 와서는 갑자기 마지막에 붙는 -s가 발음이 된다고 했을 때의 그 당혹감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meilleur는 여성/남성/복수로 변형하는데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런지 자꾸 plus bien/bon으로 표기해버리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제발 좀 하나로 통일해줬으면 좋으련만. 무슨 아이큐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예외 규칙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나와서 난감한 기분이 든다. 영어처럼 기본 활용-비교급-최상급으로 단어 자체가 드라마틱하게 불규칙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 하나. 게다가 최상급의 경우는 문장 안에 la가 두 번이나 등장할 때가 있는데 전에 배웠던 목적격 대명사랑도 얼핏 보면 구별이 안 된다. 한 문장에 있으면 다 그놈이 그놈처럼 보인다.
사람뿐만 아니라 언어에도 각자 맡은 역할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고 성별로 구획된 걸 봤을 때 어떻게 보면 프랑스어는 상당히 계급적인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 친숙하기 힘들 정도의 문법의 불규칙성을 봐도 그렇다. 마치 아이큐 테스트하듯 의도성이 의심 갈 정도로 비비 꼬아놓은 문법 때문에 일자무식이었던 중세 서민들에겐 친화적이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언어마저도 프랑스에선 엘리트 계층이 향유하던 고급문화이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다. 물론 서민들도 '말'은 (문법이 다 틀린 말이라도 말은 말이니) 했겠지만 글은 쓰지 못했을 것같다.
언어도 문화의 일종이고 그 사회나 역사의 반영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아주 무관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영어에는 불어의 잔재가 조금은 남아있지만 그래도 평준화된 느낌이 강하다. 스웨덴어를 배울 때 확연하게 다르다고 느꼈던 점 중의 하나가 문법과 단어의 단순성이었다.
북유럽은 사민주의와 실용주의가 발달한 문화권이라 문법이라는 하나의 '규칙성'이 있으면 1/2/3인칭/단복수 막론하고 평등하게적용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당연히 성별 명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점이라고 한다면 그 단순성 때문에 섬세하거나 다채로운 표현력에선 떨어진다는 것.. 이건 과거에 SFI어학원에서 배울 때 들은 이야기인데 For~로 시작하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동유럽권 출신 친구 하나가 "이 나라는 뭐든지 For로 시작하냐"라고 짜증을 내서 다 웃었던 적이 있다. 그때 (똑같이 동유럽권 출신 이민자 3세인) 강사가 "날씨가 춥다 보니 사람들 사고가 단순하고 실용적이다. 여하튼 그런 정서가 반영되어서 단어도 비슷한 것이 많고 단순한 편"이라고 말했던 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스웨덴인 친구와 핀란드인 친구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날씨가 추워서 어휘나 언어의 표현력이 풍요롭지 않다"라고.
불어도 아름답긴 하지만 내가 스웨덴어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 단순함과 실용성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용인하지 않는 깔끔함과 합리성. 그 사람들 손에서 만들어져 나온 유니크한 가구만큼이나 매력적이다.
한글은 두 언어의 중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태생 자체가 처음부터 서민을 타깃으로 만들어져선지 대중친화적이지만 또 높임말 같은 계층적 표현이 존재한다. 성별 명사는 없지만 남녀 역할이 뚜렷했던 유교문화의 영향 특성상 언어 곳곳에 남녀에게 따로 쓰이는 표현이-일본어처럼-존재한다, 하지만 프랑스어만큼의 엄격함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면 표현의 다채로움에 있어서는 한국어의 스텐스는 스웨덴어보다 프랑스어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반(半)계층적 문법과 다양한 어휘 표현력을 두루 갖춘 한국어와 한글을 구사하는 나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 중 하나를 마스터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 좀 더 용기를 갖고 남의 나라 말과 글을 더 배우라고 스스로를 격려해도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