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가 바꾼 일상] 식재료는 저렴, 외식비는 무서운 체코...
남편이 체코에 간 후 매일 오후 3시경이 되면 전화가 온다. 대화 내용은 대략 정해져 있다. 첫 질문은 '잘 잤어?'다. 우리 부부에게 '잘 잤어?'는 그저 인사가 아니다. 그가 우울증을 앓은 이후로 잠들기 어려워하고 어렵게 잠이 들어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한 전력이 있어서다.
근래에 남편은 주말이 되면 피곤하다며 하루종일 집에 누워있기도 했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피곤해도 밖에 나가서 돌아다녀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유형의 인간인 남편이었던지라 걱정스럽기도 하다. 나이탓도 있겠지만 이게 다 혼자서 챙겨먹는 게 부실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서다.
그런데 또 피곤해서 초저녁부터 아침까지 쭉 이어서 잔다는 얘기를 들으면 잘 먹지 못해서 잘 잔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는 셈이라 어떻게 해야 '잘 먹고 잘 잔다'로 넘어올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어쨌거나 잠은 잘 잔다고 하니 요즘은 그가 무엇을 먹고 지내는가에 초점이 가 있다. 평소 한식으로 삼시세끼를 챙겨 먹어야 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가기 전에 딱히 먹거리에 대한 걱정이 크지는 않았다. 장기해외체류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입을 모아 짐에 넣어가라고 했던 전장김이라든가 한국맛을 느끼게 해줄 소스 같은 것은 챙기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현실을 경험하기 전 우리가 세운 전략은 이랬다. 남편은 한국에 있을 때 내가 차려주는 밥은 가끔 먹고 주로 다이어터처럼 샐러드를 먹었다. 스테이크도 가끔. 스테이크는 남편이 잘 구웠기 때문에 남편에게는 2~3일에 한 번씩 장을 봐서 채소 손질을 해뒀다가 먹으면 된다고 일러주면 됐다. 푸성귀와 별도로 파프리카나 토마토, 바나나, 당근 같은 컬러가 다른 채소나 과일도 적절히 섞고 단백질도 매일 챙기라고 덧붙였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지는'이라고 마이크 타이슨이 그랬던가. 체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가재도구를 갖추기 전까지 한동안 외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남편의 일갈은 '음식이 다 너무 짜'였다. 그렇다면 해외에서 사는 남편에게 남은 선택지는 가능한 한 외식은 배제하고 재료를 사다가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단 짠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기 전에 들으니 체코는 물가가 싸서 돈을 펑펑 써도 금액이 얼마 안 되더라는 아련한 경험담이 쏟아졌다. 눈이 내릴 때 쓰던 의태어 '펑펑'을 돈에 쓰는 것을 보는 건 사뭇 낯설었다. 하지만 그들의 추억 속 체코 돈을 펑펑 써도 되던 때는 코로나 이전 시절에 멈춰 있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터져 남편이 갈 즈음에는 체코 사람들이 폭등하는 물가 때문에 못 살겠다고 거리에서 시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남편이 외식을 한 경우 가격을 물어보면 거의 2만 원대였다. 비싼 레스토랑을 간 것도 아니고 야외 카페에서 맥주와 함께 먹는 간단한 저녁식사가 그랬다. '딱히 싸지 않은데?'가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 주스가 맛있고 싸다고 했다. 바나나도 저렴하며 가격변동이 별로 없었다. ⓒ 최혜선
체코에서 좀 싸다 싶은 건 과일과 채소 등이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비싼 자몽 같은 과일이 비싸지 않은 과일에 속하는지 자주 사먹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상통화를 하면서 냉장고를 보여줄 때 100% 오렌지 주스가 자주 눈에 띄었다. 2리터에 5200원가량이라고 하니 비슷한 품질의 착즙주스를 한국에서 사 마실 때 비하면 반값인 듯 싶었다.
체코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누구나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감탄해 마지 않던 체코 맥주로 말하자면 한 잔에 4000~5000원 하는 것 같으니 한국에서 하우스맥주를 사 먹는 것에 비하면 비싸지는 않았다. 만족도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좀 많이 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라떼 얘기로 듣던 것처럼 한 잔에 천원, 이천원 수준은 아니었다.
남편에게 뭘 먹었는지 물어보면 주로 바로 먹을 수 있는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사다 먹는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거의 매일 먹던 바나나는 거기서는 한 송이가 항상 2000원 대로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바나나는 비쌀 때는 5000원도 넘어갔다가 쌀 때는 3000원 대로 내려왔다가 하는 것에 비하면 수급이 안정적인 듯했다.
그가 먹었다는 음식을 들어보면 늘 단백질이 부족한 것 같아서 챙겨먹으라고 매일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게 되는데 소고기 스테이크는 자주 먹기엔 그다지 많이 싸진 않고, 닭가슴살이나 삶은 계란은 손이 잘 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아직 적응 중이니 무리하게 강권하기보다는 단백질음료라도 사 마시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라고 일러두었다. 여기까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는 전개였다.
▲ 주로 공부하던 책상에 앉아서 샐러드를 먹으며 점심을 떼운다. ⓒ 최혜선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한식을 챙겨먹지 않던 남편이 된장찌개와 김치찌개, 밥과 반찬으로 이뤄진 한식을 간절히 먹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피곤해서 쉬고 싶은 주말에 3시간쯤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프라하에 오직 한식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서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할 정도였다.
영상통화를 할 때 남편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식이 이렇게 먹고 싶을 줄 몰랐다'고. 대중교통으로 가면 물건을 많이 사올 수가 없으니 차를 렌트해 프라하 한인 마트에서 라면 한 박스, 만두, 떡볶이, 물만 부으면 되는 미역국 같은 걸 잔뜩 사오겠노라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한식을 향한 그의 간절한 마음과 한식을 먹지 못해 뭔가 욕구불만에 사로잡힌 듯한 고군분투를 듣다보면 앱으로 토독토독 주문하면 뚝딱 대문 앞에 배달되는, 한국에서는 공기와도 같이 당연한 인프라를 어떻게든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싶다.
아이가 집에 와서 밥을 달라고 하면 15분이면 맞춤 밥상을 차릴 수 있다. 요즘 떨어지지 않게 채워두는 냉동 꿔바로우를 한쪽에서 바삭하게 익히면서 다른 화구에서는 두부 반 모 툭툭 썰어넣어 차돌박이 된장소스 한 봉지 넣고 냉장고 속 야채와 함께 익히면 되니 말이다. '맛있는 취사가 완성되었습니다'라는 비문을 당당히 뱉어내는 밥솥의 갓 된 밥은 거들 뿐.
요즘 남편과 하는 통화 내용은 학기가 끝나고 12월에 한국에 들어오면 어떤 것들을 사갈까 궁리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체코에 돌아가서 다시 몇 달을 무난히 한식에 대한 결핍을 잠재워가며 오래 버틸 수 있도록 말이다. 장기간 저장 가능하고 여기저기에 활용하기 좋아서 밥 먹을 때 간단히 한식 느낌을 줄 수 있는 동시에 수하물로도 보낼 수 있는 뭔가를 찾아야 한다!
욕심 같아서는 최근 미국 마트에 진출해서 대박을 쳤다는 김밥처럼 한식의 인기가 더 널리 퍼져 체코의 일반 마트에서도 한국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외국에 교수가 돼 나가 영어로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연구논문을 잘 쓸 수 있을까를 주로 고민했는데 막상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외로움과 밥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고민을 같이 해결해 보려다 생활의 근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른들이나 선배들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했던 건 괜한 표현이 아님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던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