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날, 아이 앞에서는 덤덤한 척, 별일 아닌 척, 엄마가 병원도 데려다주고 상담비도 내줄 수 있는 지금이어서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마음 속은 자책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이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 담담히 중학교 때 은따를 당한 얘기, 초등학교 때 친구에게 뺨을 맞은 이야기, 또래들 속으로 잘 섞여들지 못하고 기름처럼 떠돌았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알아채지 못했던 과거의 그 시간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모르고 놓친 모든 장면들을 흑백 필름 속 동영상을 보듯 확인하는 것은 10년 전의 상처가 아니라 방금 생긴 상처처럼 아팠다.
아이는 자기 기억 속의 최대치를 거슬러올라갔지만 나는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던 때까지도 떠오른다. 어린이집에서 언제나 제일 늦게까지 남아있던 아이가 ‘어린이집에 내가 제일 늦게까지 남아있어.’라고 했던 말, 일찍 등원하고 저녁 늦게 데려가다보니 아이의 엄마를 본 적이 없던 어린이집 친구가 소풍날 아이와 함께 나타난 나를 보고는 아이에게 ‘너도 엄마 있네?’ 했던 순간 같은 것들이.
5살 때 시력 검사를 했더니 한쪽 눈에 약시진단을 받았다. 약시란 눈에 구조적인 문제가 없는데 그 눈으로 보는 일을 하지 않아서 시력이 낮은 것을 말한다. 약시인 눈을 일하게 하기 위해 깨어있는 모든 순간 시력이 좋은 쪽 눈을 가리는 ‘가림치료’를 하게 된다.
5살부터 초등저학년 내내 애꾸눈처럼 한쪽 눈을 가리는 패치를 붙이고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던 게 아이의 자아상에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교우관계를 힘들게 한 건 아닐까? 답도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이에게 넓은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는 뭘 하든 알아서 하게 하되 넘어서는 안 되는 울타리는 넘지 못하게 키운다는 우리집 육아원칙이 사실은 방임이었을까, 내 오만이었을까. 남들이 아이 키우면서 노심초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잠시 내 옆에 머무는 거지 뭐’ 하며 고민 없이 시간을 보낸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이는 말했다.
“엄마, 이거 절대 엄마 탓 아냐. 알게 모르게 엄마한테 상처받은 게 있었겠지만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던 그냥 젊은 여자일 뿐이었고 그냥 우리를 잘 키우려고 애썼던 거잖아. 우울증이라는 세글자가 무겁겠지만 그 말에 휘둘릴 필요 없어. 그냥 마음에 온 감기 같은 거야. 감기 걸렸다고 자책 같은 거 안 하잖아?”
그 순간 최면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레드썬! 사인을 받은 사람처럼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엄마도 그냥 엄마가 처음인 어린 여자일 뿐이라는 건 다 커서 자기 아이를 낳은 후에야 하는 생각인데 당신은 인생 2회차입니까?”
농담을 하며 밥을 먹었다. 고3 시절 나에게는 엄마와 일요일마다 하는 데이트 루틴이 있었다. 광안리 바닷가 근처에 살았었는데 일요일이 되면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해운대 온천에 가서 목욕을 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뜨거운 물에 들어가 공부하느라 잔뜩 굳어진 어깨와 목을 주물러주고 나오면 다시 한 주를 달릴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았다.
당시엔 드물었던 드라이브 스루 매장이 해운대 맥도널드에는 있었다. 드라이브 스루로 필레-오-피쉬 버거를 사서 운전하는 엄마 한 입, 나 한 입 베어물며 집으로 돌아오던 우리의 데이트를 나는 내 아이가 커서 고3이 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내가 가졌던 그런 행복한 추억을 나는 우리집 고3이와 어떻게 만들어볼까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정해졌다. 아이와 함께 병원 가기. 병원에서 나오면 맛있는 밥 먹고 맛있는 디저트가 있는 카페가기.
올해 우리에게 일어난 전화위복으로 아이의 우울증 진단을 기억할 수 있도록 아이의 아이가 고3이 되었을 때 행복하게 추억할 수 있을만한 시간으로 만들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