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의 재활용쓰레기 분리배출은 목요일이다. 남편은 수요일에 귀국했다. 돌아온 다음날부터 원래 자기 일이었던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분리배출을 하는 날의 수를 세며 자기가 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가늠했다.
"분리배출을 두 번 했으니, 내가 온 지 2주가 된 건가?"
그렇게 지내다가 금요일에 출국을 했으니, 마지막 분리배출을 해놓고 다음 날 떠난 셈이다.
가족과 함께 한국에 머무는 기간은 겨울방학 2달이었다. 본가와 처가의 어른들을 찾아뵙고 평소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가족들과 평범한 일상을 지낼 것이라고 딱히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무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그가 들어온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유방암 진단을 받으시고 1년 반쯤 차근차근 치료를 해오셨는데 그 과정에서 당뇨에 림프부종, 급성 백혈병까지 합병증이 왔다. 직접적인 사인은 폐렴이었다(관련 기사: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새 내복을 못 입어보시고 https://omn.kr/27947 ).
장례식을 찾아 함께 아픔을 나눠준 분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황망하지만, 그래도 아들이 들어와 있을 때 임종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남편이 체코에 있는 동안 어머님이 위중해지셨다면 임종을 하지 못했을 터였으니 맞는 말이다. 남편도 나도 동의하는 말이다. 하지만 남편의 상실감은 크고 깊었다.
이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수도 없고, 다정하게 '00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으며 본가에 가도 맞아줄 어머니가 없다는 것, 명절에 가도 어머니가 찜통 가득 해놓은 곰국을 더 이상 먹을 수 없고, 엄마의 김치를 더는 먹을 수 없다는 것. 그 동안 좀 더 따뜻하게 말하지 못한 것, 더 많은 곳을 모시고 다니지 못한 것... 많은 것들이 후회로 남아 그는 한동안 쉽사리 잠들지 못 했다.
어머니를 여읜 충격에서 조금씩 회복되어가자, 이제는 가족을 떠나 다시 혼자서 지내야 할 날이 다가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남편이 처음 체코의 대학에 임용되었을 때 우리는 축하하는 것과 동시에 고민했지만, 가족들이 함께 해외로 나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한국에 직장이 있는 내가 따라 나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체코 현지학교에 다닌다면 그렇게 돈이 많이 들진 않겠지만 각각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대학 진학에 영향을 줄 귀한 시기를 알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체코말 속에서 지내야 하는 기간이 길터였다. 그렇다고 국제학교에 보내자니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영어로 수업한다고 잘 알아듣는 것도 아닐 것이고.
남편은, 연봉계약을 하긴 했지만 세전 연봉으로는 실수령액을 정확히 예상할 수 없었고 체코에서 생활하면서 돈이 얼마나 들지도 가늠할 수 없었으며 그러니 당연하게도 매달 얼마를 송금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왜 고향에 가고싶어도 못 가는 줄 알아? 항공권이 너무 비싸서 그거 타고 왔다갔다 하면 가족들에게 돈을 보낼 수가 없으니까. 당신도 이제 외노자가 되었으니 겨울에 한 번만 들어오는 걸로 하는 게 어때?"
우린 그렇게 합의를 했다. 유럽의 겨울은 습하고 해가 난 시간이 짧고 그나마도 날이 흐려서 우울증을 부르는 날씨라고 하니, 겨울 방학에 나오는 것으로.
그런데 남편이 겨울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온지 이틀쯤 지났을까? 프라하에서 총기 난사사건이 일어났다. 남편이 귀국한 줄 모르는 사람들의 쏟아지는 안부 전화를 받으며, 그는 말했다. 유럽의 겨울 날씨 때문에 그 계절에 정신건강이 나빠지는 사람이 많다고. 나는 겨울에는 절대 유럽에 남편을 혼자 두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처음엔 겨울방학에만 나오는 것에 수긍하던 남편이, 한 학기를 혼자 지내고 들어와 가족과 함께 두 달을 지내고 나더니 안 되겠다고 한다. 가족을 1년에 한 번, 두 달간만 보는 건 너무 힘든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가정적인 남자는 외로움에 취약하다.
체코의 대학에 임용되었을 때 가족과 함께 오냐는 학장의 질문에, '아니'라고 했더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던 이유를 그는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고 했다. 가족중심적인 생활 방식의 유럽에서 기혼 남성이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기 쉽지 않을 거라는 걸 학장은 이미 알았던 거라고... 남편은 체코로 다시 출국해야 할 날이 다가오자 몇 번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국에는 일이 없고, 체코에는 가족이 없다
▲ 처음 출국하던 날 ⓒ 최혜선
처음 출국할 때는 가족을 떠나 혼자 생활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는 알지 못했기에 얼떨결에 떠났다. 하지만 이제 그는 체코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독의 시간을 안다.
12월 중순에 들어와서 2월 중순에 나갔으니 1년의 6분의 1을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낸 셈이었지만,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그가 혼자 내쉬는 한숨 소리는 커져만 갔다. 체코에서 하게 된 일은 18년간 줄곧 원해왔던 일이지만, '가족 없이 혼자!'라는 조건이 붙자 한 학기만에 내키지 않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에는 가족이 있지만 그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일이 없다. 체코에는 가족이 없지만 그를 기다리는 일이 있다. 자기만의 방과 연구실, 들어가야 할 회의, 해야 할 수업들. 그리고 이제는 종종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현지 친구들도. 거기에 더해 이번에는 이민가방 하나 가득 좋아하는 식재료를 챙겼다.
▲ 위급할 때 그를 구해줄 한식재료 ⓒ 최혜선
라면 20개와 전장김, 좋아하는 차돌된장 양념과 누룽지까지. 전래동화에 나오는 신령님이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주는 색색깔 주머니처럼 그가 여름방학을 맞아 다시 들어올 때까지의 긴 시간 동안 한국의 맛이 그립고 가족이 보고 싶어 위기를 맞을 때 하나씩 꺼내어 가며 다시 원기를 회복했으면 한다.
한국과 체코를 오가는 비행기값은 한국에서도 체코에서도 인생에서 중요한 한 가지씩이 결핍된 채 생활하는 그가 안정된 정서를 유지하는 비용이라 치고 기꺼이 써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게재되었습니다.